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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Mar 20. 2017

 해도 해도 늘지 않는 독일어 잊혀 가는 모국어

Hauptspeise 본 요리 30.



얼마 전 시내에서 한 아리따운 한국 처자를 만났다.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 이 한국 학생 은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같이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

국인 친구들과 잠깐 어학원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무언가  꿈을  가지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그들에게서 만 풍기는 상큼하고 활기찬 기운이

느껴져 보는 사람도 저절로 싱그러워진다.

그 덕분에 나도 마치 잊은 듯 오랫동안 입지 않고

옷장 안 한쪽 구석에 두었던 옷들을 꺼내 보며

내게 이런 옷이 있었던가? 라며 새삼스레  먼지 털어 입어 보는 것처럼

독일 에 처음 와서 독일어를 배우던 그때가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래전 꽃다운? 나이에 (나이 만 꽃 다웠다는 이야기다) 여러 개의 가방을

이고 지고 공부해 보겠다며 머나먼 곳 일가친척 아는 사람 한 명 없던

독일 땅에 그야말로 용감무쌍하게 뚝 떨어져서 독일어를 시작하던 그때는

참 여러 가지가 막막하기도 하고 설레 이기 도 했었다.

인터넷 없던 응답 하라 시대였던 그시절

지금처럼 한국에서 검색으로 독일어 어학원, 지낼 방 등을 알아볼 수 없었다.

독일 문화원 등을 통해 아주 최소한 의 정보와

유학 다녀온 분들에게 귀동냥해서 얻어 놓은 작은 정보들이 다였는데

당시 에도 비싸기로 소문난 괴테 어학원으로 방 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하나로

덜컥 끊고 와 놓고는 그 낯선 환경과 익숙하지 않은 독일어에 처음부터 주눅이 들기 시작했었다

결정적 으로는 어학반을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한 동안 고생을 면치 못했었지만 말이다.

그 당시 한 명 의 숫자가 모자라서 아무나 넣다 보니

운 나쁘게?그 반에 내가 걸려 들어갔던 것 같다.

왜냐 하면 그 반은 각 나라 별로 뽑은 국가 장학금으로 괴테 어학원에 지원받아 서 온

경쟁률 몇 만대 일 을 뚫고 왔다는 국비장학생 들 특별반이었다

그 반에서 난  계속  쭉~~ 이티였다.

서점에 나와 있는 요즘 독일어 어학 책들..

어려서부터 그래도 많이 듣고 자란 영어 와는 달리 내게

독일어는 아주 낯설 고도 어려운 언어였다.

그래서

유학생 들 사이에서는

"해도 해도 늘지 않는 독일어, 멀어져 가는 영어, 잊혀 가는 모국어,당최 알 길이 없는 불어 "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회자되기도 했었다.

언어는 무엇이든 자꾸 듣고, 말하고 사용해야 느는데 어학 기관에서 같이 공부

하던 외국인 친구들끼리는 서로가 비슷한 처지이다 보니

서로의 짧은 독일어가 금방 이해가 되면서 단어 한두 마디 로도

아주 심오하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게다가 괴테 어학원에서 내가 지금 일 하고 있는 VHS라는 문화센터로

어학 코스를 옮기고 보니

독일 온 지는 오래돼서 말은 제법 잘 하는데 문법 이랑 읽고 쓰는 것이

잘 안돼서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여기나 저기나 내가 치이기는 매 한 가지였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이 아마도 그 당시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이 그러했듯

틀리는 것이 싫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보니 독일어가 날이 가도 많이 늘지가 않았다.


요즘 독일어 어학 책들 중에 독일어를 처음 시작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재 .

물론 게 중에 어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 경우는 완벽하려는 마음이 앞서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학 수업 중에도 조용히 입 다물고 있기가 쉬웠다.

거기에 비해 인도네시아 등의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 중에는 틀리던가 말던가

돼도 아닌 말이여도 열심히 떠들어 대고는 했었다. 그러나 그게 모이면 크더라는 것이다.

어느새 그들은 독일어를 나보다 훨씬 잘하고 있었다.

그런 독일어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과 스트레스 때문에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내가 마구 독일어를 쏟아내고 있었다. 미친 듯이 말이다.

(지금 당신도 그런 꿈을 꾸고 있는가? 머지않았다 조만간 독일어 가 쏙 쏙 들리는 날이 올 것이다.)


간신히 어학 과정을 마치고 막상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이전까지 어학원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스트레스 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의 살기 위한 서바이벌 독일어 맨땅에 헤이딩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

어학원 수업이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교사들도 거기에 맞추어

천천히 또박또박 수업을 진행해 주었고, 교재도 단계별이었지만

대학 수업이야, 독일 아이들과 섞여 앉아 그 애들 하는 데로 따라가야 하는데

한 동안은 멘붕 상태였고 과제 엉뚱하게 해 놓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며

마치 엄청나게 고민이나 한 후 새로운 과제를 해온 것처럼 뻥을 날리며 우겨 대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같은 학기, 같은 작업실을 쓰는 아이들 중에 유일한 외국인 이였던

덕분에? 나의 짧은 독일어를 매일, 매 순간 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당연히 독일 아이들 속에서 나의 독일어는 우습기 짝이 없었을 테지만

나는 살기 위해 어찌 되었든 독일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소심한 나의 독일어가 하나 둘 늘어 가기 시작했고 내성적이던 나의

성격마저 점차 바뀌어 가고 있었다.

사실, 내 독일어가 느는 속도보다 나의 이상한 독일어에 적응하는 독일 아이들의 속도가

빨랐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같은 작업실을 사용하던 친구들 중에 필립이라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덩치도 커다랗고 작업 성향도 나와는 상반되던 그 아이는

아주 작은 붓으로 한점 한점 점을 찍듯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바로 그 옆에서 나는 주로 페인트 칠 할 때 사용되는 커다란 붓으로 문짝 만한 캔버스에

벅벅 그려 대고 있었다.

그런데 요것이 내가 외국인이라고 은근 무시하는 데다가 같은 공간 바로 옆 자리에서 작업하면서

사사껀껀 시비를 거는 것이다.

테크노 비수 꾸리 한 음악을 틀어 대며 나를 자극하던 필립을 위해 나는  기꺼이 망치로 병을 깨 부수며

작업을 해 주셨고, 그 소리에 필립이 돌아 버리기 직전이던 어느 날

우리 학교의 전설적인 교수님 이시던 롭숄테 교수님의 수업 시간 그분의 질문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유일하게 내가 답을 했었고 무척이나 흡족해하셨다.


그날 이후 필립은 독일말도 이상하게 하고 작업도 이해할 수 없는 것 만 해 대던 짜리 몽땅한 동양 여학생이

존경하는 교수님의 인정을 받게 되자 달리 보이기 시작했었나 보다,

작업 실을 같이 쓴 지 한 학기가 넘어서 처음으로 서로의 작업에

대해 허심탄 외한 대화를 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내가 틀어 놓은 수봉이 언니의 "그때 그 사람"에 발을 까딱이며 필립이 붓으로 한점 한점 찍어 작업을 하고 필립의 테크노 비스꾸리 한 지랄발광 음악에 내가 작업을 집중해서 할 수 있게 됐을 즈음

어느덧 나의 독일어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20년이 넘게 독일어를 쓰고 있지만 아직 내게도 남의 나라 말이며 할 때마다 어려운 것이 독일어다.

그러나 한 가지 이제는 틀려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속으로는 읍쓰 또 틀렸구먼 ~할지라도

그리고 새로운 표현법, 문장 또는 속담 등은 적어서 들고 다니며 꼭 그날 몇 번을 써먹어서

입에 붙도록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낯설고 해도 해도 늘지 않는 독일어 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독일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된다는 찌르르한 감동의 쓰나미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날을 위하여 지금 도 낯선 땅 어느곳에서 머리에

김 나도록 낯선 언어를 배우고 계실 한국 유학생 들을 힘차게 응원 하며

첫째도, 둘째도, 틀려도 괜찮으니 열심히 독일어로 말하고 독일 사람들과 자주 만나 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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