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판석, 드라마는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거예요
나는 진짜 좋아하는 책, 드라마나 영화는 수차례 다시 본다(중학교 시절, H.O.T랑 핑클 영상 녹화한 거 맨날 돌려보던 짬바 어디 안 간다). 특히 드라마 <공항 가는 길>, <프로듀사>, <그들이 사는 세상>을 여러 번 봤다. 20대 때는 미드 <프렌즈>, <섹스 앤 더 시티>, 영화 <비포 선라이즈&비포선셋>, <유브 갓 메일>, <내가 널 싫어하는 10가지 이유>, <내 남자 친구는 왕자님> 같은 취향에 맞는 작품들을 영어 공부 겸해서 비지엠처럼 틀어 놓고는 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를 여러 번 정주행하고 있다. 전부는 아니고 <봄밤>과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딱 두 작품. 그는 <하얀 거탑>, <아내의 자격>, <밀회> 같은 굵직한 흥행작도 연출했지만 이 작품들은 보지 않았다. <밀회>는 채널을 돌리다가 중간중간 보기도 했는데 사실 재미는 있었으나 (내 기준에는) 심각한 계열이라 끝까지 보진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그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너무 가슴 아플 것 같거나 많이 무거운 혹은 무서운 내용은 절대 피한다. 잔상이 오래 남기도하고, 감정의 파도를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파도는 나의 일상에서만도 차고 넘친다.
<봄밤>과 <밥누나>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꼭 정주행 한다. 최근에도 두 작품 모두를 다시 봤다. 볼 때마다 이전에는 안 보이던 연출이 눈에 들어와서 놀라기도 하고 예전에는 이해가 가지 않던 대사가 공감되기도 한다. 연기의 디테일에도 새삼 놀라면서 본다. 자꾸 곱씹어 볼만한 대본과 연출, 연기다. 작감배, 작가-감독-배우의 합이 기가 막히다.
(참고) 두 작품에 대한 이전 브런치 글
ㅇ 봄밤 : 봄밤, 사랑에 빠진다는 '추락'에 대하여
ㅇ 밥누나 :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그 언니의 성장 이야기
그러다 문득 안판석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볼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꽤 긴 인터뷰를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났다. 다시 기사를 찾아보다가 2014년 인터뷰 내용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왜 그의 작품을 여러 번 보게 되는지, 볼 때마다 어쩜 이리도 생각할 거리가 많고 재미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인터뷰어의 질문도 인터뷰이의 대답도 모두 흥미롭다. 인용하지 않은 부분 외에도 생각해볼거리가 풍부하다. (*기사 원문 : <밀회> 안판석 감독 "중요한 건 인간의 의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
1. 87년 MBC에 입사하며 감독으로 첫 발을 내딛으셨는데, 출발 당시는 어떠셨나요
"감독으로 평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이 막연했는데, 드라마 파트에 배정되고 보니 이 일이 요구하는 가장 큰 학문적 배경이 문학이더라고요. (...) 영화, 드라마가 나오면서 문학의 시대가 가고 영상의 시대가 왔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게 아니라 여전히 문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거라고 봐요. 시, 소설, 연극뿐 아니라 영화도, 드라마도 문학의 아들인 거죠"
2. 문자를 통해 사고하는 습관이 작품을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나요?
"책을 읽는다는 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고를 단련하는 거예요.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기 위해 손 근육을 단련하는 것처럼 작가, 연출가는 책을 읽으며 정신의 근육을 단련하는 거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머릿속을 사고력을 단련해야 해요"
3. 그렇게 단련된 사고력이 실제 연출에 있어 어떻게 적용된다고 볼 수 있을까요?
"(..) 자신의 시선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루 24시간을 나눠 쓴다면 비디오 보기보다 책 읽기를, 책 읽기보다는 생각하기를 더 하는 게 좋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내 진짜 직업은 '싱커(thinker)'인데 드라마는 그 과정에서 덤으로 나오는 거죠"
4. 드라마의 재미와 윤리적인 측면은 결국 같이 간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그렇다고 봐요. 공자 왈, 맹자 왈 해야 윤리적이라는 게 아니라 드라마는 무조건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거예요. 단 하나, 그 고통과 결부되어 얻는 인생의 통찰을 다루는 거기 때문에 윤리학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거죠. (..)
모든 인간에게는 순정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 사는 게 아닐까?
나도 좀 나아지고 싶은데 어떡하지?
내가 그렇게 했으니 죽일 놈인가?' 같은
죄책감, 쓸쓸함, 허무함을
혼자 껴안고 살아요.
그러면서도 그걸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민망하지 않게
교묘히 탐구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하죠.
어떤 사람에게 그게 소설이고,
누군가에겐 영화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는 드라마인 거예요."
정말 그랬다.
나는 그의 드라마를 보면서 '나를 탐구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의 고통이 그저 어떤 사건이나 사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나름의 통찰을 얻을 때 내가 살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이 작품들을 들춰보는 것이다.
이 각도에서도 생각해보고 저 각도에서도 생각해 보면서, 나의 삶과 그에서 비롯된 고통을 '무언가와 민망하지 않게, 혼자 조용히, 교묘히 탐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게 모든 인간에게는 '순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나에게도 '순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여기에 인용하진 않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돌을 굴리는 거예요"라는 표현도.
두 드라마 모두 평범한 이야기(출생의 비밀을 다루거나, 재벌 3세나 연예인 혹은 전문직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가진 인물이 주인공인 드라마에 비하자면)가 흡사 다큐 느낌으로 그려진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 모두 근처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가 더더욱 마치 “내 이야기”인 것처럼 몰입하게 된다.
그녀들이 처한 환경과 상황, 말과 행동, 선택과 책임을 보며 나도 나 자신의 죄책감과 쓸쓸함, 허무함의 실체를 마주한다. 이 과정이 나의 삶을 재해석하도록 도와주는데, 이는 그 자체로 말할 수 없는 값진 위로이다.
인생은 완벽하지 않고, 실수투성이였던 과거의 나를 끝끝내 미워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올해 겨울에도, 내년 봄에도 또다시 두 드라마를 정주행 하게 되겠지? 클래식한 영상과 음악, 주인공들의 빼어난 연기(및 비주얼!!)가 주는 오감 만족은 덤이고. 안판석 감독이 만드는, 봄밤과 밥누나 계열의 또 다른 작품도 가만히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