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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Jan 17. 2016

증오의 역사가 격돌하는 곳

<헤이트풀8> -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헤이트풀8>(The Hateful Eight, 2015)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왜 다작을 하지 않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그의 영화는 나올 때마다 크나큰 기대를 품게 하지만 그만큼 볼 때마다 나름의 도전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가 늘 전에 없던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 없지만, 그 점을 느끼기까지는 두 개의 만만치 않은 진입장벽이 있다. 첫번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다다. 그의 영화를 <킬 빌>을 통해 처음 접한 나는 다음 작품인 <데스 프루프> 때부터 그 특성을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한번 자리잡고 대화를 시작하면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 대화 장면들이 실은 인물들 간의 핑퐁 게임 같은 긴장관계를 수시로 쥐락펴락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는 것을 느끼는 건 그 다음 일이고, 일단 보통의 영화 이상으로 기나긴 대화 장면을 처음 접할 때는 사뭇 당황스럽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인정사정 없는 폭력 장면은, 대화에 신경 쏟느라 못다 푼 폭력에 대한 한을 사정없이 풀겠다는 마음이 담긴 듯 폭력에 약한 관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들로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분명 '오락영화', '장르영화'로 규정되지만 들고 나는 게 쉽지만은 않은 확고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타란티노의 신작 <헤이트풀8>은 그 중에서도 새삼 도전적이다.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인상은 전작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 이은 또 다른 서부극, 그리고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을 연상시키는 기본 설정으로 인해 그리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타란티노는 자신이 지난 작품들에서 시도했었던 각종 영화적 요소들을 한 곳에 모으고는, 그것을 기시감 느껴지는 종합선물세트처럼 벌여놓지 않고 만지작만지작 재조합을 한다. 그 결과 만나는 것은 타란티노의 영화가 이런 얼굴을 보여줄 수도 있구나 하는 새삼스런 새로움이다. 물론 여전히 그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순간들이 넘쳐나지만, 본 적 있는 듯한 겉모습 안에서 본 적 없는 속살을 꺼내 보이는 타란티노의 재간은 여전히 생동감 있다.


<헤이트풀8>(The Hateful Eight, 2015)


와이오밍의 어느 겨울, 레드 락 타운이라는 마을로 죄수 데이지 도머구(제니퍼 제이슨 리)를 이송해 가던 교수형 집행힌 존 루스(커트 러셀)의 마차는 설원 속에서 마커스 워렌(사무엘 L. 잭슨)이라는 현상금 사냥꾼을 만난다. 마커스는 자신이 잡아 족친 범죄자들과 함께 마차에 몸을 싣고, 마차는 이내 이제 갓 보안관이 된 크리스 매닉스(월튼 고긴스)를 만난다. 남북 전쟁 때 자기 가문의 활약에 대해 늘어놓는 크리스의 수달를 뒤로 하고 마차는 거세진 눈보라를 피하려 산장을 겸한 '미니의 잡화점'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주인인 미니는 안보이고 네 명의 또 다른 손님들이 와 있다. 영국 억양을 쓰는 오스왈도 모브레이(팀 로스), 카우보이 행색의 조 게이지(마이클 매드슨), 라틴계에서 온 듯한 밥(데미언 비쉬어), 그리고 나이든 연합군 장교 샌디 스미더스(브루스 던)가 그들이다. 루스가 도머구에게 걸린 큰 현상금은 자기 것이니 넘볼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밤이 깊어간다. 그런데 이 8인 외에는 누구도 들어온 적 없는 잡화점 안에서 의문의 독살 사건이 벌어지고, 서로에 대한 8인의 분노 어린 불신은 극도로 깊어져만 간다. 

웬만해선 2시간 안으로 찍는 법이 없는 타란티노의 영화는 대체로 호흡이 긴 편이지만, <헤이트풀8>은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호흡이 길다. 기존의 타란티노 영화는 끝날 줄 모르는 대화가 격렬한 물리적 충돌로 귀결되는 식의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구조였던 데 반해, <헤이트풀8>는 유사한 장면 구성이 여러차례 반복되지 않고 더 큰 몸집으로 한번만 일어나는 식이다. 더욱 긴 대화가 이어진 끝네 더욱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호불호가 갈리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 중에서도 <헤이트풀8>은 그 정도가 좀 더 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반 100분동안 다양한 인물 구도 안에서 벌어지는 대화는 긴장감을 천천히, 그러나 느슨해지지 않게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저마다 떳떳하지 못한 행색을 하고 있는 인물들은 그만큼 새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필요에 의한 소통과 본능적인 경계를 병행하고, 그래서 그들이 주고 받는 말 속에는 보이지 않는 가시가 숨어 있다. 여기에 몇몇 인물들은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기도 하고, 그 결과 서로 낯선 이들인 줄 알았던 인물들이 알고보니 모종의 인연(혹은 악연)을 맺고 있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만큼 타란티노가 굳이 많은 시간을 들여 전개하는 인물들 간의 대화 장면은 그가 그저 수다떨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극적 긴장감의 완급을 조절하는 노련한 도구로서 대화를 활용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헤이트풀8>(The Hateful Eight, 2015)


그리고 이렇게 기나긴 대화가 이어진 끝에, 후반 60분 동안에는 더 오랫동안 참아왔던 만큼 더 강력한 폭발의 향연이 펼쳐진다.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면서 인물들은 말과 더불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충돌하기 시작한다. 타란티노 영화에 등장하는 총알들이 늘 그렇듯 이번에도 총알은 대포알처럼 사람들을 무지막지하게 강타하고, 수 차례의 반전이 번개처럼 장내를 휩쓸고 지나간다. 더구나 영화가 내내 '미니의 잡화점'이라는 산장 안과 주변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폭력의 밀도는 더욱 높은 느낌이고 흩뿌려지는 피의 농도도 유독 짙게 느껴진다. 이렇듯 타란티노는 <헤이트풀8>의 특별히 긴 호흡을 통해 긴장감을 쌓아올릴 때의 정교함과 이후 한번에 터뜨릴 때의 대담함을 함께 과시하며,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손에 꼽힐 만한 연출의 장인임을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주지시킨다. 용감하고 대담할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탄탄한 창작자임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런 옹골찬 완성도 위에서 타란티노는 이번에도 자신이 활용하고픈 형식, 배우들, 이야기를 거침없이 직조한다. 첫번째로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자신이 어린 시절 TV와 비디오, 극장에서 숱하게 보았을 고전적 서부극의 형태로 구현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 대표적인 장치가 울트라 파나비전 70 렌즈와 70mm 필름을 사용하여 2.76대 1이라는, 이제는 어느 극장이 맞춰줄 수 있을까 우려스럽기까지 한 비율의 와이드 시네마와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다. 우선 이 영화가 자랑하는 70mm 필름의 와이드 스크린은 어릴 적 '주말의 영화'에서 봤을 법한 숱한 고전영화들이 활용했을 그 수준의 화면비다. 현재의 극장 시스템이 맞춰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애초에 개의치도 않은 채, 타란티노는 자신이 어릴 적 극장에서 봤던 그 전설적 영화들의 형식을 자신이 직접 구현한다는 사명감 내지는 벅찬 감동에 휩싸였을 것이다. 실제로 <헤이트풀8>은 얼핏 작은 규모의 밀실 스릴러로 보여도 산장 밖의 설경이 자아내는 스펙터클이나, 다양한 인물들이 쉴새 없이 오가는 산장 안의 구조 등 눈을 움직여야 할 곳이 많은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에 과거 '스파게티 웨스턴' 음악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2015년에 나온 이 영화에 처음 만나도 '말로만 듣던 바로 그 영화!!' 같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고전미를 부여한다. '씨네키드'가 '거장'이 되면 우리 관객들은 이런 유례없는 결과물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헤이트풀8>(The Hateful Eight, 2015)


이처럼 자신이 우러르던 고전 웨스턴의 형식을 몸소 재현한 곳에서, 타란티노는 뚜렷한 개성을 지닌 연기파 배우들을 몰아넣고 피튀기는 연기 대결을 벌이게 한다. 사무엘 L. 잭슨, 마이클 매드슨, 팀 로스, 커트 러셀 등 그의 대표작들로부터 으레 연상되는 페르소나도 있고, 브루스 던, 월튼 고긴스 등 몇 차례 작업을 통해 그와 익숙한 배우들도 있고, 제니퍼 제이슨 리, 데미언 비쉬어, 채닝 테이텀 등 그와의 작업이 처음인 배우들도 있다. 그러나 저마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며 존재감을 과시하기는 매한가지다. 모두가 불편하고 검은 속내를 지닌 의문스런 인물들을 흥미롭게 연기하는 가운데, 사무엘 L. 잭슨, 제니퍼 제이슨 리, 월튼 고긴스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증오의 8인' 중 유일한 흑인으로 남북전쟁 즈음의 팍팍한 역사를 혈혈단신 헤쳐오며 세상을 향한 강한 증오를 품은 마커스 워렌 역을 연기한 사무엘 L. 잭슨은, 아무리 완성도 편차가 큰 영화들을 다작으로 작업하는 배우라 한들 그는 결국 이처럼 마음이 잘 맞는 감독의 작품 속에서는 깊고 진한 아우라를 발하는 명배우일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제니퍼 제이슨 리는 수갑이 채워진 사형수이지만 그 누구보다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데이지 도머그 역을 이른바 '약빤 연기'로 강렬하게 그려낸다. 한동안 TV 시리즈에 주로 출연해 오다 최근 다시 활발히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그녀는 이번 역할로 연기를 향한 갈증을 일거에 해소하는 듯 하다. 이름은 낯설지만 얼굴은 낯이 익을 배우 월튼 고긴스는 전쟁 속 자기 가문의 역사에 도취되어 있다 생존 앞에서 얄팍하게 태도를 바꾸는, 비열한듯 어리석은 보안관 크리스 매닉스 역을 능청스럽게 연기하며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여기에 당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과 장소에서 등장할 채닝 테이텀의 존재감도 잊으면 곤란하다. 

이처럼 고전영화를 향한 고집센 오마주, 품격과 에너지를 동반한 배우들의 연기 덕에 타란티노는 <헤이트풀8>의 모양새를 '폭주'를 넘어선 '오케스트라'의 형태로 만들어놓았다. 이렇게 자리잡은 영화 위에서 그는 비로소 이전에 좀체 볼 수 없었던 이야기의 실험을 감행한다. 갈수록 통쾌해지는 게 아니라, 갈수록 어둡고 불편해지는 이야기로의 실험을 단행하는 것이다. 바깥으로는 꼼짝도 못할 기상상황에서 벌어지는 웨스턴 밀실 추리극이라는 외형적 원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인물들의 관계와 이야기가 물고 들어가는 시공간적 배경 때문이기도 하다. '증오의 8인'이라는 제목처럼, '미니의 잡화점'에 모여든 8명의 인물들은 단지 재미삼아, 치기로, 혹은 습관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분명히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넘어선 당대의 역사적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타란티노가 최근작들을 통해 보여온 역사에 대한 관점의 연장선이기도, 혹은 또 다른 변형이기도 하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2차 대전 무렵의 나치 정권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했고,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노예제도에 부끄럼없이 의존해 왔던 이들에게 피의 일격을 가했던 타란티노는 이번 <헤이트8>에서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가져온다. 이렇게 짙게 드리워진 역사의 그늘 위에서, 타란티노는 여전히 끈질긴 수다 게임과 대포알 같은 총알 세례를 펼쳐내지만, 눈여겨 볼 만한 건 이번에는 그게 꼭 카타르시스만을 위한 건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헤이트풀8>(The Hateful Eight, 2015)


물질, 혈연, 인종 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초면인 줄 알았던 8명의 사람들은 나름의 관계와 그로 인한 증오심을 품고 있다. 길고 긴 대화를 통해 그 관계의 역사가 한꺼풀씩 벗겨지고,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 관계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증오심은 폭발한다.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을 지배하고 있던 물질, 혈연, 인종 등 갖은 요인들이 유발한 증오와 분노의 감정은 타란티노에 의해 이 좁디 좁은 산장 안에 몰아넣어진다. 피할 여지가 없는 이 공간 위에서 각자의 증오와 분노는 서로 짐승처럼 물고 뜯기 시작한다. 그 어떤 카타르시스도, 미래를 향한 희망도 담보로 하지 않은 클라이맥스의 핏빛 사투는 어느새 보통의 타란티노 영화가 결말부에 선사하던 짜릿한 쾌감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쾌감보다는 절박한 몸부림 같고, 시원하고 화끈하기보다는 애처롭고 안타깝다. 8인의 생명이 때로는 무척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허망하게 하나둘씩 지워지는 풍경은, 뒤돌아보면 부질없는 이유에서 출발해 몇몇 페이지를 아예 피로 적셨던 미국 역사의 그림자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한 온갖 형태의 증오를 한 방에 가둔 채 서로 피를 보게 하는 것은, 어쩌면 타란티노가 미국이 지닌 '증오의 역사'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찰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갈등의 시대, 평화의 의미에 관한 성찰이 낳은 나름의 결과이기도 할 영화의 엔딩은 생각지도 못하게 웃기고도 서글프다.

말하자면 <헤이트풀8>은 타란티노가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형식과 배우들을 집약시켜 자신에겐 가장 모험적이라 할 만한 이야기를 풀어낸 영화다. 필름 느와르, 사무라이 영화, 카 액션영화, 서부극 등 장르를 깊이 탐구하고 그것을 새롭게 변형할 줄 아는 자신의 재능을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희미하던 인물들 간의 관계선을 서서히 또렷하게 드러내는 대화를 지나, 숨을 몰아쉬어야 할 만큼 임팩트가 강한 폭력으로 밀어붙이는 이 '피칠갑 사회극'은 타란티노가 영화의 장르를 넘어서 역사와 동시대를 주무르는 내공까지 갖추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이후 행보는 여전히 예측불허인 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눈과 귀와 머리가 번쩍 트이는 자극을 넘어 마음까지 관통할 충격파를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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