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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Dec 28. 2015

가족이라는 이름의 퍼즐

<바닷마을 다이어리>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바닷마을 다이어리>(Our Little Sister, 2015)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전세계적으로 봐도 현재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가장 깊이 생각하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가족이라는 주제를 놓은 적이 없는 그의 영화는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점들을 신랄하게 건드리며 부끄러움을 주고, 때로는 누구나 갖고 있을테지만 아무나 말하지 못했을 가족에 관한 감정을 털어놓고 어루만짐으로써 위로를 주기도 했다. 가족의 이상적인 의미만 품고 있던 사람들에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든 가족영화, 아니 가족에 관한 영화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실은 이렇게 어려운 곳임을, 어떻게 보면 그래서 이렇게 위대한 곳임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완전했던 적이 없다. 불완전함으로써,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 고인 상처를 바라보고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완전함을 향해 애써 나아가는 이들이 그가 그리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여느 영화 속 '이미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사람들'보다 그의 영화 속 '가족이 되어가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 아픈 만큼이나 더 감동적이었다. 그런 그가 내놓은 새 영화인 <바닷마을 다이어리> 역시 그 연장선상에 서 있는 영화다. 더 따뜻해지고 더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그건 또 그거대로 좋은 이 영화는, 예쁜 그림같은 마을 속에 숨겨진 실은 밝지만은 이야기를 만나게 하고 포옹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가족이란 존재는 그 안에 있는 각자의 아픔을 행복이라는 표정으로 지우는 곳이 아닌, 그 아픔들을 포옹하며 함께 느끼고 녹여내는 곳임을 이야기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Our Little Sister, 2015)


바람난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어머니 또한 제 삶을 찾겠다며 나간 집에서 세 자매 - 사치(아야세 하루카),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 치카(카호)는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어엿한 어른으로 잘 자라왔다. 할머니는 비록 7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세 자매 모두 스스로 돈을 벌 만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 만큼 컸다. 그러던 어느날 자매는 타지에 있던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임종 직전까지 살았다는 시골 마을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매는 아버지가 두번째 아내, 즉 자신들의 어머니를 떠나 딴 살림을 차린 여인 사이에서 낳은 딸이자 자신들의 배다른 막내동생인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난다. 아버지의 임종으로 이제는 의붓어머니 아래 낯선 환경에서 자라야 할 스즈가 안쓰러웠던 자매는 스즈에게 자신들이 사는 가마쿠라로 와서 함께 살자고 제안하고, 스즈는 잠시 망설이다 언니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한 집에서 살게 된 네 자매. 예의바르고 의젓하면서도 활달한 성격을 지닌 스즈는 다행히 학교생활과 가정생활에 원활히 적응해 나가는 가운데, 네 자매는 각자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가족이 되어간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무래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고레에다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무도 모른다>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가출로 인해 홀로 남겨져 '살아남아야 했던' 아이들이 크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본 결과 같다. 물론 두 영화의 톤은 완연히 다르다. 어른마저도 위협하는 세상의 퍽퍽함이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던 <아무도 모른다>의 어두운 분위기와는 달리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시종일관 따뜻한 분위기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의 차이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들과, 어느 정도 각자의 자리를 찾아 정착할 수 있게 된 어른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충분히 생길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남아있는 정서가 있는데 그건 바로 '어른들의 무책임'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무책임과 맞닥뜨려 혼란과 절망을 겪은 뒤 스스로 성장할 것임을 비로소 다짐한다면,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자매들은 그 다짐을 무사히 실행에 옮긴 모습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다행히 아이들이 어른들 없이는 제대로 자라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바닷마을 다이어리>(Our Little Sister, 2015)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어른들은 다행히 선하고 따뜻하다. 외간여자와 바람나 집을 떠난 아버지와 너무 빨리 자신의 삶을 위해 아이들을 두고 떠난 어머니가 있었지만, 할머니, 이모할머니, 단골식당 아주머니와 아저씨 같이 살뜰하게 보살펴주고 챙겨주는 어른들이 다행히 곁에 있었고, 그래서 아이들은 탈없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어른으로 잘 커줬다고 해서 그들의 성장이 마무리되고 가족의 형태가 완성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지만 부모와의 기억을 서로 다른 형태로 공유하고, 그 영향 아래에서 저마다의 현실적 고민을 안고 있는, 그러다 스즈의 등장으로 인해 가족이라는 이름에 드리우는 어떤 무게까지 들여다 보게 되는 이 자매들에게 가족은 여전히 완성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퍼즐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 있을 뿐, 여전히 맞춰지지 못한 조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 미세한 내적 갈등의 순간들을 고레에다 감독은 역시 그답게 밖으로 표출하는 막장드라마식의 전개를 보여주지 않는다. 여름에 만난 네 자매가 그 다음해 여름까지 보내는 1년의 시간동안, 그들이 가마쿠라에서 보내는 '따로 또 같이'의 나날들이 큰 기복 없이 산뜻한 바닷바람처럼 흘러갈 뿐이다. 그 바닷바람 같은 나날들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네 자매가 만나게 되는 영화같은 사건들과 파도치는 감정들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 이미 흩어진 가족의 기억을 애써 접붙여 가며 힘겹게 성장해 온 자매가 여전히 품고 있지만 차마 말로 꺼낼 수는 없는 고민들의 미세한 떨림, 그 속에서 조용히 일렁이던 감정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주고 헤아려주면서 침착하고 속깊게 보듬는 순간들이다. 그 속에서 가족이라는 곳은 그들의 삶을 어떤 정해진 형태로 옭아매는 틀이 아니라, 서로의 표정을 읽고 체온을 나눌 수 있도록 해주는 안식처가 된다. 그런 가족이라는 곳에서 네 자매는 서로에게 '강요된 존재'가 아닌 '필요한 존재'가 되어간다.


<바닷마을 다이어리>(Our Little Sister, 2015)


맏이로서 부모의 불화를 생생하게 지켜봤던 첫째 사치는 떠나버린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것을 여전히 애써 미루면서, 그들을 향해 보란듯이 잘 해내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책임감으로 동생들을 뒷바라지한다. 그렇게 부모에 대한 원망을 채 걷어내지 못하면서도 정작 자신도 아내가 있는 남자와 비밀스런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모순을 안고 있다. 둘째 요시노부터는 부모에 대한 안좋은 기억보다는 그리움이 좀 더 진하게 남아있는 듯 한데, 쾌활해 보이는 요시노는 사실 꾸준히 사랑을 갈구하며 남자에게 마음을 잘 주고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는 사람이다. 셋째 치카는 부모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부모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던 어린시절 때문인지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은 생각 속에서 살아가며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막내 스즈는 '옳지 못한 관계' 속에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기에 또래에 비해 조심성 있고 성숙한데, 이는 곧 자신이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할 존재'일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 드러난다. 부모들은 맞추기 힘들다고 중간에 뛰쳐나간 것 같은 가족이라는 퍼즐을, 남은 아이들은 이렇게 저마다의 고민과 상처를 안고 부단히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마냥 편안해 하거나 따뜻해 할 수 없는, 서글프고 울적한 광경일지 모르지만 영화는 한 순간도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이 '어른이 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기특함, 대견함 같은 감정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결코 수직적이지 않은 관계 안에서, 네 자매는 어른들이 있다면 암묵적으로라도 강요했을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를 벗어난다. 이건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재정립인데, '책임'이나 '완전함' 같은 것을 요구하는 대신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품으며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첫째 사치도, 둘째 요시노도, 셋째 치카도, 막내 스즈까지도 동등한 위치에서 각자의 배려심과 에너지를 통해 위안을 얻고, 걱정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되어준다.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딸을 자매의 막내로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던 어머니와의 만남을 다시금 결심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네 자매는 아마도 가족이라는 이름에 늘상 지워지게 마련이었던 무게를 새삼 실감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끼리 나름의 가족을 이루었다가 '그래, 원래 가족이라는 그런 곳이었지'하고 새삼 마음이 헛헛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책임감은 없어도 다정한 사람이었음을 인정하고, 어머니가 간절히 원하고 가꾸어 왔을 삶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리고, 그 내심 어려운 분투의 시간들을 서로 보듬어가며 헤쳐 오는 과정. 그 속에서 자매들은 가족이 각자의 책임과 역할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각자가 불완전하고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곳임을 깨달아 갔을 것이다. 마음을 기대고 추억을 공유함으로써, 이 집안에만 머물지 않고 바다처럼 넓고 바람처럼 자유로운 곳이 가족일 수 있음을 비로소 알아갔을 것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Our Little Sister, 2015)


이 바닷바람 같은 이야기 속에서 네 자매를 연기한 배우들은 저마다 네임밸류를 지닌 배우들임에도 친자매와 같은 따스함과 포근함을 시종일관 내보이며 흐뭇한 순간들을 전한다. 첫째 사치 역의 아야세 하루카는 흔들렸던 가족에 대한 상처를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애써 숨기려는 외강내유의 모습을 절제되고 성숙한 연기로 보여준다. 그런 한편 둘째 요시노 역의 나가사와 마사미는 사랑을 주는 데도 인색하지 않고 받는 것도 가리지 않는, 박애주의자로서의 유쾌하고 따뜻한 모습을 활기찬 연기로 보여준다. 셋째 치카 역의 카호 또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처음 생긴 동생에게만큼은 따뜻한 언니이고 싶은 모습을 안정적으로 소화했다. 이런 가운데 넷째 스즈 역을 맡은 히로세 스즈는 선배 언니 배우들의 든든한 지원 위에서 영화 속 가장 빛나는 꽃으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자괴감으로 인해 드리워져 있던 소심과 불안의 그늘이 가족,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서 서서히 걷혀가는 모습, 또래다운 발랄함과 또래답지 않은 사려깊음을 보여주는 그녀의 연기는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뿌듯한 웃음이 얼굴에 남게 한다. 어른들이 남긴 상처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아파하다 결국은 웃음과 온기를 찾아가는 그녀의 모습 자체가 이 영화의 주요한 메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외에도 키키 키린, 릴리 프랭키, 후부키 준 등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 자주 출연했던 배우들의 넉넉한 호흡도, 주연급 배우임에도 이야기 속에 튀지 않고 소탈하게 녹아드는 카세 료, 츠츠미 신이치 등의 모습도 보기 좋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주인공 형제 중 동생을 연기했던 마에다 오시로 군은 훌쩍 큰 모습으로 넷째 스즈와 썸타는 동급생 친구 후타 역을 연기해 또한 반가웠다. 

미숙했던 어른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아이들은 그 어른들이 미처 몰랐던 가족의 진짜 의미를 알아가며 또는 만들어가며 어른으로 성숙해 간다. 첫째부터 넷째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아빠에 대한 기억은 서로와의 대화를 통해 점차 형체를 갖춰 가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나누고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가며 친구들과 이웃들에게로 가족이란 울타리는 더 넓게 뻗어나간다. 무책임이 낳은 시련 속에서도 아이들은 현명했고, 가족의 이름은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의 순간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넓은 품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에서 고레에다 감독이 그리는 가족의 초상은 튼튼하고 굳건하진 않아도 바닷바람처럼 유연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로 아프지 않은 곳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껴안는다. 이렇게 가족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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