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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한엄마 Oct 03. 2022

#2. 믿음에 대하여

40대 철학으로 ‘변’해 다시 ‘태’어나는 아줌마 이야기

1.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은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의지와 목적 아래서 움직인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중)

 나는 기독교인이다. 왜 이 종교를 믿게 되었는지 물으신다면 어린 시절 너무도 당연히 나는 성당을 다니고 있었다. 사진에서는 나도 기억나지 않은 아기 시절 신부님 품에 안겨 유아세례를 받은 모습이 담겨 있다. 대한민국은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나는 그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 친구는 전형적인 교회 오빠였다. 그 오빠는 10년 동안 배우자 기도를 했고 그 배우자가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마법에 홀린 듯 나는 당연한 듯 견진성사를 받아야 한다고 성당에서 전화가 왔을 때 장로교 예장 통합 측의 영세를 받고 개신교인이 되었다. 종교를 선택하는 기준이 종교의 성격이 아닌 내 삶의 필요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기 때는 내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부모에 의해, 이후엔 내 삶을 함께 할 동반자의 의견에 의해. 그게 과연 하나님의 인도하는 방향이었을까?


2.

개신교는 종교개혁을 통해 천주교에서 분리되었다. 근본은 같다. 까마득히 먼 과거 사건이 나를 배교자로 만들었다. 타락했지만 회개하고 현재도 존속하는 가톨릭이 옳을까, 루터와 칼뱅이 만든 성경으로 만든 새로운 교회가 맞을까? 이때쯤 나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가 생각하는 식욕이나 성욕의 쾌락을 초월해 죽음까지도 고통이 아닌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경지이다. 내가 배운 기독교 사상과 일치한다. 아편과 같은 약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기분 좋게 하는 차원과 다른 쾌락이었다.  ‘종교는 쾌락을 추구한다.’와 ‘아편을 하면 쾌락을 맛볼 수 있다.’는 전제가 만나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명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종교와 아편이 추구하는 쾌락의 뜻이 다른 것 같은데 말이다. 기독교는 같은 뜻(쾌락)을 굳이 멀리했고, 잠깐과 영원한 쾌락을 합쳐버려 생긴 오류.


3.

최근 인기 있는 넷플릭스의 드라마 시리즈 ‘수리남’은 그런 오류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영어 제목은 ’ 성인 마약상’이다. 기독교의 탈을 쓰고 마약을 파는 사람이 주요 인물이기에 그렇다. 그에게 마약 판매를 도와주는 사람을 ‘집사’와 ‘전도사’로 구별하며 계급을 나누고 소비자와 유통책을 ‘신도’라 하고 자신의 비즈니스를 방해하는 경찰 조직들을 ‘사탄’, 조직 안에 자수하는 사람을 예수의 배신자 ‘유다’라고 지칭한다. 성스럽고 존경받는 언어들이 마약상의 언어로 인해 순식간에 상스럽고 부당한 계급이 되어버린다. 이런 혼란을 보면 마치 현실에서 노예에 다리도 편치 않았지만 신의 친구라고 하는 에픽테토스나 왕이지만 자연에 겸허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보면서 서로 상반된 인생을 살았으나 같은 방향을 가르치는 것 같은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에서는 같은 언어로 상반된 행동을 보여줬다면 두 철학자는 세계의 다른 위치에서 같은 방향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선과 악으로 세상을 그렇게 나누어보면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해 언어를 통해 심하게 왜곡되고 현혹될 수 있다. 그럴 때면 다시 철학으로 돌아와 종교를 가다듬어야 한다.


4.

한 기업의 사모님이 사위에 대한 불륜을 의심하며 편집증으로 발전했다. 그 의심은 결국 사촌 동생이자 내 선배인 하지혜 양이 세상을 떠나서야 끝이 난다.  나와 그 사모님이 만난 적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새내기 시절 기숙사 식당에서 비구니와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스님 복장으로 교회에 다니라고 했다. 참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게 도서관에서 왔냐며 도서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봤다. 식사가 끝나고 도서관 5층으로 가기 위해 기숙사 뒤편으로 갈 때 기사를 부르는 전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절에서 꽤 높은 위치의 스님인가 했다. 공교롭게도 실제로 그 사모님은 현재 본인이 20년째 출석하는 교회의 권사였었다. 드라마에서 마약상이 목사고 현실에서 권사님이 청부살인자다. 그렇게 내 신앙은 사람으로 인해 휘청거렸다. 그때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어머니 모니카가 있듯, 다행히 내게도 신앙에 도움을 주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의 말마따나 악은 선의 결핍일 뿐이니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마음을 다질 힘을 주는 이들이 항상 있었다.


5.

 구교와 신교가 왜 굳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종교를 앞세우고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 대한 실망감 등. 그런 점들이 종교를 믿기 힘든 상태로 나를 몰고 갔다. 나를 다시 종교를 제대로 믿어보자며 돌아가게 한 건 의외로 종교에 실망해 도망간 철학을 통해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중세까지의 큰 이슈는 바로 내가 고민하고 있는 기독교였기에 그들의 고민은 바로 내 고민이기도 했다.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통해 다시 교회로 돌아갔듯 나 또한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본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겸허한 반성을 잃어버린 합리적인 현대인과, 이성을 잃고 광신으로 흐르는 종교인들에게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는 기적을 다시 한번 일으켜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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