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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Mar 16. 2024

다정을 열 개 모으면 용신이 나타날까?

  새학년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6학년 아이들과 일년을 보낸다. 학기초에는 우리 반에서 필요한 여러가지 약속들을 정하며 일년살이를 나눈다. 많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학급보상제도를 실시한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제도다. 나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편이다. 올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개학하고 며칠 지나서 한 아이가 쉬는 시간에 책상위에 올려두었던 펜통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열 몇개의 색연필과 사인펜들이 떨어졌고, 아이는 주우려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런데 주변의 아이들 서녀명이 일어나서 같이 주워주었다. 친한 친구도 아닌데, 누가 요청하거나 시킨 것도 아닌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칠판에 '다정'이라고 적었다.

 "얘들아, 방금 선생님이 어떤 장면을 보았어. 사람이 사람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모습. 이유없는 다정함을 베푸는 모습에 감동 받았어. 그래서 다정의 보석을 하나 주고 싶어."

 그리고는 칠판에 작은 자석 하나를 붙였다. 무슨 말인가 하던 아이들은 내가 본 장면을 말해주자 같이 주워준 친구들을 향해 '오오-'하며 감탄했다. 교실의 공기가 따듯하게 데워지는 것 같았다.


  이틀 쯤 뒤였다. 한 아이가 몸이 아파 조퇴를 했고, 그 아이가 해야할 역할을 짝이 대신 해주었다. 내 것과 네 것을 철저하게 경계짓는 것을 가르치면서 때로 선을 넘어 다가가는 것을 가르쳐야할 때가 참 어렵다. 그런데 아무 댓가없이, 그야말로 봉사해준 친구의 마음이 고마워서 또 내 마음의 다정 스위치가 켜졌다. 아이를 향한 폭풍칭찬과 함께 보석 하나 더 적립.


  우리 학교는 교실에서 급식을 해서 먹고나서 뒷정리를 잘 해야한다. 급식차를 치우고 정리를 했는데, 수업 마치고 인사할때 다시보니 보조책상에 밥풀이 붙어있었다. "저런, 급식 당번이 안 치웠네. 다음에는 잘 치우자."라고 인사하고 아이들을 보냈는데, 마지막에 나가는 아이가 조용히 물티슈 한 장을 가져와서 책상을 닦았다. 아, 조용히 닦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에 또 다정포인트가 쌓였다. 벌써 3개.


  다음날 아이들이 칠판을 보고 왜 또 하나 더 붙었는지 붙길래, 사연을 얘기해줬더니 박수를 친다. 체육시간에 다치지 않고 다투지 않고 다같이 즐겁게 놀이활동을 하고 와서 또 보석을 붙였다. 이제는 안되겠다. 내 마음이 다정으로 가득 차기 전에 아이들과 약속을 해야겠다.


  자치활동 시간에 다정 보석이 자꾸 쌓이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회의를 열었다. 아이들은 10개가 모이면 과자파티를 하자, 영화를 보자, 글쓰기면제권을 줘라, 배움일지 하루 쉬기는 어떠냐, 10개 가까운 의견을 냈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과자 먹으며 영화 보기를 만장일치, 전원찬성으로 결정했다. 아이들의 결정을 듣고 어떤 영화를 어떤 상황에 볼 수 있는지 미리 조건을 제시했고 아이들도 동의했다.


  드래곤 볼처럼 다 모으면 용신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건 아니지만, 우리 반에서는 서로를 향한 다정함을 목격할 땐 보석이 빛나고, 포인트가 쌓이고, 스위치가 켜진다. 이유없는 다정함을 베풀고 받아들이고 서로의 선한 영향력을 키워나간다. 교실에서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든 현장에서 그렇게 다정하면 좋겠다.


  어제는 출근길에, 교문 앞에 버려져있던 쓰레기를 주웠다. 오늘은 또 누구에게 어떤 다정함을 전해줄까?

나도 매일의 다정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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