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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Dec 30. 2015

대장금

관장약 여덟 포의 위력에 3킬로의 장금이가 나왔다

지난 2주일간 마님께서 배가 아프시고 구역질이 나신다 하여 드디어 나에게도 늘그막에 삼신할미가 만득이(晩得子: 늙어 얻은 자식)를 점지해 주시는 줄 알았더니, 왕진(往診) 왔던 의원님이 손가락으로 누워계신 마님의 배를 죽는 소리 나게 꾹꾹 찔러보시더니 대장염(大腸炎)을 선고하시었다. 배 속에 귀여운 아들이 들어 있을 줄 알았더니 웬 날벼락이야?


임산부에게 필요한 비타민을 드리려고 비싼 딸기까지 사다 놨는데, 의원님이 처방하신 알약을 먹는 동안에는 생체 가스를 유발하는 음식은 금기(禁忌)라 하셨으니, 그 맛난 것을 마님께 진상도 아니하고 혼자 다 먹어야 할 것이라,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반려자인 내 가슴 또한 찢어지게 아팠다.


일심동체(一心同體)로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사는 사람 중에 한쪽이 아프면, 다른 한쪽에도 공명이 일어나 신체의 동일 부위에서 유사한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 맞는 이치인데, 나에게는 동종(同種)의 신체적 이상이 나타나지 않으니, 우리의 관계는 일심동체는 고사하고 이체동심(異體同心)도 아닌 것 같았다.


마님의 통증이 어떤 것인 지를 내 몸을 통해 느낄 수가 없어서, 병세와 의사의 진단을 근거로 인터넷을 뒤져보니, 유사한 증상의 무서운 병에 대한 설명이 줄줄이 따라왔다. 마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급기야(及其也) 대장염보다 더 큰 병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인생 경험이 많으신 큰 누님께 마님의 증상을 고하니, 그런 병은 큰 병원에 가서 내시경이나 단층촬영으로 진단해 봐야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의학이 발달되어 암과 같이 고칠 수 없는 큰 병만 없으면 백세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 중에는 작은 병이라도 앓게 되면, 그것이 당장 큰 병을 유발할 듯이 정밀 진단을 받는 이가 상당수에 이르는데, 그런 사람들은 아프지 않아도 평소에 주기적으로 건강 진단을  받으면서, 신체를 잘 관리하기 때문에, 결국은 잔 병 없이 잘 버티며 몸 아픈데 없다고 병원에 안 가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하시며, 나에게도 병원에 가서 정기적으로 건강진단을 받으라고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큰 이유는 의사의 치료를 받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병도 약을 먹거나, 수술로 치료를 받아서 신체의 면역 기능을 저하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또 한편으로는 병이 있음으로 해서 받을 정신적 불안이 병을 앓는 것보다 오히려 더 심한 마음의 병을 일으킬 것 같은 공포감 때문이다.


오래된 일이지만 헌혈할 때도 혹시 혈청에 에이즈 바이러스라도 나오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이제는 턱수염에 흰털이 삐죽삐죽 나와서 얼룩지고, 이마에도 깊은 주름이 새겨져, 거울 보면 볼품없는 얼굴에 실망이 큰데, 거기에 노안(老眼)으로 나빠진 시력이며, 사과 하나만 먹어도 시큰거리는 이는 언제까지 턱뼈에 붙어 있을지, 노년에 대한 근심까지 늘었다.


건강에 대한 이런 정신적 허약은 근본적으로는 생활 전반에 대한 태도가 나약한 것이 원인이다. 내가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결과를 낙관적으로 수용할 태도로 최선을 다할 요량(料量)이라면, 괜한 두려움을 낳는 가상적인 문제들은 금방 사라진다.


"근심은 고양이도 죽인다"는 서양 속담이 있는 만큼, 장수하려면 숙변(宿便)같이 착 달라붙어 있는 근심부터 뇌에서 쫓아내야 된다.


희소식: 하루에 한 포씩만 먹으라고 쓰여있는 관장약 여덟 포를 한꺼번에 드신 마님께서 진통 끝에, 응가 응가 대장금(大腸金: 무게가 3Kg!)을 출산하셨다. 이제 속이 편하시다니, 나도 속이 시원하다. 부부 일심동체다!


- 2013년 6월 30일, 대장금을 출산하신 마님께 경하드리오며...


추신: 중종의 어의녀(御醫女)였던 장금(長今)의 삶을 그린 연속극은 大長今이라 쓰네.


초대장을 읽으면 장금이의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거야.


매거진: 다시 쓴 편지 / 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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