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로헤리스를 지나면 메세타에 감동할 수밖에
압도되고 만다. 카스트로헤리스 자체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마을인데다가 그 마을을 지나 산길을 오르며 뒤돌아보면, 그리고 앞쪽을 바라보면... 메세타를 걷는다는게 이런 감동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얼마나 위대한 자연의 모습인지.
[8.2 토요일 / 걸은지 16일째] 부르고스 이후 시작된 메세타 고원은 평균 600~700미터의 고도를 따르는 길이다. 건조하고 지루한 길이지만 그 광활한 풍경 때문에 절대로 놓쳐서는 안될 길이기도 하다. 간혹 체력이나 시간상의 문제로 산티아고 순례자 가운데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의 메세타 고원 구간을 버스나 기차 등으로 건너뛰는 사람들도 있다.
온따나스를 출발하여 뭔가 고대의 유적이 나타날 것만 같은 산길을 돌아 올라가던 중 토마스를 다시 만났다. 그는 지난밤 야영(아마도 비박)을 했단다. 담배를 나눠 피우며 잠시 쉬면서 토마스의 배낭을 구경했다. 겉에는 냄비 하나가 매달려 있고, 커다란 물통과 배낭 안의 침낭, 그리고 자그마한 피리 하나.
온따나스에서 세시간 정도 거리에 성 안토니오 수도원(Convento de San Antón)의 유적이 있다.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으로도 이용되었던 곳인데 순례길은 아치 아래를 지나 계속된다.
산안톤을 지나면 카스트로헤리스의 성채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평선 끝에 봉긋 솟아있는 봉우리 꼭대기에 카스트로헤리스의 옛 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온따나스에서 카스트로헤리스까지는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변을 걷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지루하고 어떤 면에서는 발이 편한 구간이다. 산안톤에서 카스트로헤리스 마을입구까지는 대략 30분이 걸렸다.
카스트로헤리스 산성(Castillo de Castrojeriz) 남쪽으로 부메랑처럼 펼쳐져 있는 카스트로헤리스 입구에 다다르면 너무나도 균형 잡힌 아름다운 성당의 모습이 보이는데 사과나무의 성모마리아 성당(Santa Maria del Manzano)이다. 성당 옆으로 난 골목을 따라 봉우리 위의 옛 성터를 바라보며 가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사도 성 야고보(산티아고)가 이베리아반도에서 전교여행을 할 당시 이 곳 사과나무 위에서 성모마리아가 나타났다. 이 곳은 내부의 제대와 천장이 너무 아름다운 곳이다. 성당 부근 전깃줄에 어느 순례자가 던져올린 신발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한동안 까미노에 유행처럼 번졌던 신발 던져올리기를 했나보다.
성당을 나오면 골목 끄트머리에서 카스트로헤리스 성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생략했다. 마을 외곽에서 만나는 산 후안 성당은 주랑과 성당 안 소박한 제대, 그리고 천장의 그림등이 볼만하다.
그러나 카스트로헤리스의 진가는 지금부터다. 마을을 빠져나오면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오르막길이 야속하지만, 바로 그 곳을 오르면 이 곳 까미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만날 수 있다. 하느님을 저절로 부르게 되는 엄청난 자연의 신비가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 곳에 오르면 메세타 고원을 왜 걸어야 하는지 알게 되며, 자연 앞에 압도되어 버린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도 새삼 깨닫게 된다.
꽤 올랐건만 평지가 나온다. 끝없는 지평선 따라 앞으로 가야 할 마을들이 보이고, 앞서가는 순례자의 모습도 점처럼 보인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두개의 이테로라는 마을을 지나게 된다. 하나는 이테로 델 까스띠요(Itero del Castillo) 다른 하나는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다. 두 마을 사이에 삐수에르가라는 강이 흐르는데 그 강을 건너는 피테로 다리 직전에 비밀스럽고 뜬금없는 사각형의 건물이 하나 서 있다.
그 앞에 쉬고 있던 순례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탈리아 아주머니였다.
"너도 여기서 잘거니?"
"여기가 어딘데요?"
"여긴 아주 유명한 산 니콜라스 은수자의 집이란다. 여기에서 자려면 세시까지 기다려야 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두시 조금 못되어서 때맞춰 문이 열렸다. 아주머니는 신이 나서 말했다.
"여기서는 꼭 자야 한다고 해서 나는 열두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문을 들어서니 성당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기부제 알베르게였다. 2층 침대 몇 개가 보이고, 함께 식사를 하는 식탁과 성당의 옛모습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정말 머물고 싶은 곳이었지만 더 걷고 싶은 충동을 못이기고 길을 나섰다.
세시간 정도를 더 걸어 보아디야 델 까미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마무리 하기로 했다. 그리고 보아디야에서 나는 또한번 자연의 위대함을 체험하게 된다. 엄청난 모래폭풍이 조용히 다가와 순식간에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보아디야의 공립알베르게는 아주 작고 독특하다. 침대에 짐을 풀고 빨래와 샤워를 마치자마자 마을을 한바퀴 돌기로 했다. 빨래를 널고 있는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말을 타고 가는 순례자를 만나게 되는건가?"
그동안 걷는 순례자들은 물론 자전거, 오토바이, 개와 함께 다니는 순례자, 멀리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부터 걸었다는 사람들을 골고루 만나 왔는데 말을 타고 가는 순례자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는 보기좋게 빗나갔다. 마을 청년이 말을 타고 온 거였다.
인사를 나누고 마을 구경을 다니던 중 바로 그 모래폭풍을 만났다. 평온했던 마을 전체가 순간 암흑으로 변하더니 회오리 바람이 몰려왔다가 광장을 한바퀴 휘돌고 물러갔다. 흡사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바람으로 변한 연금술사 산티아고가 다녀간 느낌이었다. 부랴부랴 숙소로 돌아오니 널어 두었던 빨래들이 모래를 잔뜩 묻힌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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