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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Dec 31. 2015

만나지 않는 세대란 없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 J.J. 에이브럼스 감독


-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타워즈> 시리즈만큼의 거대한 팬덤을 형성한 영화가 세계적으로 또 있었을까 싶다. 구체적인 시공간을 알 수 없는 광활하고 머나먼 우주를 배경으로 셰익스피어 비극처럼 배배 꼬인 역사가 호쾌한 모험과 화려한 전투신들과 함께 버무려지는 가운데, 분명한 캐릭터를 지닌 주인공들의 미묘한 케미와 기이하고도 사랑스런 외계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더해진 <스타워즈>의 오리지널 3부작의 모습은, 돌이켜 보면 덕후 본능을 유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할 만큼 다양한 요소들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스타워즈> 오리지널 3부작은 세계 대중문화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의 영향력을 남겼지만, 10여년이 지나고 전세계 팬들이 고대하는 가운데 시리즈의 창시자인 조지 루카스 감독이 직접 내놓은 프리퀄 3부작은 의아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아무리 시리즈의 메인 빌런 '다스 베이더'의 탄생 과정을 따라간다지만 '진지진지열매'를 과다섭취한 듯 시종일관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 어색한 연기와 대사로 어설프게 형성되는 인물들 간의 정서, 축축 늘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대단할 것 같았지만 실은 별것 없는 걸로 밝혀지는 이야기, 마냥 꿈결같이 화려하기만 한 스펙터클은 오리지널 3부작이 쓴 전설을 더 아득한 전설로 현대의 관객들로부터 저 멀리 떨어뜨려놓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마 3편 정도만 프리퀄 3부작의 본래 취지에 급속히 가까워지며 오리지널 3부작과의 접점을 찾아가면서 팬들을 유달리 설레게 하는 정도였다. 나 역시 <스타워즈> 시리즈의 명성을 오리지널 3부작보다 이 프리퀄 3부작으로 먼저 접한 사람으로서, 프리퀄 3부작을 보며 '이게 전세계가 그렇게 열광할 정도로 대단한 시리즈인가'하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리즈의 창시자가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이라고 말하듯 현재로부터 멀찌감치 떨어뜨려 둔 것만 같았던 <스타워즈> 시리즈의 역사가 그러나, 현재와 만나는 데 비로소 성공하려 하고 있다. 10년 만에 나온 시리즈의 속편, 30여년 만의 새로운 이야기인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통해서 말이다. 그것도 시리즈를 탄생시킨 장본인, 마스터가 아닌 그 수제자에 의해서 말이다. 



에피소드 6 <제다이의 귀환>까지의 사건이 마무리된 후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는 무슨 일 때문인지 종적을 감추었고, 그 사이 '시스', '제국' 등의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 오던 다크 사이드의 세력은 '퍼스트 오더'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은하계를 폭압적으로 장악한다. 저항군을 이끄는 장군이 된 레아(캐리 피셔)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비행사 포 다메론(오스카 아이삭)을 급파해 루크 소재 파악에 나서고, 포는 중요한 단서가 될 지도를 자쿠라는 행성에서 손에 넣게 된다. 안전을 위해 포는 자신의 충직한 드로이드인 BB-8에게 지도를 맡기지만, 퍼스트 오더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둘은 의도치 않게 흩어지고 BB-8은 이 행성에 살고 있던 고물 수집꾼 레이(데이지 리들리)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다크 사이드의 병사 스톰트루퍼 FN-2187(존 보예가)는 전투에 임하던 도중 갑작스런 각성으로 인해 자신이 처한 무자비한 살상 현장을 맞닥뜨리게 된다. 자신의 현재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그는 마침 포로로 잡혀 온 포를 만나 탈출을 도모하게 되고, 스톰트루퍼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한편 퍼스트 오더의 절대 지도자 스노크(앤디 서키스)의 명에 따라 은하계 점령의 선두에 서 있는 카일로 렌(아담 드라이버)는 마지막 제다이의 행방을 알려줄 열쇠를 쥔 드로이드 BB-8을 지니고 있는 레이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고, 일련의 소란 끝에 레이와 핀은 하루아침에 낯선 동지가 되어 은하계 대결전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다. 

<미션 임파서블>, <스타트렉> 시리즈를 거쳐 오며 J.J. 에이브럼스 감독이 '프랜차이즈 심폐소생의 달인'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 본령으로 돌아가기를 잘 했기 때문이다. <미션 임파서블 3> 때에는 맥락없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쏟아부은 오우삼 감독의 2편으로 인해 망가졌던 시리즈의 정체성을 첩보액션과 팀플레이 요소를 중심으로 되살렸고, <스타트렉: 더 비기닝>과 <스타트렉 다크니스> 때는 TV시리즈용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노화해 갔던 극장판 <스타트렉>에 혈기왕성한 에너지와 넘치는 스릴, 볼거리를 투여하며 시리즈를 다시금 여름용 블록버스터의 대표주자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런 그의 실력은 널리널리 인정받으며 <스타트렉> 시리즈와 <스타워즈> 시리즈를 모두 연출한 전무후무한 감독이 되게끔 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번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 들어간 심폐소생의 정성은 남달라 보인다. 아마도 이 시리즈를 가장 애정했던 게 아닐까 싶게, 에이브럼스 감독은 <스타트렉> 시리즈에서까지도 가열차게 활용했던 자신의 전매특허인 '렌즈 플레어' 효과도 거의 쓰지 않은 채 시리즈의 본디 매력을 복원시키는 데 열과 성을 다한 듯 하다. 



에이브럼스 감독은 원작자인 조지 루카스 마저도 지난 프리퀄에서 거의 버리다시피 했던 <스타워즈> 시리즈 만의 개성을 영화 곳곳에서 되살린다. 이 시리즈가 아니면 보기 힘든 '루카스필름' 로고가 나온 이후 '옛날 옛적, 멀고 먼 은하계에...'라는 자막 너머로 '스타워즈' 로고가 큼지막하게 스크린을 뒤덮고 존 윌리엄스의 오프닝 테마가 위풍당당하게 흘러나오는 고유의 오프닝을 그대로 되살림은 말할 것도 없다. 시리즈의 열성팬이 아닌 사람이 봐도 새삼 가슴 설레는데, 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리즈의 새로운 이야기를 무려 30년이나 지나서 만나는 팬들은 얼마나 가슴 벅찰까 싶었다.  또한 오리지널 3부작이 지니고 있던 유쾌하고 호쾌한 어드벤처의 이미지도 되살렸다. 오리지널 3부작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지만 TV를 통해서 띄엄띄엄 볼 때라도 유머와 활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는데, 이후 조지 루카스가 만든 프리퀄 3부작은 마치 '다스 베이더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가벼워지면 안된다'는 강박이 시종일관 뿌리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연기력 논란에 휩싸여 있는 신인 배우가 주인공이다 보니 더더욱 그 분위기는 '진중함'이 아닌 '어설픈 무게잡기'로 느껴졌었다. 그러나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서는 다시금 주인공에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 외에도 더욱 다채로운 감정들을 불어넣고 넘치지 않게 꾸준히 유머를 투입한 덕분에,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어려운 대사만이 둥둥 떠다니는 게 아니라 격한 감정과 시원한 액션이 부딪치는 모험극의 느낌이 충실히 구현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되살린 이 시리즈만의 오리지널리티는 그 옛날 70~80년대에 나온 오리지널 3부작과의 이질감을 최소화한 복고적인 공기다. 30여년의 시간적인 거리가 있고, 그 사이에 할리우드의 시각효과 기술은 눈에 띄게 발전했으니 오리지널 3부작과 이번 7편 사이의 시각적 이질감이 심할 법도 하다. 그러나 감독이 지난 3부작과 이번 7편 간의 연속성을 지키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결과,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밀레니엄 팔콘 호와 엑스윙의 비행 장면처럼 지금 이 시대의 기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 쾌감을 보여주면서도 그 속에 오리지널 3부작에서 느꼈던 오래되고 적당히 지저분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오리지널 3부작에 이어 이번에도 등장하는 밀레니엄 팔콘호는 21세기에 나온 영화라고 해서 깨끗이 새단장한 게 아니라 여전히 곳곳이 긁히기도 하고 먼지도 적당히 쌓이고 삐걱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밀레니엄 팔콘호가 깨끗이 목욕하고 나왔다면, 한 솔로가 츄바카를 이끌고 여기 들어서며 "집에 돌아왔어"라고 할 때의 감동이 그렇게 크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70~80년대 SF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따뜻하고 쨍한 색감, 필름처럼 살짝 거칠기도 한 화면의 질감도 매력적이고, 액션 시퀀스에서도 사막의 매캐한 모래 바람과 화약 냄새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날로그 기운이 두드러진다. 오리지널 3부작 속의 세계를 요즘 관객들 보기 좋으라고 리모델링하지 않고,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의 세계에 새로운 세대의 관객들과 캐릭터들을 불러들인 느낌이다. 온갖 것들을 CG로 만들어내며 마치 잔뜩 치장한 일러스트마냥 아련하고 샤방한 분위기를 내기에 바빴던 프리퀄 3부작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기분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서 에이브럼스 감독이 보여주는 야심은 이번 영화로 이 거대한 시리즈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거나 어떤 터닝포인트를 마련하겠다는 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감독이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시했을 부분은 앞서 말한 '연속성'이다. 나온지 30년이 지난 영화의 다음 이야기를 풀어가야 되고, 그 사이에 나온 프리퀄이 오리지널 3부작이 만들어놓은 <스타워즈> 고유의 매력적인 분위기를 상당 부분 희석시켜 놓았기에 이 '연속성'은 팬들이 시리즈에 가장 절실히 요구했을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튜디오 입장에서, 그리고 시리즈의 새로운 3부작을 시작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영화가 시리즈의 골수팬들에게만 어필한다고 해도 곤란할 것이다. 꾸준한 상업적 성공을 위해, 그리고 미국 대중문화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이 시리즈의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현대의 어린 관객들에게 이 세계를 성공적으로 소개시켜야 할 의무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에이브럼스 감독은 자신의 색깔을 최대한 죽여가면서 오리지널 3부작의 세계관과 분위기를 철저히 계승함과 동시에, 옛 3부작의 주인공들과 이제부터 시작될 3부작의 주인공들이 손을 맞잡게 하여 정식적인 세대교체의 계기를 마련하려 한다. 

옛 3부작의 주인공이었던 한 솔로 역의 해리슨 포드, 루크 스카이워커 역의 마크 해밀, 레아 공주 역의 캐리 피셔를 다시 이 영화에 캐스팅한 것은 이 영화가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옛 3부작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됐다더라 말로 두루뭉술 때우고 넘어가는 식이 절대 아닌, 그들을 이야기에 깊숙이 개입시킨 뒤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과정을 차근차근 그려내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 전설을 쓴 옛 세대와 새로운 전설을 쓸 새 세대 사이에 다리를 놓는 쌍제이 감독의 태도에는 전설을 숭배했던 팬으로서 그에 대해 갖는 영광스러운 마음과 존경심, 그 전설을 이어나갈 키를 쥔 사람으로서 전설이 전설로만 끝나지 않고 현재로 이어지길 바라는 책임감 같은 것이 담겨 있다.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위치에 핀, 레이, 포 다메론 등 새로운 등장인물들을 내세우되 그들과 동행하는 옛 3부작 주인공들의 과거 행적을 마치 전설처럼 어렴풋이 언급하면서, 오래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함과 동시에 새롭게 스타워즈 세계에 입문하는 어린 관객들의 호기심 또한 북돋운다. "전설인 줄 알았던 그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이에요?"라며 놀란 마음으로 한 솔로에게 물어보는 레이의 모습은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스타워즈 세계에 발을 들이는 관객들의 반응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신구 배우들의 조화는 무척 보기 좋다. 한 솔로 역의 해리슨 포드는 30여년의 세월을 지나 돌아온 역할임에도 어제 연기한 듯 그 때 그 넉살과 거만함을 살려내며 츄바카와의 여전한 호흡도 과시한다. 레아 공주 역의 캐리 피셔는 오랫동안 활동 모습을 보기 힘들었기 때문인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등장했지만, 공주에서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갖추게 된 품격과 단호함이 살아있었다. 루크 스카이워커 역의 마크 해밀은 오리지널 3부작 이후 부진했던 활동에 대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얼마 전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의 우스꽝스러웠던 이미지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엔딩을 짧지만 강력한 포스로 장식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 중에서는 레이 역의 데이지 리들리와 핀 역의 존 보예가가 각자의 개성을 임팩트 있게 주장한다. 어린 키이라 나이틀리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데이지 리들리는 아마도 '최초의 여성 제다이'가 될 레이의 강단과 모험심을 믿음직스럽게 연기하고, 핀 역의 존 보예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청년의 모습과 예상보다 더 농도짙은 유머감각을 고루 소화한다. 에이스 파일럿 포 다메론 역의 오스카 아이삭이 보여주는 선하고 남성적인 히어로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오리지널 3부작의 한 솔로 같은 쿨가이 캐릭터가 되지 않을까 사뭇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이번 편의 메인 빌런인 카일로 렌 역의 아담 드라이버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번 편이 새로운 3부작의 시작임을 감안한다면 아직은 더 가다듬어야 할 '풋풋한 어둠의 기운'을 품은 인물의 모습을 비교적 입체적으로 잘 표현한 듯 하다. 더구나 기존의 작품들에서 늘 보여줬던 콧수염을 깨끗이 밀고 나오는 걸 보니 역할과 어울릴까 싶었던 생각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 

어쩌면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에이브럼스 감독에게 크게 두 가지 의미인지도 모른다. 시리즈의 열혈 팬으로서의 그에게 이 영화는 역사적인 시리즈의 지휘봉을 넘겨받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가기에 앞서 오리지널 3부작으로부터 그 영광의 왕관을 물려받는 엄숙한 의식처럼 완성한 영화였을 것이다. 한편 불특정 다수의 전세계 관객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여정을 이끌어가게 된 시리즈의 수장으로서의 그에게, 이 영화는 이미 나름의 확고한 지형을 구축한 세계에 진입장벽의 걱정 없이 새로운 세대를 발 들이게 해야 할 초대장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영화는 오리지널의 영광을 이어받는 엄숙한 의식으로서도, 위대한 세계와의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는 초대장으로서도 거절하기 힘든 모양새로 완성되었다. 나 같은 새 세대의 입장에서만 봐도, 이 영화는 이후 이어질 <스타워즈> 시리즈를 기대케 함과 동시에 오리지널 3부작을 '말로만 듣던 전설 속 이야기'로서 뒤적여 보며 존경어린 태도로 바라보게 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로 인해 앞으로 이어질 새로운 <스타워즈> 3부작은 일단 우수한 성적으로 제다이 자격을 갖춘 듯 하다. 이제는 남은 이야기들을 통해 제다이 마스터로 우뚝 서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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