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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Mar 23. 2024

벌거벗은 살들의 다정함

겨울이 끝나기 전, 이미 오십을 넘긴 큰 딸과 곧 오십이 될 작은 딸이 팔순의 노모를 모시고 온천에 다녀왔다. 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신북온천. 물도 좋고 공기도 좋은데 다른 관광지 온천에 비해 여유로워서 할매할배들이 즐겨 찾는다는 곳이다. 동생이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아침부터 포천으로 달렸다.


어릴 때, 일주일에 한 번 주말 아침에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가곤했다. 독한 샴푸가 눈에 들어가 따갑고, 때수건에 피부가 벌개지게 밀리고, 숨막히고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는 것도 다 싫었다. 그래도 목욕탕가는 걸 기다렸던 까닭은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목욕하는 동안은 온전히 엄마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검고 뽀글거리는 머리를 하고 아직 눈가에 주름이 잡히지 않은 젊은 시절의 엄마 말이다.


그때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중년이 되어 엄마와 함께 몸을 씻는다. 내 자식 챙기며 살다보니 겨울에 부모님 모시고 온천 한 번 가는게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겨우 시간을 맞춘터라 세 모녀 모두 마음 속에 설렘이 가득했다. 탈의실에 가서 옷을 벗고 보니 염색한 머리와 화장에 가려있던 내 혈육의 민낯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불룩하게 늘어진 뱃살도, 늘어지기 시작하는 젖가슴도, 가로와 세로로 번져가는 목주름과 눈가 주름 모두 비슷했다. 근육이 다 빠져 앙상하게 마른 다리의 엄마를 양 옆에서 두 딸이 부축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훅, 덥고 습한 공기가 문을 열자마자 끼쳐왔다. 탕안에는 오전의 햇살이 한가롭게 비춰들고 있었고 물 쏟아지는 소리 사이로 조곤조곤한 누군가들의 말소리가 울리며 섞이고 있었다. 엄마의 굽은 등을 닦아드리고 조심스레 머리도 감겨드렸다. 엄마는 "혼자 할 수 있는데..."라고 하시며 귀찮은 듯 말했지만 딸들이 자기 몸을 닦아주는게 싫지 않은 눈치였다. 변함없이 부드러운 엄마의 살결을 느끼며 비누칠을 끝내고 탕에 들어갔다. 따뜻한 온기와 물의 편안함에 몸이 녹아들었다. 이 맛에 온천을 즐기는거겠지.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었다. 욕탕안에는 늙은 엄마를 모시고온 중년의 딸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딘가 닮은 얼굴을 한 여자들, 비슷하게 처진 둥그런 몸매의 여자들이었다. 간혹 어린 아이를 씻기는 젋은 엄마들도 보였고 모녀 삼대인 듯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친구들끼리 온 듯한 초로의 부인들도 몇몇 보였다. 남자욕탕의 풍경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탕 안에는 끈끈한 관계망이 여기저기에 펼쳐진 것 같았다. 그 속에 나도 껴 있었고.


세신사 분에게 엄마의 세신과 마사지를 예약하고 동생과 둘이 잠시 노천탕에 나가보았다. 시원하고 찬 공기가 적당이 데워진 몸에 기분좋게 다가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주변 어르신들의 대화가 들렸다.

"거는 몇 살이셔?"

"일흔 아홉"

"젊네. 동안이야. 좋을 나이다."

"언니는 몇 살이신데?"

"나? 여든 셋."

"혼자 왔어? 나는 친구랑 왔는데. 허리가 아파서 좀 지질라고."

허리가 아프면 어느 병원이 좋고 뭐를 먹으면 괜찮다, 아니다 그거보다 뭐가 좋다, 내가 전에 어느 병원에 갔었는데 의사가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머리만 밖에 놓은 그야말로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참 다정해보였다. 누구라도 편하게 말을 걸고 누구라도 편하게 대꾸하게 만드는 맨몸의 마법, 온천의 마력이다.


목욕을 끝내고 근처 버섯샤브집에가서 채소와 버섯이 가득한 건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노곤해진 몸에 따끈한 국물을 들이켜니 햇살에 녹아버리는 봄눈이 된 기분이었다. 근교에 호젓하게 멋을 들여 지은 카페에 들러 향긋한 커피도 한 잔 마시니 어느덧 오후가 된 휴일이 너무 아쉬웠다. 피붙이와 살결을 맞대고 마음도 나누는 시간. 한없이 다정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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