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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Apr 05. 2020

07. 이것은 '썸'의 시작이었을까

완벽한 데이트같았던 하루

이때부터 였던 것 같다. 둘이서 따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우리는 모임이 많이 겹쳐서 굳이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각종 모임에서 종종 얼굴을 봤는데, 스탠드 이야기 이후부터는 둘 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일단 주말 동안 스탠드를 골랐다. 평소에 쇼핑을 잘 하지 않는 나인데, 그때는 정말 신나서 열심히 인터넷을 뒤졌던 것 같다. 다음날인 일요일, 혼자서 마을버스 타고 낑낑대며 가구 2개를 가져오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드디어 내 로망이 실현될 테니까. 드디어 딱 올려놓기 좋은 스탠드를 발견하고 그에게 링크를 보냈다. 


직접 만든 화장대(좌), 침대 테이블(우) 아직도 잘 쓰고 있다 ⓒ과거 사진첩


그는 모름지기 선물이면, 본인이 직접 갖다줘야 한다며 일단 본인 집으로 배송시키겠다고 했다. 나 역시 그냥 택배로 받을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직접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배송, 그의 근무 스케줄, 나의 보답 계획 등등을 정리해보니 그 다음주 토요일 오후에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만에 우리는 동교동 삼거리 횡단보도에서 다시 만났다. 



이렇게 느끼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구글 검색


오전 근무를 하고 퇴근하고서 바로 왔던 그는, 넥타이를 한 양복 차림에 한 손에는 커다란 박스를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키 조금 크고 (180cm는 안 된다) 호리호리하여 수트핏이 잘 받는 남자가 저기 길 건너에서 내 선물을 들고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밖에서 선물을 주고 받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일정은 남은 하루 종일이었기 때문에, 선물은 집에 두어야 했다. 그와 함께 스탠드 박스를 들고 우리 집으로 왔다. 내가 자취하면서 6년째 살고 있는 원룸은 짐이 쌓이다 못해 모든 창문을 가리는 수준이었는데, 거기에 또 하나의 짐이 추가되었다. 알고 지낸지 8년 만에 우리집에 정식으로 처음 와 본(옛날에 하숙할 때 이삿짐을 날라준적은 있다) 그는 어마어마한 짐의 양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한쪽 구석 침대 귀퉁이에 스탠드를 맞이하기 위해 놓여진 테이블을 보고 신기해했다. 기가막히게 옷장과 침대 사이에 끼어들어가 머리맡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우 컬러테러리스트. 몹시 부끄럽지만 이것이 리얼리티 ⓒ과거 사진첩



얼른 박스에서 스탠드를 꺼냈다. 귀여운 우드 스탠드였다. 내 취향을 확실히 반영한 그 스탠드에 감탄하며, 일단 불이 들어오는지 확인했다. 잘 들어온다. 침대를 둘러 전선 연결을 하는 등의 세팅이 필요했기에, 최종 세팅은 나중에 사진으로 보여주기로 하고 일단 집을 나섰다. 시간이 오후 3~4시 정도 였다.


연희동에는 맛집이 많다. 덕분에 갈 곳이 많다. 시간대를 고려하여 우리는 블루베리 팬케이크가 유명하다고 하는 카페에 가기로 하였다. 나는 단 것을 아주 좋아하고, 그는 단 것을 잘 먹는다. 그는 남자이긴 하지만 술보다는 카페를 좋아한다. 토요일 오후에 도착한 카페는 거의 만석이었는데, 다행히 창밖을 나란히 보는 자리 2개가 비어 있었다. 거기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다리던 팬케이크가 나온 순간 어마어마한 비주얼에 대한 감탄, 칼로 잘랐을 때 틈 사이로 새어나오던 뜨거운 김, 한 입 베어물었을 때 달콤했던 그 느낌까지 6년여가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초점이 스탠드에 맞아버렸지만. 블루베리 팬케이크는 어마어마했다. ⓒ과거 사진첩



카페에서 수다도 떨었고, 어느덧 해질녘도 되었고 하여 내가 준비한 다음코스를 위해 우리는 이동했다. 내가 보답으로 준비한 코스는 뮤지컬 '헤드윅' 관람이었다. 우연히 좋은 기회에 무척 저렴한 할인 티켓을 구하게 되었고, 마침 그와 같이 가기에 좋은 타이밍이라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티켓은 무려 1인에 만원이었다. 쏘기 딱 좋았다.) 당시에 헤드윅은 '백암아트홀'에서 공연하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마침... 삼성역 근처였다.


우리는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곳 인근에는 우리가 아는 수준에서는 딱히 음식점이 없다는 것을. 일단 지금은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먹었으니 딱히 배가 안고프지만, 분명 9시 뮤지컬을 보고 나면 배고플 것이니 들어가기 전에 무언가를 먹어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간 곳은 현대백화점 푸드코트.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고, 그는 약간은 배고파했기에 이곳에서 1인 식사만 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와 마주보고 앉아서, 돌솥비빔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절반 이상 그가 먹어갈 때쯤, 나에게도 한 입 먹어보라며 한 숟갈을 떠서 준다. 그 숟가락은 그가 지금 먹고 있던 숟가락이었다. 그 혼자 먹을 거라 따로 수저를 챙겨오지 않았다보니, 일단 있는 숟가락으로 "먹을래?" 하며 권한 것이다. 순간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아무리 우리가 평소에 빨대를 신경쓰지 않고 셰어 한다지만 (그도 나도 마시던 음료에 빨대 한 입 주는 것을 크게 꺼리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둘이 만나면 한 입만~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지금 밥 먹던 숟가락은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과 아 그렇다면 그는 나를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 하는 생각 등이 순식간에 소용돌이를 쳤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나는 그 한 숟가락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도 아마 두 숟가락은 더 먹었을 것이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뮤지컬을 보고 나니 어느덧 11시가 넘어 집에 갈 시간이었다. 여기는 서로의 집에서 너무나도 머나먼 삼성역이었으며, 우리는 둘 다 뚜벅이였다. 집에 가는 길은 전과 동일했다. 각자 버스타고 가기. 지난번과 같은 정류장에 가는 길이었지만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땐 친구-쨔샤-의 느낌이 강했지만(1편. 키스를 할 수 있으면 사귈 수 있다 하였다의 느낌) 지금은 뭐랄까.. something이 생긴 느낌이랄까. 어느 새 조금 조심스러워지고, 조금 더 그에게 신경쓰게 되었다. 아직 우리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오늘을 계기로 뭔가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먼저 740번 버스를 타고 출발했고, 그는 배웅했다. 회차 지점 가까이라 텅 빈 버스 안에서 그를 향해 열심히 손 흔들었다. 그리고 이내 지속되는 카톡에서의 대화. 아마 집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까지, 잘 도착해서 씻고 잘 때까지 대화는 계속될 것이다. 


갖고 싶었던 선물을 받고 (그는 스탠드를 주면서, 우리는 원래 꼭 생일 당일에 챙기는 사이 아니었잖아~ 연 중 아무때나 아이템이 있으면 되는거지~를 계속 강조했다), 카페에 가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 뮤지컬 한 편을 같이 보고, 식사는 숟가락 하나로 함께 하는. 완벽한 데이트'같았던' 하루. 






스탠드 완성본. 나는 아래 사진의 인증샷을 찍어서 그에게 보냈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이 스탠드와 함께 잠들기 전 독서를 하고자 하였으니, 읽을 만한 책을 탐색하였는데 마침 그에게는 대하 소설 전집이 있었다. 딱이네, 그에게 책을 빌려야겠다. 그렇게 아리랑 1,2,3편을 빌리기 위한 약속을 또 잡았다. 자.. 보자 아리랑은 12권 까지 있다. 씨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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