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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Mar 29. 2020

06. 내가 너의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7월 중순의 토요일. 그 날의 일정은 점심 소개팅, 저녁은 동아리 선후배 모임이었다. 6월에 했던 소개팅 중에 괜찮았던 사람이 있어서 한 달을 넘게 만났는데, 결국 잘 되지 못하고 또 새로운 소개팅을하게 된 것이다. 1시 즈음 홍대 근처에서 만나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헤어졌다. 만나는 동안 분위기는 좋았으나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 소개팅으로 나는 또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깨닫게 되었다.


저녁 약속은 6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4시 반부터 프리했다. 약속 장소는 합정역 인근, 이것저것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가야지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아! 이 정도 시간이면 C가 오고 있을텐데 어디까지 왔는지 한번 물어봐야겠군' 하는 생각. 모임 구성원은 대략 8~10명 정도 였는데, C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C는 집이 인천이라 합정-홍대까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고, 토요일 저녁즈음이라 경인고속도로가 막힐 것을 생각하면 분명 집에서 일찍 출발했겠다 싶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도로를 보는데, 주로 그가 신촌까지 올 때 타고다니는 버스인 빨간색 '1400번' 버스가 눈 앞을 지나갔다.


"어디쯤이야?"

"어, 나 홍대. 거의 다 온 것 같아"

"아 대박, 설마 지금 사거리 지나간 버스에 너 타고 있었던 거임?"

"어? 너 어디야? 딱 기다려"


역시나 내 예상은 적중했고, 그는 이른 출발 + 고속도로 정체 없음 콤보로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홍대쯤부터 구경하면서 놀다가 가려고 했는데 내가 마침 연락을 한 것이다. 홍대입구역 대로변에서 그를 만났다. 뭔가 이 상황이 웃겼다. 나는 그를 만나자마자 소개팅 얘기를 하며 푸념을 늘어 놓았다.


"나 오늘 소개팅했는데 또 망했어"

"왜 뭐가 문제였는데"

"내가 전에 어디선가 본 내용 중에,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제일 중요한 조건이 '냄새'라는 것을 본 적이 있거든?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좋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냄새가 안 맞으면 더 만날 수가 없다는거야. 근데 내가 아까 소개팅에서 그걸 느꼈어."

"어땠는데?"

"분명 악취 같은 건 아니었거든? 그런데 그냥 그 사람이 풍기는 냄새가 나랑 안 맞는 거 같아. 도저히 못견디겠는거야. 사람은 괜찮은 거 같았는데... 또 못 만날 거 같아. 그 냄새를 다시 맡을 자신이 없어. 진짜 중요한 조건인게 확실해"

"그럼 내 냄새는 어때?"


잠깐 멈칫했다. 우리는 나란히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는데. 짧은 찰나에 충분히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했지만, 정말 순수하게 물어볼 수 있는 흐름이었다.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 행동했다. 잠깐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 냄새를 맡았다.


"오픈된 공간이라 그런가 냄새 자체가 잘 안 느껴지는 거 같은데"

"그래? 음..."

"근데 적어도 싫은 건 아닐 거야. 그랬으면 우리가 오랫동안 이렇게 못 만났을테니"

"그러게"

"그럼 나는 어때?"


이번에는 반대로 그가 나의 가까이에 와서 목덜미 부근에서 냄새를 맡았다. 


"나도 딱히 이상한 건 없는데.. "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 날 모임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카페 겸 레스토랑인 분위기 좋은 곳. 지금은 가게가 없어진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가게 이름을 한 번에 말하지 못한다. Spring come, Rain fall (그는 '봄이 오고, 비가 내린다.' 로 외우라고 알려줬다) 그곳의 2층, 커다란 테이블이 있는 한쪽 구석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수다의 장을 열었다. (아직도 따뜻한 원목의 가구들과 함께 사람들과 즐겁게 얘기를 했던 순간이 눈에 선하다. 다시 추억에서 돌아와서...)



Spring Come, Rain Fall 이 글을 쓰니 잊지 못할 것 같은 이름이다 ⓒ구글 검색



그 날 수다의 주요 주제 중에, 하나는 스쿠버 다이빙이 있었다. 한 친구가 세부에서 자격증을 따왔는데 다이빙이 너무 재밌다고 해보라고 추천한 것이다. 생각보다 비용도 그리 비싸지 않아서 한 번 해볼만 하다고. 그 자리에서 귀가 솔깃 했던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거기에 C와 나는 "오 좋아, 우리 같이 가자!" 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의 슬픈 목공 이야기였다.


5월,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나는 10주짜리 목공 공방 클라스에 다녔다.(정말 부지런하게도 살았구나) 내가 살고 있는 원룸에 맞춘 화장대와 침대 테이블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여러가지로 관심이 있던 분야라 강습도 듣고, 내가 필요한 것도 만들며 매주 일요일에 공방에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는 처음에 얘기했던, 소개팅 남과도 한 달 넘게 계속 만나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매주 주말 하루는 데이트, 하루는 목공 수업을 들으며 보내는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때 나는 침대 테이블을 만들면 그 위에 스탠드를 올려 놓으려고 했고, 그 스탠드는 남자친구가 선물해줬으면 하는 로망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 완성되는 시기에 맞춰서 잘 되어가는 남자도 있었다. 그래서 만약 사귀게 되면 이런 로망을 말해봐야지~ 하고 있던 찰나, 그 남자와 끝난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없고 테이블만 남아버렸지 뭐야.
별 수 있나 스탠드는 내가 사야지.
내가 다 그렇지 흑흑...





그 날 밤 11시가 넘어서 카톡이 울렸다. C였다.



그 스탠드 내가 사줘도 될까? 생일 선물로..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괜찮지?


그는 내가 스탠드를 올려놓고 싶어서 테이블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한 순간부터 나에게 그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마지막에 그걸 남자친구한테 받기를 바랐다는 말에.. 당황했지만, 일단 현재는 남자친구가 없어서 그걸 사줄 사람이 없기에.. 본인이 사주어도 괜찮냐고 물은 것이다. (참고로 내 생일은 10월 말이다. 이때는 7월 중순.)


남자친구가 아닌들 어떠하리. '선물'이라는 것으로 로망을 충족시켜 준다는데. 스탠드가 먼저다. 언제 생길지 모르는 남자친구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 스탠드를 사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내 생각이 기특하지?"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너무도 들뜬 나는 이모티콘으로 신나는 기분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때는 스탠드에 집중해서, 그의 말과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 신났고, 괜히 내가 오해해서 머릿속이 혼란해지는게 싫었고, 더 큰 기대를 할 생각도 없었다. 우리는 신나게 스탠드 디자인을 골랐다. 원목에 어울리는 우드 스타일의 미니 스탠드로, 열심히 찾아보았다. 그렇게 신나는 여름 밤이 지나가고 있었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부터 우리 사이는 확실히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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