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해 크리스마스, 1월 1일 새해에도 나는 소개팅을 했다. 언제 연애하고 결혼하느냐는 엄마아빠의 잔소리, 그리고 약간의 외로움, 동반자를 찾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부지런하게 했다. 나는 집순이라 회사-집-회사-집의 일상 속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그나마 여행할 때 정도나 만날까.. ) 그래서 열심히 소개팅을 했다. 아마 손꼽아보면 1년여 간 15번 정도는 했던 것 같다. 사귀지는 않았지만 여러번 만난 상대도 있으니, 꽤 오랜 시간을 소개팅 중심의 만남에 집중했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주선자가 되어주었다. 회사 동기/선배, 학교 선후배, 친구들... 아마 조금이라도 나와 친한 사람들은 다 한 번씩은 소개팅 자리를 만들어준 것 같다. 그 중에서 C 또한 소개팅 주선자 중 한명이었다.(나는 C의 회사 동기와 소개팅을 한 적이 있다 ㅎㅎ)
소개팅 성사를 위한 1차 관문, 조건. 이 조건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외모(사진)가 될 것이고, 누군가는 직업, 학벌, 집안 등이 있을 것이다. 나는 소개팅이 성사되는 조건에는 열려 있었다.(다만 사귀는 게 신중했다. 전 남친에 데여서...)굉장히 주관적이고 두루뭉술하긴 하지만, 또 보면 끼워 맞추기 어렵지 않은 조건이었다. 주선자의 1차 필터링을 믿고 제시하는 조건들. 그 이상은? 내 느낌이 중요하지.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자상하고 성실할 것 키 170cm는 넘었으면 함
외모? 사실 나에게 있어 제일 중요성이 떨어진다. 잘생기면 좋지만 그렇다고 꼭 잘생길 필요는 없다. 직업? 회사? 회사는 그만두면 끝이고, 직업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사실 그 자체보다는 기본 베이스인 성실함이 기준이었다. 대부분 주선자가 알아서 밸런스를 맞춰주었다. 이미 내가 회사원이고 나이도 스물 아홉이니 말도 안되는 소개팅은 없었다. 상대방은 주로 회사원이었고 가끔 전문직이 될 학생이나, 대학원생도 있었다.
나는 이성을 볼 때 제일 중요한 점이 흡연 여부다. 상대방이 흡연을 하면 이성적 매력이 뚝 떨어진다. 집안 분위기 자체도 그렇고, 나도 내 건강상 흡연자를 감당할 수 없다. (고등학교때 우리반에 골초인 애가 있었는데, 그 애 주변에 앉을 때마다 후두염에 걸렸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기관지/소화기가 좋지 않다.) 그래서 일단 소개팅에서는 그것부터 확인하고 본다. 그 뒤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점은 '자상함'과 '성실함'이다. 나에게 잘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은건 누구나 원하는 것이겠지만, 난 꼭 그래야만 했다. 나쁜 남자는 확실히 내 취향이 아니다. 다만, 이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같은 것들은 모두 엄청나게 주관적이므로 어떤 사람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판단 보류. 대신 기본적인 성향을 본다. 술을 좋아한다거나 클럽을 좋아한다거나 형님-동생하는 모임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런 여러가지들에서 나랑 안맞을게 눈에 보이는 경우는 사양하는 것이다. (나는 술도 잘 못마시는 집순이다....) 그리고 키는 이왕이면....의 조건이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그리고 괜찮은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그 중에 나랑 얼마나 맞는 사람을 찾느냐가 관건일뿐. 바로 위처럼 저렇게 풀어쓰면 까다로운 조건같아 보일 지라도 3개 항목으로 간단하게 물어보고 (2번은 주선자의 판단에 맡기고) 일단 만나기로 하는 것은 쉽다. 그렇게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과 소개팅을 했고, 별별 경험들을 해보면서 나만의 이성관을 확고히 구축해나갔다.
나를 이루는 경험 ⓒ나의 사진첩
사람은 경험으로 이루어진다.
연애를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항상 또래들과만 연애를 했었다. 그러다보니 조금이라도 나이 차이나는 사람과는 잘 안맞았다. 심지어 그게 3~4살 정도 차이인데도. 소개팅을 하면서 3살 연하부터 7살 연상까지 만나본 것 같은데, 확실히 동갑~2살 이내 나이차이 나는 사람은 괜찮았지만 그 이상은 뭐랄까.. 몇 번을 만나도 조금 어색한 기운이 있었다. 내 연애 경험은 또래에 맞춰져 있기에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내 말투는 좀 세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받아들였다. 사실 말투뿐만 아니라 모든게 좀 센 편이다. 눈빛은 엄청 세고, 목소리도 세고, 심지어 글투도 셌다.(고급 글쓰기 교양을 들을 때 교수님이 글은 잘 쓰는데 너무 강하다고 했었다.... 난 그냥.. 썼을뿐인데 ㅠㅠ) 그러다보니 이걸 감당하지 못하는/않으려는 남자들이 꽤 있었다. 그냥 앞에서 눈에 보였다. 아 이 남자는 내가 목소리를 내니까 꽁무니를 빼는구나, 아 이 남자는 나같은 여자와 맞는 스타일이 아니구나. 아마 나이 차이가 있는 남자들과 이성적으로(인간적으로는 잘 어울린다)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어쩌면 또래와의 연애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소개팅은 진전이 어려운 방법이긴 했다. 소개팅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나의 조건이 나쁘지 않아 성사는 잘 되었으나, 만나고 났더니 내가 본인들이 생각한 스타일이 아니라 진전이 잘 안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랬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고. 사진 보고, 외모 보면 착하고 순한 여성일 것 같은데 대화를 시작하면 그 느낌이 없다고 했다. 하하.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한담. 소개팅으로 만나 3번째 만남에 사귀었던 전 남친은 내 외모가 마음에 들어(사람 마다 외모 취향이 있을테니) 저돌적으로 밀어 붙였더랬다. 사귀다보니 성격이 안 맞는 점이 너무도 많아 결국 헤어졌지만. 이래저래 정리해보니 소개팅으로 성격까지 맞을 운명의 짝을 만난다는 것은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특히, 한 성격한다는 얘기를 듣는 여자들은. 소개팅으로 시작된 만남은 상대방의 성품을 알고 받아들이기 전에 끝나버리기가 일쑤니까.(나 또한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판단하겠지)
그 와중에 스스로도 몰랐던 새로운 면을 발견했는데, 분명 나는 평소에 상대방의 외모를 크게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소개팅할 때 상대방의 사진을 요구하지 않았다. (단, 상대방이 내 사진을 가져가면 나도 상대방의 사진을 받았다. 원하는 자는 줘야 한다.) 대부분의 소개팅남들이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눈에는) 엄청 별로이지도 않았는데, 소개팅을 했던 어떤 한 사람의 외모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소개팅 하는 동안 그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었다. 아니 분명 못생겼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닌데... 왜... 왜이렇게 싫지.. 라고 했을 때, 내린 결론은 그 사람이 가진 외모의 특징이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몰랐었던 외모 취향. 나는 턱이 긴 건 괜찮은데, 좌우로 둥그런 얼굴은 싫어하는 것이다. 아, 잘생긴 것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어도 싫어하는 외모가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재미있는건, 상대방과 만나는 내내 화기 애애했고, 상대방이 또 연락해도 되냐고 했을 때 나는 (본심과 상관없이) '네'라고 대답을 한다. 분위기 좋게 헤어지는 자리에서, 내가 예의바르게 인사하면서 "안녕히가세요" 라고 하면 90% 이상의 확률로 그 다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을 만난 사람이라도 그랬다. 신기했다. 그 말에 본심을 읽은 것인지, 거리감을 읽은 것인지는 몰라도. 아니면 헤어질때 웃으면서 "또 봐요~"가 아니라서 그런가. 헤어질 때 인사말 테스트를 해본적은 없지만 내 경험 통계로는 그랬다. 그래서 소개팅의 만남을 정리하고 싶다면 아주 예의바르고 깍듯한 "안녕히가세요." 멘트를 추천한다. 공손하게 관계를 끝낼 수 있다.
안녕히가세요 멘트와 함께 몸도 이렇게 인사했다 ⓒ구글 검색
소개팅을 열심히 하는 동안, 그리고 낯선 사람을 만나는 동안 초면인 사람에게 나가는 내 멘트는 반복을 하다 못해 이골이 났었다.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는 어쩌다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를 고해성사하였고, 누군가는 업무 프로세스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으며, 누군가는 자기가 모임과 술을 엄청 좋아해서 지금 그 모임에 가야 한다고 일어나기도 했었다. 참 별의 별 경험을 다한다 싶었는데, 이런게 다 미래의 나를 위한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무엇이든 경험은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드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기회가 된다면 소개팅은 하면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