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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Mar 11. 2020

03. 좋아하는 것이 같다는 것

관심사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느낀 것


스물 아홉의 5월 초, 나는 혼자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HOLLYWOOD" 간판이 너무 보고 싶어서 기획했던 그 여행은 9박 11일의 미 서부 3개 도시 여행(샌프란시스코, 라스베가스, 로스앤젤레스)으로 커졌고,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만남과 한국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을 정도의 잭팟을 꿈꾸며 5월 1~11일 일정으로 다녀왔었다. (잭팟이 터지지 않은 슬픈 과거형...) 


이번 여행의 계기.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오래 묵혀둔 나의 사진첩


잭팟은 터지지 않았지만, 다양한 만남이 있었다. LA 시내 버스에서 만난 친절한 미국인과는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시간을 함께 했고(라라랜드 영화보다 몇년 전...), LA 민박집에서 LA 다저스 모자를 사달라고 부탁했던 남자와는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 중에서 아주 짧고 굵게 나에게 영향을 미쳤던 만남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사람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여파는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LA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다. 비행기 이코노미석 중간즈음, 나는 오른쪽 창가에 앉았고, 그 사람은 내 옆에, 그리고 복도 쪽으로는 그의 여자 일행이 앉았다. 처음에는 아니 혼자인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옆에 커플이라니 커플이라니!!!! 싶었는데 오가는 대화를 듣다보니 사귀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여자와 이 남자가 무슨 사이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군 하며, 즐거웠던 미국 여행이지만 뭐 남는 건 없이 가는건가 싶었던 찰나 옆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혼자 타셨어요?

 


물꼬를 트는 한마디. 벌써 6년여 전이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낯선 사람이 어색하게 서로 인사하고 대화를 시작하는 패턴은 비슷한지라 아마 그 수순을 밟았던 것 같다. 서로 어떤 일정으로 오게 되었는지, 왜 이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지 등 


그러다가 점점 개인적인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지고, 직업이나 취미나 나이, 어디사는지 등등 사실상 소개팅에서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LA에서 인천으로 오는 비행 시간 내내 쉼 없이 대화를 했다. 12시간 가까이를 바로 옆에서 나란히, 밥도 먹고 약간의 술도 마시고, 잠도 자면서 온다는 것은 굉장히 색다른 일이었다. 마치 소개팅을 한 후에 잠깐 좋았던 모습만 보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첫 만남에 강제로 12시간 붙어있으면서 민낯까지 경험하는 느낌이랄까. 


12시간의 비행 시간 동안 나눈 대화로 알게된 것은 30대 초중반 나이, 여자친구는 없는 것 같고, 운동을 즐기고 음악을 좋아한다. 덩치가 꽤 큰 편이며, 외모는 서장훈을 닮았다(본인피셜). 직업은 항공정비사. 바로 지금 내가 타고 있는 A 항공사의 직원이었다. 옆에 있는 일행따라 LA로 휴가를 다녀오는 길이며, LA에 있는 다른 친구집에서 묵고 일주일 정도를 쉬다가 오는 길이라 하였다. 오... 그 (나중에 키스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했던 C)도 A 항공사 직원인데 혹시 알까? 싶어 이름을 얘기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 였다. 아무렴 어떠리오 무언가 접점을 발견하는 것은 그저 친해지기 위한 수단일뿐



아마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트와이스 뮤직비디오 중


한참을 태평양을 건너오던 중,
살짝 느낌이 들어 그 남자쪽을 바라보니 
어느 순간 내 귀에 헤드폰이 씌워져 있었다. 
본인이 즐겨 듣는 음악인데 같이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라고
씨익 웃으면서 이야기 한다. 


아까 대화에서 나는 음악을 잘 모르고, 아는게 없다고 했더니 그런가보다. 태평양 한복판에서 낯선 남자가 귀에 씌워주는 헤드폰이라니.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오던 음악은 Wouter Hamel의 'Breezy' 색다른 자극이었다.


다른 관심사에 대해 알려주고 서로 공유해가는 과정이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다. 그 남자는 여러모로 나와는 달랐다. 나는 음악을 잘 듣지 않지만, 그 사람은 무선 헤드폰을 끼고 다닐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다. 나는 스키를 한 번 밖에 안타봤지만, 그는 스키/수상스키까지도 탈 줄 안다고 했다. 다만, 나는 별을 보러 다니지만 그는 별을 본 적은 없다고 했고,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는 밖에서 몸으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상상의 나래를 멀리 펼칠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니 꼭 무슨 사이가 되지는 않아도 알고 지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미국여행을 다녀온 뒤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 동선이 아주 가관이었는데, 일단 12시에 선릉역 근처에서 열리는 회사 동기 결혼식에 가야했고, C가 출근 하기 전에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하여 그가 근무하는 김포공항에 가야했다. 연희동-선릉역-김포공항으로 이어지는 하루. 게다가 결혼식에 가는 것이므로 격식있는 복장에 하이힐을 신었고, C와의 만남의 목적은 미국에서 사온 그의 생일 선물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약간의 부피감이 있는 짐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먼 거리를 다닌 날이었다. 


미국에 여행 가기 전에 C에게 DSLR 카메라 렌즈를 빌렸었다. 그리고 미국 여행 중에는 그의 생일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모로 여행 중에 그의 선물을 사기 위해 노력을 좀 했었더랬다. 미국에서만 살 수 있는 선물, 또는 그의 마음에 쏙 들 선물을 찾다가 마지막 여행지 LA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발견했다. 보자마자 이것이야!를 속으로 외쳤고, 오해 받기 쉽게 생긴 외관으로 인하여 미국에서 출국할 때 x-lay 검색대에서 추가 수색을 당하게 했던 그 선물을 전달하는 날이었다. (천문대 기념품숍에서 이걸 발견하고 사온 나 자신에게 엄청 뿌듯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후 '비행기 옆자리 남자'와 카톡을 주고 받고 있었는데, 얼결에 그 남자와 만나게 된 날이기도 했다.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동선이 겹쳐, 내가 김포공항 롯데몰에서 C와 저녁을 먹고 C가 출근하고 나면, '비행기 옆자리 남자'는 퇴근을 하고 롯데몰에 와서 만나는 약간의 '바톤터치'와 같은 일정. (참 하루를 알차게도 살았다.) 



C와 저녁을 먹으며 뿌듯한 마음에 선물을 전달했고, 그는 신기해 하면서 선물을 받았다. 

네가 뭘 좋아할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지 
(사실 나는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너에게 선물했어)


C가 집에서 조립하고 난 뒤에 보내준 인증샷. 각기 다른 자성의 영향으로 빙글빙글 도는 건데  이름은 모른다... 덕후스러운 선물 후후 ⓒ과거 사진첩



그 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3년을 만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3년 동안 10번도 넘게 이번엔 헤어졌느니, 그러고 다시 만난다느니를 반복했는데, 본인 말로는 이번엔 정말로 진짜로 헤어졌다고 한다. 생일을 기점으로 헤어지고 연락 조차 안한지 열흘이 넘었다는 것이다. (보통 전에는 '요즘 여친이랑 잘 지내?' 하면 '사실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있어' 라고 했더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너무 지쳤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음 그래, 너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그는 야간 근무를 위해 출근했다.



비행기 옆자리 남자는 그 후로 30분 뒤에 만났다. 그는 12시간 근무 후 퇴근하느라 지쳤고, 나는 하루 종일 하이힐 신고 돌아다니느라 지쳤던 상태였다. 나는 30분 전에 저녁을 먹었던 관계로 별도로 밥은 먹지 않았고, 이제 막 퇴근한 그가 밥 먹는 것을 앞에서 봐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그 남자가 배를 채우고, 후식을 같이 먹고 수다를 떨고 난 다음, 그가 재밌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러고 간 곳은 토이저러스. 그 중에서도 동물 피규어가 있는 곳이었다. 각종 브랜드들 동물 모양들을 얘기해주면서 그 남자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동물 피규어를 모으는 것이 취미라 브랜드마다 어떤 퀄리티에 차이가 있고, 어떤 것이 비싸고, 어떤 것이 희귀한 것인지 등등 설명해주는데 처음에는 나도 흥미롭게 들었다. 나는 잡다한 상식 컬렉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내용을 습득하는 것을 좋아해서, 내가 전혀 모르는 영역을 잘 알고 설명해주는 그 남자의 말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똑같은 주제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그 시간이 30분을 넘어가고 지금은 오후 9시가 넘었고 나는 하루 종일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걸어다녔고, 이젠 발이 아파 죽겠고 그렇다고 근처에 앉을 곳은 없고 하다보니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앞에서 주절주절 설명을 하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아, 이래서 취미가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하나?
이걸 계속 평생 듣는다고 생각하면 재미 없을 것 같은데... 였다.


새로운 것도 한 순간, 하루 이틀이지 결국 내 관심사가 그쪽으로 쏠리지 않으면 그것은 부담일뿐이다. 만약 그렇게 관심사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는 각자 취미생활을 하며 좋아하는 것을 따로 즐기는 일상을 보내게 될 것이다. 세상에 많은 부부들이 그러한 걸까? 그런 궁금증이 일었고, 만약 나도 그렇게 결혼 한다면...


그럼 결혼 하고나서도 C를 불러내 취미생활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아, 그런데 C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결혼 한 뒤에 서로 배우자가 있는데 둘이 예전처럼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결혼이란 이런 어려움이 있는 건가 싶었다. 취미 생활이란 이런 것이구나. 결혼 전엔 누구와 함께 하든 내 마음대로 즐길 수 있었지만, 결혼 후에는 취미 그 자체도 같이 즐기는 사람도 배우자의 확인이 필요한 생활. (결혼하면 배우자가 그 무엇보다 1순위가 될테니) 


그렇다면.. 이왕 결혼을 할 것이라면 웬만하면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함께하고 그가 하고 싶은 것을 나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그렇게 생각의 흐름을 이어가다가 문득, 아 그러면 그냥 C랑 결혼하면 문제 없겠네 하는 생각이 3초 들었지만 그건 문제 해결을 위한 논리적 흐름일뿐 감정이 아니기에 그냥 그대로 지나갔다.)


아마 내 앞에서 먼저 걸어가던 '비행기 옆자리 남자'가 발이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나를 보고 "어디 가서 쉴래요?" 라는 말을 한마디만 했어도 또 다르게 흘러갔을 의식의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 남자는 내 상태는 아랑곳않고 본인이 좋아하는 동물 피규어에 대한 말만 하고 있었으며, 나는 그 남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를 흘리며 계속 생각했다. 


아, 비슷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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