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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Dec 28. 2015

놀부가

놀부가 꿀꿀이 호박을 타도 예쁜 선녀가 나올까?

조용히 지내던 사이에 봄이 갔다. 새 소식이 없더라도 간단히 안부 인사 몇 줄 적어서 보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돈 셀 일도 없는 주재에 뭐 그리 세상살이가 바쁘다고 고장 난 라디오처럼 소리를 죽이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이제 유월이 왔으니 절기로 말하면 초여름인데 여기는 한낮에도 온도가 18도에도 못 미치는 초봄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오월에도 찌푸린 하늘에서 연일 낙수만 뿌려서 풀잎도 푹 젖어 상큼한 향기를 잃었다. 그나마 요새 며칠은 비가 그치고 가끔씩 햇살이 양지를 덥혀 주고 있으니 너무 불평해도 안 되겠다. 다뉴브강이 범람하여 350킬로미터에 달하는 동유럽의 많은 하안 도시들이 침수 피해를 입고 있는 것에 비하면 여기에 홍수 안 난 것 만도 천만다행이다.


이번 주 일기예보에 서울의 기온이 최고 30도에 이르고 최저 기온도 18도를 넘는다니, 서울 사람뿐 아니라 한국 사람 모두가 부러워 배가 다 아픈데, 그게 단지 동포들이 따뜻하게 사시는 것을 시기하여 생긴 소화불량 때문만은 아니다. 실은 유럽의 중심이라 일컫는 이곳의 궂은 날씨 때문에 채소며 과일 값이 모두 금 값이라, 내가 좋아하는 딸기 맛도 제대로 못 보고 봄을 넘긴 것이며, 그 흔한 꿀꿀이 호박도 식욕만큼 먹지 못 하는 것이 복통의 원인이다.


미사일과 핵무기로 위협을 받게 되었음에도 라면 하나 사 재지 않고 태평하게 북쪽에다 햇볕을 퍼주시는 동포님들의 광명을 조금이나마 이곳으로 빼돌릴 방법은 없을까? 이 나라 대님께서 통촉 하시와 한국 대통령께 초콜릿이라도 한 보따리 조공을 올리시오면 햇볕을 왕창 받아, 호박잎이 광합성을 일으켜 길쭉한 꿀꿀이 호박이 넝쿨에 주렁주렁 열릴 텐데!


어제 마님 따라 장을 보러 갔다가 내가 좋아하는 호박은 비싸서 못 사고 그냥 나오다가, 고급 샴페인을 33% 할인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고는 한 병도 안 사도 될 것을 두 병이나 샀다. 그걸로 오늘 저녁에 대만에서 오신 손님들에게 성대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선물로 가져온 것이 중국 라면 여덟 개였다.


15년 전에 그들이 우리 집에서 묵어갈 적에 이곳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스스로 끓여 먹기 위해 가져온 라면을 내가 요리해 주면서, 예의상 '딱 한 번' 나도 라면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걸 잊지 않고 먼 길 올 때마다 꼭 라면을 싸들고 온다. 재작년에도 여덟 작년에도 여덟 해마다 여덟 개씩 들고 오는 그들의 놀라운 기억장치는 정말 강철이다.


하다 못해 내가 작년에 이 기억장치를 말끔히 청소하려고 일부러 한국 라면을 한 박스 사다 놓고, 여기에서도 이제는 라면 쉽게 사 먹을 수 있게 됐다고 머리에 박히도록 누차 공갈을 쳤는데, 원통하게도 그게 전혀 입력이 안된 것이다. 영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머리에 안 들어가는 대만 친구에게 영어로 설명한 내가 잘못이다.


이제 딴 거 하지 말고 중국어를 배워서, '라미엔부야오'(拉面不要: 라면 필요 없어)해야지 달리 방법이 없다.


대충 여기서 인사를 마치려고, 메일을 다시 읽어 보니, 어라? 꿀꿀이 호박 얘기를 세 번이나 썼네! 대만보다 훨씬 우수한 메모리 강국 코리아의 친구들이 이 내용을 돌(딴딴한 대가리)에 새겨 두고 평생 동안 호박만 덜렁 들고 쳐들어 오면 어째?


끄-악, 소름 끼쳐! 애써 쓴 이 메일 보내지 말고 그냥 싹 지워 버릴까?


아니다. 한 번 끓여 먹고 나면 뱃살에 기름만 더해 주는 라면을 받는 것보다 먹고 남은 씨를 심어서 대박을 낼 수 있는 꿀꿀이 호박을 받는 것도 괜찮을 거다.


혹시 박 타서 흥부처럼 선녀님들 데리고 살게 될지 누가 알아?


- 2013년 6월 4일, 꿀꿀이 호박이 미녀 나올 데가 아닌데, 거기서 나온 선녀들로 무용단 만들었다가, 얼굴 보고 기절해서 천당 가면  어쩌지? 나 가고 나면 마님한테 대박 나게 생명보험이라도 하나 들어 둬야겠다.


비록 불청객이라도 먼 데서 작은 선물이라도 사들고 찾아온 손님을 겉으로는 따뜻하게 맞이했지만, 돌아간 후에 시원하게 생각하는 것이 좀 미안해서 남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네덜란드어를 쓰는 친척에게 손님 얘기를 했더니 대뜸 하는 말이 "손님과 생선은 사흘이면 냄새가 난다"고 대답한다.


속담 사전을 찾아보니, 영어로는 흔히 "아무리 좋은 생선도 사흘만 지나면 냄새가 난다(The best fish smell when they are three days old.)"는데 이것은 "반가운 손님도 집에 사흘 두면 지겹다"는 뜻이다. 유사한 속담에 "첫날은 손님 이틀은 짐짝 삼일은 해충(The first day the man is a guest, the second a burden and the third a pest.)"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탈무드에 나온다는 유태인들의 격언에는 "손님은 비와 같다."고 한다. "오는 건 좋지만, 너무 오래 오면 안 좋다"는 의미이다.


그럼 동방에서는 어떻게 말하는가? 중국에서 오신 손님들의 조상 대표 공자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 배우고 복습하면 기쁘고,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 멀리서 친구가 오면 즐겁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남이 몰라 줘도 화내지 말라.


조상의 뜻을 받들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먼 데서 찾아온 손님의 뜻을 결국 '놀부'도 이해했다.


매거진: 다시 쓴 편지 / 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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