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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원 Mar 05. 2016

메세타에서 만난 토마스

홀연히 나타나는 신비한 마을, 온따나스

온따나스에서의 일이다.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저녁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마을 슈퍼로 가는 골목길.

왠 술에 잔뜩 쩔은 스페인 청년 하나가 길을 막더니 혀 꼬부라진 소리로 '시비'를 걸어왔다. 영어로 말해도 잘 못 알아듣는 판국에 빠르고 똑바르지도 않은 사투리 같은 스페인어로 말이다.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붙잡기까지 한다. "술먹었으면 잠이나 주무셔" 우리말로 욕을 퍼부어 주었더니 다시 바르로 들어간다. 슈퍼에서 나오는데 조금전 그 친구가 또 가로막는다. 이번엔 옆에 다른 친구들도 있다. 다행히 한 친구가 영어가 조금 된다. 나보고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래, 그건 그렇고 쟤 왜저러는데"

"오늘이 생일인데 너도 와서 한잔 하라고 초대하는거야"

이크, 술 취했다는 사실과 험악해 보이는 인상 하나로 선입견을 갖고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미안해졌다. "사실 나도 낼모레가 생일인데. 그 친구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줘. 하지만 지금 술은 못해"


[8.1 금요일 / 걸은지 15일째]

아쉬운 마음을 겨우 추스리고 부르고스를 떠나는 아침. 이 날의 쉼표는 아름다운 산볼에서 찍으리라 다짐했지만 결국 온따나스까지 걸었다.

부르고스를 떠난지 얼마나 되었을까. 타르다호스(Tardajos)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먼저 출발했던 소르사 할머니 부부가 쉬고 있었다. 삭발에 긴 금발머리 몇가닥을 딴 독특한 차림의 집시 청년과 함께였다. 그는 벨기에 청년 토마스였다.

토마스와는 온따나스까지 동행했고, 이후에도 폰페라다까지 가는 내내 생각하지도 못했던 마을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를 반복했다. 걷는 속도가 비슷했던 것이다.

소르사 할머니 부부가 중간 마을에서 묵어야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토마스와 함께 걷게 되었는데 나는 사진을 찍느라 그리고 토마스는 무릅이 많이 안 좋아서 걷는 속도가 비슷했다.

무언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토마스와 보디랭귀지를 동원해가며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벨기에의 복지시설(고아원은 아닌것 같고, 소년원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에서 자랐고 무척 말썽을 많이 피운 문제아였다. 하지만 철이 들어가면서 이 길을 걷고 싶어졌고, 까미노를 마친 후에는 자신과 같은 문제아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는 각오를 가진 청년이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이고, 돈이 별로 없어서 캠프와 비박 위주로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어느 마을에선가 토마스를 다시 만났는데 뜬금없이 그가 나에게 우리말 단어 몇 개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Sun, Moon, Star 를 한국어로 어떻게 부르느냐는 것이다. "해, 달, 별 이라고 해" 라고 알려주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팔짝 뛰며 좋아했다. 발음이 너무 예쁘다는 것이다. 그 다음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해, 달, 별 그리고 음양오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줘" 라는 다소 엉뚱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일본에 사는 그의 누나(친누나 인지는 모르겠다)로부터 들었단다. 물론 영어가 딸리는 나는 전혀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토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책 한권을 써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중간 중간 에피소드 위주로 남겨두려 한다.

메세타 고원의 시작을 알리는 독특한 모양의 봉우리
메세타 구간에서는 끝없이 이어진 길을 내다보며 걷게 되므로 다소 지친다

토마스와 이야기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순례자들에게 최고의 안식처라는 찬사를 받는 산볼을 지나고 있었다. 산볼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한 마을 더 가서 신비로운 온따나스에 묵기로 했다.

온따나스는 메세타 고원을 정처없이 걷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자기 불쑥 눈 앞에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신비로운 마을이다. (아래 사진처럼 나타난다.)

마을에 도착한 뒤 토마스는 어딘가로 야영을 하러 떠나고 나는 어머니의 세례명과 같은 산타브리히다(성녀 브리짓다) 알베르게에서 여정을 마쳤다. 알베르게에는 세 여자가 묵고 있었는데 그 중 스테파니 아주머니와는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

온따나스의 아이들

[전체일정]  https://brunch.co.kr/@by17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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