<숨결이 바람 될 때> 20160822 폴 칼라니티 作
죽음을 앞둔 이의 글들은 비교적 흔합니다. 죽음은 한 개인에게 단 한 번 뿐인 극적인 경험이자, 매우 큰 비극이기 때문이지요.
죽음은 글을 쓰는 이에게도 매우 좋은 글감이 되고, 읽는 이들의 입장에서도 감정이입하기 쉬운 주제 중 하나입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의 많은 글들은, 한 편으로는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삶을 아쉬워하는 일련의 과정을 담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결국 매우 슬픈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이런 글을 읽는 이들은, 타인의 죽음을 간접 체험하며 자신의 남은 삶을 좀 더 후회없이 살 것을 다짐합니다.
'죽음을 앞둔 의사의 <숨결이 바람 될 때> 역시 죽음을 앞둔 의사의 글입니다. 저는 책 소개만 보고서는 흔한 감동과 흔한 슬픔을 담은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앞서 이야기 한 '죽음을 앞둔 글' 공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신경외과는 뇌와 의식만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찮은 물질주의, 쩨쩨한 자만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문제의 핵심, 진정으로 생사를 가르는 결정과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곳에서 어떤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숨결이 바람 될 때> p.105
저자는 그저 우연히 의사이면서 우연히 암이라는 큰 병을 얻어 우연히 그 투병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고민하다가 그 답을 찾기 위해 뇌를 연구하는 의사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작가는 책의 전반부, 그러니까 본인의 병에 대해 알기 전부터도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에 대해 깊이 고민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에게 암이라는 큰 사건이 없었더라도, 그는 언젠가 인간 존재에 대한 글을 쓰고 책을 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죽음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훌륭한 작가였습니다.
책의 전반부는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택하기까지의 고민과 사색이, 후반부는 그의 투병 과정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암 환자로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남은 삶에 대한 아쉬움,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다가, 또다른 순간에는 '의사인 자신' 으로서 '환자인 자신'을 진단하고 돌보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의사가 아닌 일반 환자처럼 자신의 주치의에게 온 마음을 기대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앉아서 의과 대학원 시절 루시와 함께 직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는 춤을 추며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너무 슬펐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존재인지도 모르고 함께할 인생을 계획했다. 내 친구인 로리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을 때 약혼자가 있었다. 이 편이 더 잔인할까?
다시 한 번 나는 의사에서 환자로, 주체에서 객체로, 주어에서 직접 목적어로 돌아왔다.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의 내 삶은 내 선택들이 쭉 이어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현대적 서사에서 한 인물의 운명은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중략)
하지만 이제 나는 인간의 행동이 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셰익스피어의 비극보다 그리스 비극과 더 닮은, 오래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와 그의 부모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힘에 접근하려면 신성한 환상을 보는 예언자들을 통하거나 신탁을 받아야 한다. 내가 에마를 보러 온 이유는 치료 계획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 받게 될 의학적인 조치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신탁과도 같은 지혜의 말을 듣고 위안을 얻고 싶었다.
-<숨결이 바람 될 때> p.214
저는 눈물이 굉장히 많은 편인데, 이 책을 읽고서는 울지 않았습니다. 다만 담담하고 묵직한 슬픔이 가슴 깊숙히 저를 짓눌렀습니다. 이 책이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물을 한 번에 모아서 터뜨리는 '영화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 영화는 잘 다듬어진 영화적 장치를 통해 특정 상황, 특정 감정으로 관객을 서서히 몰아 넣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 감정을 펑! 하고 터뜨려 클라이막스를 연출하지요. 마치 시한부 삶을 겪고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지난 생을 회고하듯이, 모든것은 예측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사건이 벌어지도록 편집할 수 있습니다.
반면 <숨결이 바람될 때>는 진짜로 죽어가는 한 사람이 쓴 투병의 기록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글을 쓰고 있는 작가조차 그 결말이 언제 올지, 지금 자신이 기승전결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다소 덜 다듬어지고, 때로는 '시한부의 삶'이라는 주제에 다소 어긋나 보이기도 하는 작가의 개인적 독백과 고민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한 번의 극적인 눈물바다보다는 잔잔하고 오랜 물결같은 슬픔을 주는 책입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폴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미완성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삶의 마지막 몇 해 동안 폴은 목적의식을 잃지 않고 또 움직이는 시곗바늘에 자극받으며 쉼 없이 글을 썼다. (중략) 점점 악화되는 암으로 살인적인 피로를 느끼면서도 완화치료를 받는 동안 그가 제일 신경 썼던 건 집필에 필요한 정신력의 유지였다. 그는 어떻게든 글을 쓰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숨결이 바람 될 때> p.252
불치병에 걸렸어도 폴은 온전히 살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활기차고 솔직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숨결이 바람 될 때> p.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