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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Nov 22. 2023

근평, 누가 바닥을 깔아주나

공무원 곰과장 이야기 05

지난 글에서 근평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한 사람이 근평을 받기 위해서는 네 사람이 희생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걸 이른바 '바닥을 깔아준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평을 받는 입장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 누구도 남의 바닥을 깔아주는 입장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관리자는 누군가를 반드시 아래에 놓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바닥을 깔아주는 사람을 어떤 식으로 정할까요?




첫째로는 승진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입니다. 왜냐면 공무원에게는 승진을 위해 해당 직급으로 일해야 할 최소연수가 있습니다. 그걸 승진소요 최소연수라고 하는데, 실제로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보통 그보다 더 오랜 기간을 근무해야 하지요. 공무원 조직이 워낙에 극단적인 피라미드 구조라 위로 올라갈수록 입구가 좁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직원이 막 7급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직에서 6급으로의 승진에 걸리는 기간은 대체로 8년이 정도라고 해 보죠. 물론 이 직원은 야심도 있고 능력도 있기에 그보다 더 빨리 승진할 속셈입니다. 목표는 6년입니다. 그런데 6급으로의 승진 때 반영되는 근무성적평정은 최근 2년간 받은 총 4회의 근평입니다. 


그렇기에 이 직원이 처음 4년간 어떤 등급을 받더라도 이 직원의 승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승진을 앞둔 최근 2년간의 근평만이 반영되니까요. 지금 갓 승진한 이 직원에게 주어지는 근평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설령 수를 받더라도 단지 기분이 약간 좋아질 뿐, 어차피 쓰이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릴 근평입니다. 그렇다면 중간관리자는 당연히 이 직원에게 낮은 등급을 주겠지요.  




둘째로는 일을 잘하지도 못하고 열심히 하지도 않는 직원입니다. 앞선 글에서 왜 열심히 하는 직원을 대우해 줘야 하는지를 설명했지요. 그러나 일을 잘하지도 못하고 열심히 하지도 않는 직원은 관리자 입장에서 근평을 챙겨줄 이유가 없습니다. 보통 그런 직원은 은퇴를 앞두었거나 혹은 승진을 포기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중간관리자는 그런 직원을 받고 싶지 않아합니다. 일하지 않는 직원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런 직원은 존재 자체로 조직에 악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그런 직원이 필요한 경우가 일 년에 두 차례 있습니다. 예. 바로 근평을 매길 때입니다. 


물론 간혹 일을 잘하지도 못하고 열심히 하지도 않는 직원이 승진하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꽤나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름대로의 욕심이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거 욕심도 많네. 근평 받고 싶으면 일을 좀 하든가.'




마지막으로 운이 나쁜 사람입니다. 한 부서 내에 근평이 필요한 사람이 둘이 존재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가 가장 곤란하지요. 어찌 보면 중간관리자가 인사를 잘못 한 겁니다. 대체로 좋은 직원 데려다 쓸 욕심에 앞뒤 안가리고 사람을 끌어오다 보면 이런 경우가 발생하곤 합니다. 


근평이란 누군가를 위에 두고 누군가를 아래에 두는 작업입니다. 두 사람 중 누군가는 반드시 아래에 가야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아래 글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근평을 받지 못한 사람이 상처를 받고 부서를 떠나거나, 혹은 차기 근평을 약속받는 대신 당장 자기 순서가 뒤로 밀리는 걸 감수하고서 부서에 남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슬픈 결말이지요. 


그러나 중간관리자가 유달리 유능한 경우에는 모두가 행복한 해결책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즉 두 사람 모두에게 근평을 챙겨주는 겁니다. 물론 이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부서에서 그런 식으로 근평을 가져간다면 어떤 부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부서도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섭니다. 한 부서를 이끄는 중간관리자로서 이건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서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부서원 근평을 챙겨주기는커녕 오히려 남에게 빼앗기는 상황에서 직원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노력을 통해 자기 직원들의 근평을 여럿 챙겨주는 중간관리자는 항상 존재합니다. 그런 부서장에게는 통솔력이 생기지요. 직원들의 믿음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대급부가 있는 법. 그런 부서장은 대체로 조직 내에 반드시 적을 만들게 됩니다. 근평 싸움에 있어서 피해를 본 사람이나 혹은 질투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건 중간관리자 개인에게 있어 상당한 부담입니다. 


그렇기에 정말로 유능한 중간관리자는 아예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직을 구성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 발생 자체를 사전에 방지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유능한 인물인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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