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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st Writer Dec 08. 2021

남자와 부엌일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돼, 라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지겹게도 들었다. 남자는 작은 일을 하면 안 되고, 크게 호탕하게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운전하면 안 된다는 말도 원리는 같다. 어딜, 집안일이나 할 것이지, 라는 추임새가 아직도 가끔은 희미하게 떠오른다. (참고로 필자는 토종 한국인이다)


고등학교 때 첫 설거지를 해봤다. 그것도 다름 아닌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알려 준 것. 그전까지는 말 그대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지냈다. 물론 이 사실이 이상하다는 자각도, 대학교에 입학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십여 년이 흘렀다. 나에게 엄격한 교육을 설파했던 교육자들은 여전히 호탕하게, 남자답게 여러 가지 큰일을 벌이다가 모두 실패(?)하고 집에서 조용히 지낸다. 하늘을 떠받들 듯 군말 없이 조신하게 그들을 뒷바라지했던 여인들은 황혼이 된 지금, 이혼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이 없다. 지긋지긋해, 주제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집안일, 말 한마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한다고.


현재, 21세기에 태어난 남자아이에게, 남자는 크게 호탕하게 살아야 해 부엌에 들어가면 안 돼,라고 말한다면 그건 아이가 잘되길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일까. 이런 질문에 고민을 하는 것을 두고 구한말 조상님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물론 전통적인 관점의 그들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전에 만났던 A도 내가 손소독이나 방정리를 하는 것을 보고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니냐고 그랬으니깐. 남자가 너무 깔끔 떠는 것도 매력 없다고. 늦은 밤, 셔츠 단추가 떨어져서 꿰매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뭐하냐고 하길래 바느질한다고 했더니 남자가 무슨 그런 걸 하냐고 푸념을 했던 희미한 기억. (그러면 네가 해줄래?라고 말했으면 나는 꼰대가 되었겠지)


비록 미혼이지만 나도 조금은 안다. 우리나라 부부들의 가장 큰 이혼 사유가, 남편(또는 아내)이 양말을 거꾸로 벗어두는 것과 집안일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을. 작은 것을 놓치고 사는 그 '무심함'에 있다는 것을.




2022년을 앞둔 지금, 나의 취미는 집안일, 특히 부엌일이라고 어디서든 당당하게 말한다. 요리, 설거지, 청소, 가구 수리, 간단한 인테리어를 하고 깔끔해진 내 주변을 사랑한다. 방송인 서장훈처럼, 정돈을 해야 일이 잘 된다. (냉장고에 요구르트 라벨 방향까지 맞추진 않지만) 고등학생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긴, 세포의 전체 교체 주기가 적어도 두 번은 지났으니 물리적으로 새사람이 된 건 맞다.


크고 호탕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검소한 일상의 행복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글을 많이 읽는다. 좋아하는 건, 따로 의식하지 않고 마음에 그냥 맡긴다. 남이 좋아하는 것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 언젠가 더 길게 이어질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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