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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May 02. 2019

차마고도의 아름다운 마을들

중국 윈난 / 운남

동양의 가장 오랜 교역로, 차마고도

중국 서부의 쓰촨성과 윈난성, 티베트를 주 교역로로 하는 동아시아의 교역로. 차가 생산되던 중국 윈난성에서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서북쪽으로는 티베트, 나아가 버마, 네팔, 인도의 아쌈 지역, 파키스탄까지 이어지기도 하던 긴긴 길이다.



'차마고도'라는 명칭은 근대에 들어서 이 길을 명명하기 위해 생겨난 조어이지만, 이 길의 역사만큼은 동양에서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있다. 기원전 2세기 중국 한나라 시대에 장건의 개척으로 시작된 실크로드보다 200년 앞서 차마고도의 많은 지류 중 몇 몇 길들은 이미 만들어져 이용되고 있었다. 특히 기원전 300년 경, 윈난에서 인도에 이르는 길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번창했으며, 인도인들이 윈난 서부에 거주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다. 중국 쓰촨과 윈난의 품목들은 버마를 거쳐 인도까지 이르렀으며 이 길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교역은 분명 윈난의 초기 문화가 형성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윈난 차마고도의 주요 거점이었던 사시 마을. 교역인들을 위한 숙소이자 연극 공연 무대였던, 마을 중앙광장인 사방지의 중심 건물
교역인들이 말을 타고 사시마을에 처음 당도할 때 만나게 되는 문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이 오고가다

그러던 중, 중국은 당나라 시기(618-907년)에 이르러 인근 독립국으로 존재하던 티베트(토번국)의 빛나는 군마가 필요했다. 반면 티베트는 그 험한 티베트 고원의 혹독한 겨울을 나고 평소 부족할 수밖에 없는 비타민과 영양의 섭취를 위해 질 좋은 차를 필요로 했다. 바로 중국 윈난성에서 나는 보이차였다.


수유차! 티베트의 야크 젖과 보이차를 함께 끓인 버터차인 수유차는 그들에게 비타민, 무기질 등 고원 지역에서 결핍되기 쉬운 영양소를 채워줄 수 있는 아주 귀한 공급원이었다. 특히 육류 위주의 식사로 인한 소화 부진을 도울 수 있는 좋은 대안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티베트는 많은 양의 차가 필요했다. 내륙의 티베트인들은 중국의 소금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차마고도의 마을들에서는 여전히 차가 일상 속에 있다. 옛 정취를 느껴볼 수 있는 풍경들은 여전하다.


각 나라의 결핍 품목, 즉 필요 물품이 명확했기에 이들을 정확하게 맞교환하는 교역은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차와 말이 오고 간 교역로가 바로 동양의 가장 오랜 교역로라고 알려진 차마고도다. 차마고도는 중국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인 196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실질적 역할을 해왔던 경제 문화 교류의 근거지 역할을 해왔다.


문화가 교차되던, 소수민족들의 삶의 터전

차와 말이라는 주요 품목의 거래 이외에도 티베트로는 소금, 설탕 등이 들어 왔고, 중국으로는 티베트의 소, 동물의 털과 같은 현지 품목들이 전해졌다. 차마고도는 약재, 곡식, 버섯, 금은 등 실로 다양한 물품들이 오고간 경제 문화의 통로였다.


사시마을 근처 시바오산의 거대한 석굴사원군. 시종쓰(석종사)와 바오샹쓰(보상사)가 특히 유명하다.


종교의 전래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 내부에서만 4000km 가량 이어지는 차마고도는 중국의 남부와 서부로 더욱 확장되어 이웃 나라들까지 이어지며 남방 실크로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차마고도를 통해 중국 윈난 지역은 인도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흡수하기도 했다. 중국 남부에서 불교를 받아 들이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꽃피워 낸 시기의 모습을 차마고도의 마을들에서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특히 따리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남조는 인도 승려단으로부터 인도 불교의 지류를 받아 들여 국가와 왕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시종쓰는 매우 아름답고 기량이 높은 불교 조각들을 품은 석굴 사원으로 이름난 곳이다
남조의 융성했던 불교 문화를 보여 주는 시종쓰의 석굴 조각들. 매우 훌륭한 수준의 불교 예술을 꽃피웠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yunnantravel에서)


석굴사원으로 유명한 바오샹쓰(보상사)의 풍경들


지금도, 그 옛날도!

보이차를 찾아서


중국의 보이차는 윈난의 란창강(메콩강) 주변에서 주로 재배된다. 윈난 남부의 시솽반나 지역의 푸얼(보이)이 바로 보이차의 근거지! 중국 차의 역사가 곧 세계 차의 역사일 만큼, 중국은 차의 시원과 같은 곳이며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역사를 통해 누군가는 생존을 위한 영양상의 이유로, 누군가는 질병을 위한 약재의 역할로, 또 어떤 이들은 취향의 이유로 이 곳의 보이차를 끊임없이 찾아 왔다. 그런데 사실 그 흐름은 지금 또한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보이차를 늘 애호하던 사람들은 존재해 왔지만, 한국에서도 지난 1, 2년 사이에 차를 향한 대중적인 취향과 수요가 급격히 증대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이차를 찾아서 때로는 험난한 히말라야를 넘기도 했고, 국가 관청을 설립해서 가장 귀한 차를 제공받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차 교역의 역사에 따라서 중국의 차 제조 형태와 차 문화 역시 상호 유기적으로 변화 발전해 왔다는 점은 단순히 이 차마고도가 물리적인 '길'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아닐까?


내가 머문, 사시마을 바이족 숙소의 풍경
 바이족은 손님을 환대하는 의미로, 세 가지 맛의 차를 만들어 정성스레 대접하는 고유의 차 의식을 갖고 있다.



따리, 가장 중요한 교역 도시로 등장하다!

따리는 한때 매우 강성했던 남조(Nanzhao, 649-902년)의 수도였다. 남조는 지금의 버마, 태국 북부, 티베트까지 이르던 강대한 나라였다. 이를 이어 받은 대리국(따리국, 938-1253년)이 쿠빌라이 칸에 의해 1253년 멸망하기 전까지 따리는 군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따리는 역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이후에 따리의 얼하이 호수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차마고도의 지름길 역할을 하기 시작하자, 뒤늦게 차마고도의 가장 중요한 마을로 부상하게 된다.



청나라 말기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따리

청나라 말기, 윈난 남부지역에 말라리아, 흑사병과 같은 다양한 전염병들이 대대적으로 창궐했던 때가 있다. 당연히 티베트로부터 오는 마방들은 보이차 산지인 푸얼까지 내려가는 것을 기피했다. 자연히 푸얼에서 가까워서 여전히 양질의 차를 얻을 수 있으면서 전염병에서는 안전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떨어진 서쪽의 따리 지역으로 차 교역의 장이 옮겨 가게 되었다.

이로써, 따리는 푸얼을 넘어 서서 중국 서남쪽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부상하게 되었다. 보이차가 모아진 생차 그대로 푸얼에서 따리로 운반되면, 따리의 많은 차장들에서 이를 쪄서 운반과 보관이 용이한 형태로 만들어 중국의 쓰촨, 티베트 등지로 수송하는 형태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따리의 역할과 명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다.


차마고도의 주 교역로인 윈난 - 티베트의 길.  하늘색 지점은 남쪽에서부터 웨이샨, 따리, 사시, 리장.


차마고도의 아름다운 마을들

차마고도의 많은 지류들이 있지만, 중국 쪽 주요 지역은 단연 쓰촨성과 윈난성이다.

쓰촨성 쪽은 5, 6000m에 이르는 동티베트 고원의 히말라야 자락과 깊은 협곡을 넘나드는,  더 험난할 수 없는 길이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한 길로 꼽히는 고도이기도 하다. 예전의 여행에서 그 자락을 경험해 본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윈난 지역을 조금 더 깊게 둘러 보고 싶었다. 아니, 쓰촨성까지 올라 가려다 안온한 윈난의 매력에 빠져 그만 발이 묶여 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쩌면 맞을 것 같다.

윈난성 역시 오랜 역사와 시간을 품고 있는 수많은 작은 마을들을 품고 있다. 북부에는 호도협과 매리설산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험난한 히말라야 자락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존재하지만, 상대적으로 더욱 편안한 자연적 환경을 토대로 경제적으로 매우 번성했으며 다양한 문화적인 배경이 교차해 왔던 듯하다.



그렇게 이번에 나는 윈난의 남쪽으로부터 웨이샨, 따리고성, 시저우, 사시, 리장의 바이샤고성과 수허고성을 만났다. (사실 행정구역 상으로는, 리장을 제외하고 모두 따리시에 속한다.)


따리시 웨이샨현의 고성지역. 한때 차마고도의 주요 거점이자, 도교의 근거지 및 특색있는 음식으로 유명한 곳.



웨이샨은 남조 시기의 8, 9세기에 매우 융성했었던 차마고도의 교역 마을이다.

특히 이 곳의 무슬림인 회족은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13세기 버마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그 통로에 있던 윈난 지역을 정복했던 몽골군의 후예들이다. 1386년 몽골의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이들은 윈난에 남았고, 자연히 말을 이용한 교역인이나 농부로 이 곳에 뿌리를 내려 왔다. 웨이샨의 동련화(Donglianhua) 마을은 당시의 고아한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차마고도의 교역지였다.


사시마을(Shaxi, 당시에는 Sideng)은 한 때 가장 번성했던 차마고도의 거점 중의 하나였다. 사시는 얼하이 호수의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따리가 새로운 교역지로 등장하기 전까지 윈난의 창산을 넘어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도 빠른 길이었다. 한 때 매우 중요했던 교역지로 이름을 떨친 곳답게 아름답고 안온한 마을이다.


윈난 북부 리장의 수허고성과 바이샤고성


지리적, 문화적 거점이었을 윈난 지역

윈난 지역은 중국의 역사에서 서쪽의 이국으로부터 다양한 문화와 물류를 받아 들이는 주요 근거지 역할을 해왔을 것이다. 티베트와 다른 서쪽 지역의 다양한 문화는 이 곳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주목할 만한 점은 윈난 사람들이 남쪽의 태국, 라오스, 버마 등으로 쉽게 이주할 수 있었기에 지금의 동남아 국가들의 문화를 확립해 가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공존과 관용의 역사

차마고도는 지난한 시간에 걸쳐, 중국의 소수민족들이 자신의 문화를 만들고 그려온 삶의 터전 그 자체였을 것이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 험난함을 마다하지 않았을 길이며, 때로는 부드러운 평안과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함께 보상해 주었을 그런 길이었을 테다.


내게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길 위에서 바이족, 이족, 나시족, 회족, 다이족, 티베트족, 한족 등이 어우러지면서 '따로 또 같이' 자신들의 문화를 아름답게 지켜 오며 지금까지 공존해 왔다는 사실이다.


종교적으로도 불교, 도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이 지역에 질서 있게 혼재되어 있다. 민족적으로도 긴 역사에 걸쳐 늘 다양한 이민족들이 드나들고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던 사실을 보여 준다.

특히 한 마을 안에서 혹은 인근 마을 간에도 불화 없이 어우러지며 지금까지 자신들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지역적 특색을 지닌 채  결속감을 유지해온 것이 내겐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어쩌면 이번 윈난 지역을 여행하면서 마지막에 가장 마음에 남은 부분은 이 지점이 아니었나 싶다. 반추해 보니, 내가 윈난에서 느낀 평안함은 단지 그 풍요로운 자연에서 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얼굴에 어린 선량한 마음과 편안한 미소, 주민들 사이의 따스함과 유대감. 어쩌면 그 마음, 그 태도가 이 지역의 평안과 문화를 지속적으로 지켜올 수 있는 힘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윈난의 여정이었다.


차마고도와 실크로드의 개념에 대해서조차 여전히 많은 이견이 오고 갈 만큼, 이 거대한 주제에 대해서 나 역시 아주 개괄적으로나마 알 수밖에 없고 큰 인상만 받고 돌아올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이 글은 나이브한 한 여행자의 매우 주관적이고 편협한 글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내게 윈난은 그렇게 머리로, 개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직접 스며들어 마음으로 느끼고 알아 가고 싶은 곳이었다. 차라리 그 편이 이 다양한 문화가 혼재해 있는 고요한 용광로같은 이 곳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마고도 위에서, 지금의 우리

그렇게 옛 차마고도의 낭만을 따라 가보고 싶어 떠난 여정이었지만, 어쩌면 나 역시 그 당시 동양의 이국을 그렸을 실크로드 상인이나, 이 곳의 차를 찾아서 왔던 차마고도의 교역인들의 마음과 닿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차마고도는 지금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지금 우리도 이 길의 역사의 일부이지 않을까?

여전히 중국의 차를 찾아서 드나드는 상인과 교역인들이 존재하고, 이를 수요하는 우리들 역시 지금의 차마고도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받는 주체가 아닐까 싶었다.

앞으로도 차의 고유성을 대체할 수 있는 품목이 과연 있을까?

2500여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이 길은 그 지역을 확장해서 지속적인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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