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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l 28. 2021

내 비자금의 착한 소비

내 비자금은 가족을 위한 위로금입니다

 "철수 씨는 나 몰래 만들어놓은 비자금 같은 거 없어요?"



주변 지인들 중에는 대기업을 다니면서 급여가 많아서 용돈 씀씀이가 큰 사람도 있고, 급여 외적으로 돈을 챙겨서 소위 말하는 비상금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또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급여 관리를 직접 하는 사람들도 있다.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나와는 다르게 자신이 가진 돈으로 주식도 하고, 코인도 하고, 자신이 필요한 물건들도 척척 사는 사람도 있다. 난 이런 사람들이 가끔은 부러울 때도 있지만 크게 의식하지 않고, 내 주머니에 만족하며 사는 부류다.


한 달에 한 번씩 빼먹지 않고 오는 월급날이면 아내는 내게 한 달 동안 쓸 용돈을 송금한다. 이렇게 매달 받는 용돈에서 아이들 용돈, 자동 이체 보험료 그리고 교통비를 제하면 하루에 쓸 수 있는 돈은 대충 만원 정도다. 난 담배도 태우지 않고, 회사 회식 자리를 제외하고는 저녁 술자리 또한 거의 없다. 평소에도 술자리가 자주 없지만 코로나로 밖에서 약속은 아예 잡지 않는 편이다. 가끔 주머니에서 나가는 지출이라 하면 동료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거나, 동료들에게 커피나 음료를 사는 일이다. 물론 이런 지출 이외에도 개인적인 취미 생활을 위한 지출은 꾸준히 하는 편이다.


티클 모아 태산이라고 했던가. 작은 돈이 조금씩 모여 주머니가 살이 찌게 되면 난 어김없이 가족을 위해 지갑을 연다. 가끔 아내와 딸이 좋아하는 초밥을 살 때도 있고, 온 가족을 위한 소고기 파티를 할 때도 있다. 또 아내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취미 생활을 위한 소품을 사달라고 할 때도 내 지갑은 아낌없이 열리곤 한다.

 

 "철수 씨! 아니 오빠~! 나 브레드박스 사주세요. 매일 먹을 비타민 하고, 유산균 넣어놓으면 예쁠 거 같아요." 아내의 콧소리 가득 섞인 말이 오랜만이어서 더 듣기 좋다.

 "그래요. 얼마면 돼요?" 기분 좋게 얼마냐고 묻는 걸 들으며 아내는 내가 이미 반쯤 허락을 한 상태란 걸 잘 안다.

 "2만 원이요. 철수 씨, 고마워요" 또 한 번 애교 섞인 소리에 난 이미 아내 계좌로 입금을 하기 위해 은행 앱을 실행 중이다. 이런 아내와 내 모습을 보고 있던 딸아이가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내에게 따져 묻는다.

 "엄마는 용돈 받는 아빠한테 그걸 사달라고 하냐"

 "딸, 너무 부러워하지 마. 넌 너네 오빠한테 사달라고 해" 아내가 딸에게 자주 하는 레퍼토리다.

 "잉? 씨알도 안 먹히는 얘기지만. 아빠~!, 나도 티셔츠 하나 사주세요" 딸아이까지 이렇게 나올 때면 오늘은 쉽게 지갑이 닫히지 않을 거라는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

  "딸내미, 아빠는 내 오빠지, 너네 오빠가 아니잖아" 하지만 아내의 마지막 멘트로 오늘의 소비는 다행히 여기서 끝났다.


늘 이런 식이다. 이러니 내겐 용돈이 모일 일이 없다. 몇 해전 아내의 지인 남편이 자신의 아내에게 근사한 목걸이와 반지 세트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그 얘길 듣고서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보다 급여나, 용돈 모두 많이 받겠지만 그래도 용돈으로 그 비싼 물건을 덜컥 살 정도의 주머니가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욕심이었다. 나도 이런 마음인데 아내는 당연히 더 많이 부러워하는 눈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물하신 남편분의 순수한 뒷주머니에서 나온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무작위로 전화해 상품을 파는 텔레마케터에게 속아 무척 싼(?) 가격에 덥석 그 물건을 샀다고 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처음 지불한 금액보다 추가로 내야 할 금액이 더 많았다. 결국 큰 금액을 더 지불하고 나서야 그 목걸이는 온전히 아내 지인분의 것이 되었다. 소위 얘기하는 온라인 다단계 같은 것에 당한 것이다. 선물을 하고도 한 동안 그분은 집에서 어깨를 펴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작년에는 내게도 소위 얘기하는 비자금을 만들 기회가 있었다. 본캐인 회사일을 제외하고 지인분의 도움 요청으로 외부의 컨설팅을 시간 날 때 조금씩 했었다. 처음부터 어떤 대가를 바라고 시작했던 일도 아니었고, 많은 시간을 뺐었던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가끔씩 만나서 차 마시며 내가 가진 작은 기술력으로 도움을 주고, 필요하면 주말, 휴일에 문서로 작성해서 전달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늦은 가을날 예전 직장 동기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분과 함께 근무하는 동기가 내게 계좌번호를 보내달라고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그 지인분이 선물을 할까 하다가 그래도 현금이 낫겠다 싶어 계좌를 알려달라는 거였다. 받아도 되나 싶었지만 그냥 용돈 정도 주나 싶어 크게 부담 없이 계좌번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한 동안 잊고 지내다 연말에 입금 문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찍힌 금액이 조금 의외의 큰돈이었고, 난 마치 연말 보너스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외부 컨설팅을 해주고, 하루 노임 단가로 적용해 돈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한 번에 이런 돈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신기했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그렇게 받은 돈은 순수하게 내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조금의 용돈을 전달했다. 그리고 가족 외식비용으로도 조금씩 지출됐다. 그렇게 조금씩 야금야금 쓰면서 통장의 돈은 줄기 시작했다. 물론 돈을 받았다는 얘기는 애저녁에 아내에게 했다. 처음에는 가족 여행 통장에 돈을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만류로 결국은 내 통장에서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자기 소임, 아니 쓰임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온라인 펀드 상품을 알게 됐고, 일부 돈은 작게나마 펀드 상품에 가입돼 생명을 연장받게 됐다. 매주 조금씩 넣으려고 했던 계획과는 다르게 처음엔 목돈(?)을 입금했다. 써야 할 돈을 넣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은 들었다. 하지만 통장에 숫자는 조금씩 작아졌고, 꾸준히 줄던 통장의 숫자는 이번 달에 잔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내게 경고했다. 숫자가 줄어든 통장을 보며 펀드 상품에라도 넣은 돈이 남았다 생각했더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일 년이 체 지나지 않아 조금씩 바닥을 보이는 통장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다음에 가족을 위해 서프라이즈 할 목돈을 남겨놓아서 좋았다.


살면서 갑자기 필요한 무언가가 부족한 상황이 올 수 있다. 그게 돈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특히 돈은 당장 필요한 만큼만 있어도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갑자기 필요한 상황이 되었을 때 모아놓거나, 여유 있는 상황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험을 들고, 적금을 들고, 생활자금 이외의 통장을 만들어 관리한다. 비상금(非常金)은 말 그대로 '뜻밖의 일이 생겼을 때 쓰려고 마련해 두는 돈'이지만 많은 남편들에게 비상금(非常金)의 의미는 '딴 주머니'라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비상금을 사수하기 위해 책장 책 속에도, 옷장 속 입지 않는 옷 안주머니에도 비상금을 감추는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난다. 내게도 가끔은 이런 비상금(非常金)이 생긴다. 하지만 내 비상금(非常金)은 숨지 않고, 가족을 위해 사용하는 말 그대로 여유자금이다. 난 오늘도 가족을 위해 어떤 소비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다. 작년 연말에 마련해 놓은 내 비상금(非常金)은 그래서 오늘도 조금씩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지는 비상금(非常金)을 보며 오늘도 난 그저 웃는다.


 "철수 씨, 나 몰래 만들어 놓은 비자금 같은 거 없어요?"

 "내 통장에 있잖아요. 작년 연말에 생긴 돈이요"

 "아니, 그건 내가 아는 돈이니까 비자금 아니잖아요. 그 돈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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