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리 Mar 01. 2020

01. 키스를 할 수 있으면 사귈 수 있다 하였다

'얘랑 키스할 수 있을까?'


5월 말의 어느 날, 그와 함께 밤늦게 떡볶이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앞에서 열심히 어묵 국물을 마시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저 생각은 도저히 못할 생각 같았다. 그가 국물을 다 마시고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려 한다. 어우, 오글거려. 눈도 못마주치겠는 애한테 키스는 무슨... 역시 우리는 진정한 친구 사이인가보다. 상상조차 안간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나를 반성했다. 얼마나 남자를 찾아다녔으면 지금 생물학적으로만 남자인 녀석을 앞에 두고 그런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스물 아홉의 나는 그 해에만 소개팅을 15번을 했을 정도로 연애 사업 성사를 위해 열중이었다. 스물 일곱 11월에 헤어진 후로 1년이 넘게 나는 솔로였다. 이별 사유가 아주 치사해서 당분간은 연애를 말아야지 하던 때였다. 그렇게 솔로를 즐기고 나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십대의 끝자락이었다. 하하, 여기서 이렇게 나이를 더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약간의 초조함이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30대 전에 결혼해서 애를 낳고 싶었던 로망 아닌 로망이 있었다. 그런데 벌써 30이 코앞인데 애는커녕, 결혼도커녕, 연애 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니!! 약간의 조급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최대한 많은 남자를 만나자. 하여 소개팅 및 모임에 열심히 나가는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보면 생기는 약간의 부작용은 남자를 마주하면 자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남자로서 어떨까?



ⓒ구글 검색


소개팅은 무수한 탐색의 시간이다. 남녀가 처음 만나 인사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하는 느낌을 재빨리 끄집어 내야 한다. 물론 한 번 만나고 든 인상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첫 만남에도 별로인 사람을 몇 번 더 만나 이리저리 맞춰볼 시간은 없다. 소개팅의 핵심은 스피드니까. 



이전 남자친구는 소개팅으로 만났다. 딱히 크게 좋은 점은 없었지만, 일단 처음부터 나를 적극적으로 좋아해주고, 더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처음 만난지 일주일쯤 됐을 때 3번 째의 만남에 사귀었다. 마치 삼세번 소개팅의 정석을 따르는 것처럼. (소개팅은 3번 만나면 사귀거나 안 사귀거나 결정이 난다는 것) 어차피 처음부터 이성적인 관계로 만난 사이, 더 탐색해봐야 이 이상의 모습이 나올까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와 만나는 1년 동안 후회했다.(아마 극초반 50일 정도 빼고?) 아, 조금만 더 이 사람에 대해 알았더라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연애 초반의 설렘이 지나고, 이성의 끈이 돌아오고 나니 맞지 않는 가치관만 느껴졌더랬다. 그래도 긍정적이고 맞는 면을 보려고 최대한 노력했지만...........



아무튼 돌아와서, 그 뒤로는 소개팅을 하되 절대 사람을 모른 채 결정하지 않겠다는게 신조가 되었다. 덕분에 이 때는 소개팅을 해도 관계의 정의 없이 3번 이상을 만난 남자가 생기는 현상이 발생했다. 30대의 남자는 적극적이지는 않되 꾸준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끓어오르지 않되 지속적이었으니. 가끔 연락하고 밥 먹고 영화는 보지만, 그 이상 다가가지 않고 부담주지 않는 관계. 서로를 신중하게 탐색한다는게 느껴졌달까. 


늘 그렇듯 신중한 탐색은 결정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가져온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소개팅의 일상, 주말의 만남을 지속해오고 있을 때였다. 월요일 밤 11시에 떡볶이를 먹으며 문득 떠오른 이 생각들은, 앞에 있는 이 녀석도 나도 이 시간도 공간도 참 새롭게 느끼게 해주었다.


소개팅남과 떡볶이를 먹으며 무슨 대화를 나눌까. 조금이라도 매운 것을 먹으면 콧물을 흘리는 나는 과연 몇 번 만나지 않은 낯선 남자와 이런 가게를 올까. 지금 이 녀석과 하하호호 웃으면서 나누는 대화들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면 어떤 느낌일까. 대화의 방향이 이렇게 흘러는 갈까. 지금 너무 편하고 좋긴 한데...


지금 눈 앞에 있는 그와는 뭘 좋아하세요, 취미는 어떻게 되나요 같은 것을 물을 필요가 없다. 이미 8년을 함께 해 온 것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단 하나,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각자 남자/여자로서의 매력이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거니와 지금 상상조차 못하겠는 그것.


ⓒ구글 검색


키스를 할 수 있으면, 그 이상도 할 수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일단 그 이상의 상상은 하지말고 키스가 가능한지부터 생각해보자. 쌍커풀이 있는 큰 눈이지만, 만만치 않게 두꺼운 안경으로 덮고 있는 얼굴, 엄청 높은 코, 하지만 작은 입. 저 얇고 작은 입술에 키스...... 으어, 안되겠다. 진짜 반성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키스조차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친구는 안되겠다.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남녀사이에 친한 친구는 가능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월요일 밤 11시에 삼성역 근처 죠* 떡볶이 가게에서 배터지게 떡볶이를 먹었다. 






그의 집은 인천에 있고, 나는 연희동에서 살았다. 둘 다 직장인인 우리가 평일 저녁 집에서 먼 삼성역에 있었던 이유는 그의 누나가 준 클래식 공연 티켓 때문이었다. 4월인가 그의 누나는 그에게 여자친구와 보러 가라며 코엑스에서 열리는 공연 티켓을 주었다. 하지만 5월 초 어느 날 그는 여자친구랑 헤어졌는데, 공연 날짜가 다가왔을 때 왠지 그 공연을 안 가기도 싫고, 혼자 가기도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들 모임에서 그가 말했다.


"다음주 월요일에 클래식 공연 티켓 있는데 나랑 같이 보러갈 사람? 참고로 우리 누나와 남자친구도 온다.


모두가 침묵할 때, "할 일도 없는데 갈래." 하고 손을 든 건 나였고, 옆자리를 채워주는 대신에 밥은 니가 사라~ 하고 왔는데, 지금 밤 11시에 저녁이라고 떡볶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하하, 퇴근이 쬐끔 늦어 저녁을 못 먹고 바로 공연을 보러 들어가는 바람에 공연 끝나는 10시까지 둘이 쫄쫄 굶어버렸다. 공연이 끝나고 밥을 먹으려고 보니 가게는 문을 다 닫았고, 횡단보도 너머에 반짝이는 죠* 떡볶이 간판을 발견했을 때 기쁨이란. 


누나와 그 남자친구는 공연 시작 전에 인사하고, 공연 후에도 두 분이 데이트 하신다며 휭하니 가버리셨다. 처음에 약간 긴장했지만, 나는 여자친구도 아니고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뭐 어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인사했더랬다. 누나 남자친구는 더더욱 다시 볼 일 있겠어? 싶었는데, 하하 역시 사람 앞 일은 모르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될 때 친절한게 좋은 것 같다)


그 날 그렇게 삼성역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졌다. 나는 740번 버스를 타고, 그는 인천행 광역 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걸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밤이 늦고, 내일 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는 그런 평일이었지만, 그냥 그 때는 그런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얼결에 그 날 만났고, 생각보다 그저 그런 공연을 보았고, 비싸고 좋은 음식은커녕 떡볶이를 먹었고, 각자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갔지만, 즐거웠다라고 기억될 시간. 그와 함께하는 것은 많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는 관계. 그런 친구 사이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 오랜 친구는 연인이 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