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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대형 사고, 그 첫 번째

2025년 9월 20일 토요일

by 제갈해리

조현병을 앓고 난 후, 나는 세 번이나 대형 사고를 쳤다. 모두 조현병 증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각각 폭력 사건으로 점철되어 경찰서에 연행되고, 종국에는 재판까지 받게 되었다.


첫 번째 사건은, 2017년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그 당시 나는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나 6개월 정도 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다음 해인 2017년 3월에 내가 다니던 대학에 복학했다. 학교에 복학해 최대한 (사고를 치지 않으려고) 조용히 학교를 다녔는데, 병증이 다시 도져 신적인 존재가 내 주변에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평소 나는 음양오행이나 사주팔자에 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나와 연결시켜 생각에 빠져 들었다. 십이지신이나 사방신이나 윷놀이 같은 것들과 뒤죽박죽 섞여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과 신의 관리자들이 실제로 인간의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학과 담당 교수님들의 사무실이 다섯 개였는데, 나는 교수님들이 각각 도, 개, 걸, 윷, 모를 상징하는 동물 신의 관리자라고 여겼다. 그중 개에 해당되는 시론 교수님이 (태양계와 우리 은하를 다스리는) 예수님 내지는, 메시아라고 생각해 그분 사무실에 자주 들락날락거렸다. 물론, 내가 쓴 시를 점검받는 형태로 사무실에 방문하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시론 교수님의 눈빛과 말,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분이 내게 내리는 어떤 미지의 사명 같은 게 있지는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하면서 말이다.


학교를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16년, 그러니까 작년에 학과 대면식에서 술에 만취해 학과 후배들에게 말실수(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급한 말이었다)로 잘못을 저지르면서 학과 학생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으로 조현병이 처음 발병했는데, 한 번은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한 혼잣말이 나한테 한 얘기인 줄 알고, 조금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맞받아쳤는데, 학생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돌림을 당하면서 내 병은 점점 더 깊어졌고, 나는 결국 혼자 청와대로 진입하려다가 실패하고, 레스토랑 담을 넘으려다가 경찰서에 연행되어 끝내는,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되었고, 대학을 휴학하게 되었다.


2017년에 복학한 뒤에도 나에 대한 소문이 돌았던 건지, 아니면 내가 고대 화석(복학생)이라서 그런 건지 나에게 말을 걸고, 친하게 지내려는 후배들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혼자 수업을 듣고, 혼자 식사를 하고, 혼자 등하교를 해야 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그까짓 거 훌훌 털어 넘기자,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가끔씩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 몰려와 걷잡을 수 없이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같은 수업을 드는 몇몇 후배들과 내 수업을 담당하시는 교수님들이 복학한 나를 반갑게 맞아주고, 함께 얘기를 나눠 주었다. 홀로 이 힘든 시기를 견디지 못할 것 같았는데, 그들이 있어주어 곁이 든든하고,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또다시 병증은 도졌고, 수업 시간 동안 나는 말과 글을 내 멋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다 못해 스크린 화면에 뜬 마우스 포인터조차도 신의 계시라고 여기기까지 했다. 교수님들의 말속에도 무언가 신에 대한 정보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유심히 들었고, 교재 속에도 어떤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유심히 읽었다. 남들이 보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여겼겠지만, 나는 문자를 내 방식대로 다르게 해석했다.


예를 들면, 사진이라는 단어는 원래 뜻과는 달리, 죽을 사(死) 자와 졌다 할 때의 진이 합쳐져 죽었다, 졌다는 표현으로 읽혔다. 그래서 죽음 후에 진 것, 심판의 때에 종말이 온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서 나는 좀처럼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 신촌의 정신과 의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열심히 먹고, 병원에서 운영하는 심리상담도 꾸준히 받고 있었는데도 도저히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담을 해주시는 남자 상담사 선생님이 비록 인턴이시기는 했지만(당시 상담 비용이 전문상담 선생님은 한 회기당 7만 원, 인턴 선생님은 2만 원으로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에 인턴 선생님을 통해 상담을 했다), 성실하게 내 얘기를 들어주시고, 내 왜곡된 사고를 하나씩 바로잡아 주셨다. 그런데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선생님께서는 (내가 버거워 상담하기가 힘드셨는지) 더 이상 나를 맡기 어렵겠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그렇게 병원 심리상담은 중단되었다.


그러면서 병증은 점점 더 악화일로로 가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에서 매주 한 요일을 정해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도 뭔가 다른 내담자들이 나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도 내가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때, 프로그램을 함께 참여하는 후배 한 명이 있었는데, 그 후배가 하는 말(주로 혼잣말)과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나와 뭔가를 두고 두뇌싸움을 하는 건지 경쟁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을 두고 그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경쟁하는 것일까. 나는 계속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대학 건물 앞에 물류기사 분이 몰고 온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 트럭에서 물류기사님이 내려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그때 까야 한다는 어떤 말소리(환청이었겠지만)를 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까야할까, 나는 망설였지만, 결국 그 말소리에 이끌린 듯 물류기사님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물류기사님은 나에게 맞고 주춤하셨는데, 나는 또다시 타야 한다는 어떤 말소리를 연이어 듣고, (어떤 용기였는지) 트럭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러나 어떤 일도,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이 몰려와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곧 경찰들이 신고를 받고 왔고, 나는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경찰서로 가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나는 물류기사님을 폭행한 죄로 인해 조서를 쓰게 되었다. 경찰서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과장 교수님이 도착하셨고, 교수님을 보면서 나는 또다시 신의 계시나 처벌이 주어질까 조바심을 내면서 불안해했다. 그러나 교수님은 나를 걱정하시면서 조현병이 있는 아이이니, 선처를 부탁한다고 경찰 분에게 말씀하셨다. 결국 경찰서에서 훈방조치가 되어 나온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경찰 측과 교수님에게 연락을 받은 아버지와 앞일(앞으로 물류기사와 합의할 것에 대해)에 대해 의논했.


몇 개월 후, 서부검찰청 법률조정위원회로부터 출두 통지를 받고, 아버지와 함께 검찰청으로 갔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물류기사님은 나오지 않으셨고, 합의금 100만 원으로 조정하겠다는 법무관의 전달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합의금 100만 원에 완만히 해결되어 다행이라고 하셨지만, 근본적인 병의 치유는 완만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병의 현실적인 부분, 즉 병증의 심각함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학과 교수님들이 내가 친 대형 사고로 인해 쓸어내렸을 가슴을 생각하면, 한없이 죄송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병을 치유할 만한 특별한 방법이 없다는 게 나를 더 힘들게 한다. 약을 꾸준히 먹고, 상담을 받고 있었는데도 병증이 올라오니, 정말 미칠 노릇이다. 게다가 병증이 심각해지면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판단조차도 하지 않는 게 문제 중의 문제다.


트리플 대형 사고 중 첫 번째 사고는 이렇게 주변의 걱정과 염려와 함께 끝을 맺었는데, 남은 두 사고도 만만치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가진 병이 정말로 심각하기는 한 것 같다. 주변에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고, 내 스스로 병을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현병을 획기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약이 하루빨리 개발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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