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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Dec 30. 2015

초대장

대장금(大腸金)이 나온 곳은 초대장(超大腸: 아주 큰창자)이야!

작년 7월에는 내가 밤에 큰 일을 제쳐 두고 소리 공부하느라고 날밤을 새워서('날밤 새다'가 Stay up all night지만 밤새도록 서 있은 건 아니네) 마님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는데, 올 7월에는 공부 안 하고 그냥 잤더니 마님의 불편했던 심기가 다 풀린 듯, 지난 토요일에 같이 장 보러 가서는, 글쎄 나에게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맘대로 사도 된다고 선심을 쓰셨네. 말씀받자와 곧장 전에 비싸서 못 샀던 꿀꿀이 호박이 있는 야채 코너로 가서 보니, 놀랍게도 산더미 같이 쌓인 호박이 우리 돈으로 킬로당 겨우 천원인 거야.


정말 너무 감격해서 호박 더미 위에 두 손을 얹어 놓고 가만히 서서 거친 숨을 가다듬었는데, 마님이 아무리 맘대로 사라고 했다고, 아무거나 봉지에 담을 수가 없어서, 옆에서 호박들을 어루만지고 계시던 울퉁불퉁한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만져서 좋은 느낌이 오는 게 명품이라네. 명품을 만져요? 의심스럽지만 전문가 의견대로 겉보기에 번지르르 윤이 나는 호박들부터 이것저것 만져 보니 모두 꺼칠하고 살에 붙는 것이 뭐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었네.


그때 마님이 나타나 그렇게 막 주무르지 말고, 딱 봐서 색이 진하고 굵은 놈의 대가리를 콩콩 두드려 둔탁한 소리가 나면, 봉지에 넣으라고 꽤 유식하게 설명하셔서, 봉지가 다 찢어지게 꽉 채웠더니, 모두 여덟 개였는데, 무게가 꼭 3킬로였네 - 전에 보낸 대장금(大腸金)에 등장한 무게가 3kg인 장금이를 상상해보게! 마님이 얼마나 위대(胃大)하시고 장대(腸大)하신지 알겠지?


다음날은 날씨가 좋아 아침부터 햇살이 쨍쨍 비치는 터에 호박들을 썰어서 널었는데, 그걸 보니 기분이 무척 좋더라. 채소 값이 뛰어오르는 추운 겨울에도 사랑스러운 호박들을 맛볼 수 있다는 상상이 금세 배 부른 느낌을 주니까 말이야.


절도(節度) 있는 양반들은 의식주(衣/食/住)라 해서 밖으로 드러나는 외모부터 따지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밥만 즐겁게 먹고살면 행복한 밥통이기 때문에, 외적인 품격보다는 남이 볼 수도 알 수도 없으며,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음식 맛에서 인생의 진미(珍味)를 찾고 있는데, 이런 나의 인생관이 좀 천박하긴 하지만, 가끔씩 고독(孤獨)과 적막(寂寞)이 차갑게 느껴질 때, 그 속에도 단맛이 있음을 알게 해 주었네.


호박 몇 개를 말리면서 마냥 즐거워하는 중에, 얼핏 나의 인생관에 대해 피력하다 보니, 머리가 점점 출구 찾기 어려운 미로를 헤쳐 들어가는 느낌이 드네. 사실 나는 미래에 대한 설계도 없이 정처 없는 길을 가고 있으니, 인생에 대한 깊은 얘기는 내가 할 것이 아니라, 생활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으며, 길을 다져온 자네 같은 친구들에게서 들어야 할 것이네. 


하지만 근사한 업적(業績)을 이미 많이 남기고도 여전히 새로운 실적(實績)을 올리며 일하는 친구들에게 간단히 안부라도 물으려고 전화 한 통 해 보면, 모두들 ‘회의중(會義中)’이라든가 ‘강의중(講義中)’이라 하여, 일을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시간 부자인 것이 부끄러워서 다시 전화 걸기가 어렵네. 그렇다고 편할 때 글이라도 써 보내라고 귀찮은 숙제(宿題: 자면서 적는 것)를 내 줄 수도 없는 일이지.


네 사정을 잘 몰라서 언제 우리 집에 오라고 말할 수가 없지만, 근처에 올 일 있을 때 우리 집에 들러 가면, 같이 호박 먹으면서 세상 사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네.


*** 초대장(招待狀) *** 내가 좋아하는 호박은 충분히 있으니까, 그런 무거운 거 안 들고 와도 되지만, 굳이 빈손으로 오기가 민망(憫惘)하여 선물을 고르려거든, 새것도 좋은 것도 필요 없으니, 그냥 집에서 쓰던 물건 중에서 제일 주기 싫은 거 하나만 가져와!


– 2013년 8월 6일, 호박 말리다가 대담(大膽: 큰 쓸개)하게 마님 몰래 초대장을 쓰다니! 간도 크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러...


어릴 때 울 엄마는 통통한 놈은 조선호박, 오이 같이 생긴 놈은 꿀꿀이 호박이라고 부르셨네. 사전을 찾아보니 꿀꿀이 호박은 마디 호박 또는 돼지호박이라고도 하는데, 외국 가서 음식점에 호박 수프 있다고, 얼큰한 찌게 기대하면 달콤한 펌프킨 수프가 나오네. 우리가 대부분 영어로 펌프킨(pumpkin)이라 알고 있는 것은 할로윈 때 호박 초롱 만드는 마귀할멈 호박이고, 꿀꿀이 호박은 영어로 주키니(Zucchini)야.


매거진: 다시 쓴 편지 / 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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