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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Mar 23. 2020

05. 이상형 찾아 삼만리(2)

가치관이 어떻게 되세요?

이상형을 정확히 아는 것은 중요하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더욱. 시간을 아껴주고 내 마음 고생도 덜어준다. 물론, 이런 이상형 '인지'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전남친과의 연애 후였으므로 시행착오가 교훈을 준 셈이다. 실패한 연애에서 깨닫는 바가 있으면, 그걸 수정/보완해서 다음 연애를 해야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 그것이 스물 일곱 11월에 헤어진 이후, 20대의 막바지를 보내면서 내가 한 생각이다.



당시, 전남친과 헤어지는 것은 당연한 거였지만 결과론적으로 내가 차이고 나서, 내가 원하는 상대방의 조건들을 쭈욱 정리해 보았다. 정말 원하는 바를 다 담은 이상형이다. 이런 기준이 먼저 확립이 되어야 그 다음 연애를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은 없다. 이 기준들에 꼭 맞는 사람은 찾기 힘들어도, 그 안에서 타협할 것과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구분될 것 아닌가. 그걸 스스로 정리하는 것만해도 큰 수확이 될 것이다. 백날 이런 정리를 혼자 한다고 해도 실제 뿅~ 가서 이것과 관계 없이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이런 베이스가 있으면 그렇게 사랑에 빠져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난 글에서는 소개팅이 성사되기 위한 조건을 보았다면, 이번에는 세부적으로 내가 만나고 싶은 배우자에 대한 조건들을 작성해보았다. 사실 조건이라기 보다는 가치관 정리에 가깝다. 장기적인 관계에 있어서 생각의 공유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 기본적인 생각의 바탕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비흡연자 -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 선호
보통 체격 - 너무 작거나 마르거나 뚱뚱하면 안 되는 그 어렵다는 보통 체격
비슷한 지적 수준 - 혹은 그 이상. 똑똑할수록 좋다  
무교 - 또는 독실하지 않은 사람
문란하지 않은 사람 - 업소 및 성매매 경험 등이 없는 사람
대화를 하는 사람 - 싫은 거, 불만인거 쌓아두고 폭발하지 않고 그때그때 대화로 풀어나가는 사람
추억을 챙길 줄 아는 사람 -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추억이 될 날을 챙기는 사람
성실한 사람 - 자기의 할 일을 알고, 열심히 사는 사람
생각의 범위가 넓은 사람 - 넓히는 노력을 하는 사람,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사로 잡히지 않는.
정신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사람 - 너무 부모 의존적이거나,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는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가정적이고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 - 술과 모임이 많지 않은. 딱 우리아빠만큼 혹은 그 이상 가정에 충실한.


그리고... 말 많고, 욕심 많고, 훈수 잘 두고, 머리 잘 굴리는 여자를 매력적으로 느낄 사람 



뭔가 내용이 많아서 굉장히 어려운 조건 일 것 같다가도, 생각해보면 한 개인이 충분히 갖출 수 있는 조건이지 않은가. 내 기준에 '좋은 사람'이면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전 남친은 대화와 추억을 챙기는 것이 부족했고, 생각의 범위 또한 좁았다. 여자를 보는 관점이 차별적이었으며, 생일이나 기념일을 무시했고, 자기 관념에 잡혀서 대화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늦으면 늦는다고 미리 말하지 않고 그냥 늦어버렸고, 그 시간 동안 연락조차 잘 되지 않았다. 연애 초반, 30분 정도 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났는데, 왜 말이 없었느냐고 했더니 어차피 혼날 거 도착해서 혼나겠다는 주의란다. 기가 막혔다. 어차피 늦을 거면 상대방이 걱정하지 않게 알려주고, 그 시간 동안 다른 거라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게 아닐까. 적어도 상대방의 시간을 귀히 여긴다면 저런 행동은 못할텐데 싶었다. 


나는 일상을 공유하는 연애를 해왔고, 그와도 하려고 했는데, 그는 하루 일과 마무리를 하는 것처럼 항상 밤에만 전화해 하루 있었던 일을 브리핑 했다. 연애란 관성과 같아서 잘못된 걸 알아도 멈추기가 힘들다. 그만둬야 하는 것을 깨닫고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고 한참 후에 그가 끊어냈을 때서야 상처만 잔뜩 입고 끝이 났다. 인연을 맺는 것은 쉬워도 끝내는 것은 어렵다는 깨달아 그 다음 연애가 이토록 신중해진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눈이 높다고 나를 비난하였다. 너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서는 남자를 만나기 힘들 것이라고, 너가 말한 조건들을 모두 and 조건으로 넣으면 확률이 지극히 낮을 것이라고 주변 남자들은 말했다. (신기하게 나에게 뭐라고 한 사람들은 다 남자였고, 그들은 저 조건을 다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그럴 때마다 내가 했던 말은,



왜? 나도 저 조건에 모두 해당이 되는데?


나는 비흡연자고, 보통 체격이고, 종교도 없고, 대기업 다니고, 술 못 마셔서 따로 술 모임도 거의 없고,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케이크 앞에 두고 촛불 한 번 정도 불면 되고, 책 좋아하고, 전시회나 사진전 같은 취미 생활을 즐기는 스타일이고, 가족이 우선이지만 부모님과는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나는 저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데 왜 나는 그런 사람을 바라면 안되는 거야?



ⓒ구글 검색



재미있는 건 우리 동아리의 많은 사람들이 저 조건의 대부분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사실 특정 사람을 대입해서 보면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의 조건들이 아니었기에 은근 많은 사람들이 해당한다. 문제는 누군가와 어떤 something이 없다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좋아한다'의 그 무엇이 없었기에, 저것은 그저 전제 조건일 뿐이었기에.


동아리 동기 단톡방에서 이상형을 주제로 대화가 나왔을 때, 저 조건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보고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적이 있다. (그때는 심지어 호리호리한 남자가 좋다고 했다. 수트핏에 빠져있어서...)



저거 C인데?


C 마저도 딱 본인이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살이 많이 쪘는데, 유일하게 C만 살이 찌지 않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고, (사실 말랐다.... 그리고 호리호리한 남자를 선호하는 여자는 잘 없는데, 나는 그걸 선호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취미 생활을 함께 해와서 서로 스타일을 잘 알고, 대화도 잘 통해서 동기들 중에 가장 친한 사이이지 않은가. 무교에, 문란은커녕 연애 경험도 몇 번 없는데다 선비 그 자체다.. 소소하게 잘 챙겨주고, 다정하고 친절하다.


그랬다. 그냥 지낼 때는 잘 몰랐는데, 그렇게 열심히 정리한 이상형에 꼭 맞는 사람은 C였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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