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20대의 나는 자신 있게 얘기 했었다. "그건 하기 나름이지~ 나는 그런 남자인 친구가 있어!" 누구 하나가 짝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제일 중요하다. 둘 중 하나가 짝사랑 중이라면 이 전제는 성립할 수 없다. 그건 기다리는 관계일뿐이니까), 분명 남자와 여자인데 둘이 밤을 새워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관계. 8년 동안 절친으로 지내면서 미묘하게 스치는 터치조차 일어나지 않았던, 야한 농담 조차 던진적이 없었던 C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남사친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친구 관계가 아니던가. 우리는 이성적인 느낌 없이 사람 대 사람의 친밀함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위 내용이 과거형으로 쓰인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 그 진정한 친구 사이는 8년 만에 삐그덕거리고 있었다. 21살에는 우정이었지만 29살, 이십대의 후반에는 미묘한 파문으로 시작되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이 변화의 과정을 여자인 L의 관점에서 쓰고자 한다. 남자 C, 여자 L 그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그들의 20대를 대략적으로 정리해 본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세세한 내용은 글의 흐름을 위해 각색될 수 있습니다.)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새로운 관계를 찾기 시작했다. 벌써 대학 생활의 절반을 채워가고 있는데 나에게 남은 건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남자친구 뿐이었다. 이렇게 대학 생활을 끝낼 수 없어. 지속적으로 소속감이 있는 동아리에 들어가자. 그렇게 하여 평소 별을 좋아했던 나는, 신입생 복학생을 가리지 않는 천문동아리에 가입 신청서를 냈다.
실제우리 동아리에서 2008년 3월 동아리 신입생 모집 활동 당시 언론사에 찍힌 사진이다. (내가 들어간 후 시점, 지금 보니 참 오래 됐다...)
천문 동아리의 첫 세미나에서 그를 만났다. 천문 동아리 프로그램 중에는 매주 진행되는 세미나가 있었다. 천문 지식과 상식 등을 동아리원들이 돌아가면서 강의하고, 또 서로 듣는 그런 세미나인데 그날은 개강 후 첫 세미나여서 신규 멤버들이 대거 들어와 우글우글 했었다. 몇 십명이 모여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강의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수많은 신규 멤버 중 하나였다. 그날 2학기 신입생을 환영하는 술자리가 열렸고, 세미나는 30분, 인사는 10분, 술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구글 검색으로 찾은 후배들의 세미나 모습.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평소 모습이 비슷하다.
그와 제대로 대화를 한 기억은 2차 즈음 신촌의 모 맥주집에서부터였다. 분명 처음부터 그렇게 앉은 건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자리를 옮기고 옮기다보니 어쩌다 그와 나는 나란히 앉아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요 주제는 지난 여름 방학 때 지리산에 다녀온 이야기. 그는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지리산 종주 프로그램으로, 나는 남자친구와 함께한 극한체험 중 일부로 바로 한 달여전에 지리산에 다녀왔었고 그 생생한 경험에서 서로 공감대를 발견하며 웃고 떠들었다. 나는 그 날 동아리에 가입한 첫날이라서 나름 낯설고 어색한 상황이었는데, 그는 그 날의 술자리 대화가 생각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동갑이고, 관심사도 비슷하여 우리는 곧 급속도로 친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는 친절했지만 여자의 감성을 모르는 모태솔로였고, 나는 이미 신입생때부터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던 상황이었다. 분명 친했지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가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는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으며, 나 또한 남자친구가 있으면서 굳이 모험을 할만큼 대단한 마인드의 소유자가 아니었다.(그리고 그가 그정도의 이성적 매력이 있지도 않았... ) 그냥 '세상에 나랑 비슷한 사람이 또 있는데 그게 남자면 너야~' 하는 드립이 가능할 정도로 닮은 점이 많은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게
스물 하나에 처음 만난 우리는,
스물 둘에 지지고 볶으며 점점 친해지고 있었고,
스물 셋에 그는 군대에 가면서 첫사랑과 첫이별을 경험하였으며, 나는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스물 넷에 한국에 돌아와 미래의 나를 위한 공부에 매진하면서, 공군이라 6주마다 휴가 나오는 그가 학교에 올때마다 밥사주고 있었으며,
스물 다섯 끝자락에서 내가 이별을 맞이할 즈음, 그는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들며 제대했다.
내 스물 여섯은 6년을 만난 남자친구와의 이별에 힘든 시기였고, 그의 스물 여섯은 여자친구와 본격 연애를 하며 꽁냥거리는 시간이었다.
대학 졸업즈음인데다 각자 다른 연애 상황, 미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시간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어느정도의 거리감이 있었다. 자신 있게 남자와 여자는 진정한 베프가 가능해!를 외칠 수 있었던 시간들.
스물 아홉이 될 때까지 우리는 단 둘이 있는 밤을 몇 번을 지새우면서도 (별보는 동아리, 별 찍으러 갑니다) 단 한 번도 그 어떤 스킨십이나 떨림 따위는 없었던, 손가락 스침 조차도 없었던 진정한 친구사이였다. 하지만 그 완벽한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