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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Jul 19. 2019

타보의 풀벌레 소리를 듣는 밤

인도 스피티 밸리

사실 너무 귀해서 꺼내 놓고 싶지 않은 이야기.

굳이 말로 표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바람에 함께 흩날려져 버리지 않을까.

 

스피티만의 차분하지만 은은한 향기. 그 강렬함.

난 그 산에 있으면서도 이미 그 곳이 그리웠다.



타보에서.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자 공간.

지나간 시간이  들려 주는 이야기.

천 년의 시간을 한 달음에 거슬러서 만나는 이야기.

그런 만남, 그런 마주침.

천 년 전의 시간이 다가와서 지금의 나와 만난다.

그저 어제 있었던 것 같은 이야기.

잠시의 꿈결같은 이야기.

늘 거기 있었던, 그런 그런 이야기.



그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던 하늘.

직접 만나 보았던 그 벽화. 그 숨결, 그 바람.

그 염원이 오롯이 느껴지던 시간들.

그들의 염원의 숨소리가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지금의 나와 맞닿는다.


그림을 그리던 자, 진리를 찾고 그 길을 오롯이 걸어 가려던 간절했던 그 사람과 이렇게 만나질 수밖에 없는 인연의 사람이 지금 이 곳에서 마치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만난다.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이 또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고귀한 아름다움이 이 곳에 있는 것 같다.

스피티 사람들의 믿음 또한 그렇게 가장 고귀하다.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여정

스피티는 내게 기대하지 않았던, 있을 줄 몰랐던 것들을 수없이 건네 준다.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었는지,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얄팍한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이 곳을 오랫동안 그렸다던 나는 그저 이 곳 안의 장엄하고 웅장한 다시 없을 자연의 비경과 그 안의 사람들만을 끝없이 상상했다. 그것도 끊임없이 내 생각 안에서만. 그 길 위에서의 수많은 만남과 수많은 선한 사람들과의 인연, 그들과 함께 만들어갈 시간, 이런 것들은 나의 머리 속에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이 곳은 순례의 길이었다. 

예상치 않았지만, 마치 예정되어 있던 모든 경험들과 인연들이 딱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간격으로 진주 알이 꿰어지듯이 하나하나 차례차례 자리를 잡아 간다. 이 곳에서 만나지는 사람들이, 만나지는 마을들이 모두 구도의 길에서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들이 계속해서 내게 어떤 이야기들을 건네는 느낌이다. 예상하지 않았지만 그들로 인해 나의 길이 계속해서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진다.



이 길의 여정이, 스피티 안에서의 여정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을 본다. 이 곳의 평안함이, 풍요로움이, 인위적인 것 없는 자연스러움이 그저 가만히 있어도 나를 충만하게 한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그냥 거닐기만 해도 입가에 따사로운 만족의 미소가 떠오르게 한다.


타보가 언제쯤 나로 하여금 다시 길을 나서게 하려나 머리로 헤아려 본다.

내가 이 곳을 쉬이 떠나게 될까.

내일이면, 아니면 그 모레면 이 곳을 떠날 수 있을까.

하지만 늘 머리는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

그 다음 날이면 마음이 아직 아니라고 한다. 이 곳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한참 남은 느낌이다. 그렇게 나의 마음이 이 곳에 한참을 진득히 스며든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내일이려나, 모레려나, 떠날 날을 헤아려 보다가, 영영 떠나지 않아도 좋겠다고 결론 지어 버린다.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들려 오는 이 강물 소리에, 이 빛나는 햇살에 무언가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는 느낌이다. 조금만 더 마음을 내어서 기울어 보면, 그 얘기들을 알 것만 같은 느낌이다.

무엇일까. 그 옛날 옛적의 마음 그대로일까.

부처님 제자들의, 이 은둔의 풍요롭디 풍요로운 이 마을의 모든 온화한 이야기들이 실려 오는 것만 같다.

무엇일까. 알고 싶다.

무언가가 얘기를 건네 오는 느낌이다.


이 따스한 바람. 미풍.

차가운 느낌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이리 따스하고 부드러울까.


이 불어 오는 바람에 실려서 코끝을 살랑이게 만드는 미세하지만 부드러운 꽃향.

그 꽃향마저 작디 작은 저 노란 꽃잎과 꼭 닮았다.



이 길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었던 것은 도리어 나를 수많은 놀라움으로 이끈다. 그저 아름다운 곳이라는 얘기만 슬쩍 들었던 이 스피티 안 쪽의 마을 타보는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곰빠를 품고 있는 마을이었다. 아니,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곰빠가 중심인 마을이다. 이미 이 곰빠에 발을 디디며 들어 서는 순간, 나는 내가 이 곳을 정말 사랑하게 될 것임을 나의 마음에 더없이 와닿을 장소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건축이라니. 그 건축이 만들어 내는 한없이 평안하고 거스르는 인위적인 느낌 없는 자연스러움.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제가 있을 곳에 딱 맞게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을 본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무심한 건물들과 탑들. 이 담백함과 자연스러움의 극치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이 곳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짓는다. 공간에서 가슴이 아리면서 채워질 만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눈가가 촉촉해진 적이 언제였을까.



새삼 아름다운 공간의 힘을 느낀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거추장스럽지 않다.

애써 무언가를 상대에게 전하려 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품고 있는 시간과 정성스러움의 힘으로 상대에게 감화를 일으킨다.



동행이 저 곳에서 손짓을 한다.

그렇게 있는지 조차 몰랐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화를 만난다.

그저 허물어질 것 같은 황토빛 흙으로 빚어진 건물 안에서 나는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곰빠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법당으로 들어 섰다. 천 년 전의 비밀을 지금 바로 내 눈 앞에서 목도한다. 갑자기 손에 쥐어진 플래시로 비춰본 벽에서는 마치 어제 채색한 것 같이 더 정교하고 아름다울 수 없는 불화들이 한없는 빛을 머금고 있다. 그것은 애써 찾는 사람에게만 보일 그런 빛이었다. 눈 앞에 있는 벽화에 플래시를 아주 가까이 가져가 본다. 눈 닿는 곳곳마다 나는 내가 본 가장 아름답고 선명한 색상들을, 더 빛날 수 없는 색감의 부처님들을 만난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선물을 가득 받았다. 법당을 나오면서 너무 놀라고 벅차 오른 마음을 어찌 해야 할 지 몰라 그저 동행을 바라본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내겐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불화인 아잔타 석굴의 벽화보다도 훨씬 더 고귀하게 다가온 아름다움이었다.


이것이었나.

이 곳에 닿으려고 어쩌면 나는 그렇게 스피티를 그렸던 것일까.

조금은 이번 여행 안에서 들었던 나의 의문이 풀릴 것 같은 느낌이다. 늘 여행을, 히말라야로의 여행을 그리는 나이지만 왜 갑자기 나는 나의 여정을 바꾸어 이리로 왔던 것일까. 늘 고난과 같은 이 여정을 자처해서 하는 것일까. 이번 여행에서 유독 그 질문을 많이 떠올렸다.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결국 나를 이렇게 마땅한 곳들로 계속해서 이끌었고, 나는 그 곳에서 가장 아름답고 따스하며 선한 사람들과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 냈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곰빠에까지 자연스럽게 이르렀다.



매일 이른 아침, 그리고 해질 녘의 저녁에 나는 이 곳에서 천 년 전의 소리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아주 찬찬히 하지만 끊임없이 이 오래된 곰빠를 걷고 또 걷는다. 폐허의 느낌을 좋아한다. 그것의 쓸쓸함에 마음을 내어 준다기 보다는, 폐허만큼 공간에 스며 있는 지난한 시간의 흐름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곳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더없이 사랑하는 절터 감은사지 보다 오히려 더 내게 깊게 다가오는 이 곳은 과연 무엇일까. 이 곳은 적당한 폐허의 느낌과 그 안에서 끝없이 이어져 온 간절하고 따스한 온기가 함께 스며 들어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리에 앉으면, 물소리, 새소리, 바람, 햇살, 이 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뻐꾸기 소리가 한 데 어우러진다. 이렇게 공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편안한, 끝없이 머물러 있고픈 곳을 나는 만난 적이 있었던가.

내 마음을 살랑이는 저기 노란 꽃나무에 둔다. 그저 나인 것 같다. 저 살랑이는 바람이. 나 역시 함께 살랑인다. 저 과하지 않은 향을 지닌, 한없이 부드러운 노란 꽃의 향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이 아침.


오늘도 가장 아름다운 그 불화들을 다시금 찬찬히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주어졌다. 그 아름다움을 이미 다 느끼고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다시금 새로워진다. 나는 오늘 또다시 가장 아름다운 부처님의 성전을 만났다.

이 곳은 대체 내게 얼마나 더 많이 주려고 하는 것일까.

이 공간을 하나하나 생생히 기억하기엔 쉽지 않을 수 있으니, 이 곳의 느낌을 최대한 내 안에 각인시키고 기억해 두려 한없이 노력해 본다.

다시 이 곳을 찾았을 때, 낯설지 않고 가볍게 이 곳에 스밀 수 있도록.


늘 머리는 마음보다 몇 발자국은 느리다.

아니, 앞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마음을 따라와본, 직감을 따라와본 나의 여정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충만하게 채워진다. 지금의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들을 내게 안겨 준다.

 여행의 힘이란, 마음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그런 생각을 어리석은 나는 이제야 뒤늦게 머리로 헤아려 본다.


타보의 풀벌레 소리를 듣는 밤.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의 한 밤.

행복하고 감사한 밤.

이렇게 2019년 어느 날,

이 곳을 기약했었던 한 여행자는 6월의 마지막 밤을 건너고 있다.


2019년 어느 늦은 밤,

타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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