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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Aug 30. 2016

더위를 잊게 했던 공포의 2시간 30분

Hauptspeise 본요리 20.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벙커 안에서

독일에서는 여름 이 되면 유치원, 학교 , 직장에서

또는 각종 모임에서 다채로운

sommer fest 서머 파티 들을 한다.

그 서머 파티 들의 내용은 주최되는  과

구성 원에 따라 해마다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그릴 파티가 될 수도 있고 산책 겸 피크닉 일 경우도 있고 운동회 형식 이 될 수도 있으며

음악회 나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얼마 전

남편의 직장 동료 들과 가족 동반 단합 대회 겸

서머 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편안한 신발과 가벼운 옷차림 으로 만나 기로 했다는 거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는 비밀이라는 거다.

주관한 사람만 알고 있는 서프라이즈 서머 파티 라나?


그래서 나는"아 이번에는 어디 산책을 가나 보다" 하고 산행할 때 신는 신발을 꺼내 신고 막내와 함께

 남편을 따라나섰다.

이 동네에서 산책이라 하믄 말이 산책이지 산속의 숲을 2시간 정도는 너끈이 걷는 산행 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해서 어디 산으로 가겠지 싶어 얇은 잠바까지 챙겨 들고 모처에 도착해서 파티를 주관한 인솔자를 따라 파티 장소에 도착 해 보니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벙커 앞 인 거다.


순간 이 안에서 뭘 하려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누군 가를 잠시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에 남편을 따라 이 사람 저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가이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서있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어디선가

낯선 차 한 대가 터프하게 멈춰 섰다.

그리고 는


일반인

주차 금지 구역에 지네 집 앞에

차를 대듯

휙하니 갔다 대던 차 안에서

어디서 일 하다 온 듯 보이는  

작업복 차림의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파티를 주관했던 남편의 동료

와 인사를 나누고

손에 든

여러 개의 열쇠로  

굳게 잠겨 있던 벙커의 문을 열더니

우리를 그 안으로 안내했다.

이유를 몰라 눈만 껌뻑이며 서있던

사람 들은

파티 주관자인 남편 동료의

"자 갑시다 " 하는 말을 신호 삼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환하던 밖에서

앞으로 비추어 주는

커다란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더듬더듬

들어가던

그 어두침침하던 입구는

마치

영화에서처럼

어디선가 박쥐가 날아든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빛이 단절된 동굴 같은 느낌이었다.


앞에서 손전등으로 길을 비춰 주던

남자 가

 벙커 안의 전기를 켜니

아까 보다는 훨씬 밝아져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서 사람들은

깜짝 파티가 시작되기를 기다 렸다.


작업복 차림의

남자는 진중한 목소리로

우선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소방관이며 이곳 벙커를 관리하는

대장이고

 조난 또는 위기 상황에

구조 대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이곳 벙커

안내를 맡았다고 했다.

작업복 차림의 남자에서

안내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그의 설명으로

우리가 서 있는

2차 세계대전 때 벙커로 이용되었던

이곳은

평상시 밖에서 지나다니며

보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곳에서 길을 잃으면

혼자 서는

나갈 방법이 없다는 거다

안 그래도 급 오싹해

분위기에서

 안내자 가

예전에 혼자 벙커 안을  

순찰하다가

갑자기

그 안이 정전이 되었는데

손전등도 없고

핸디도 배터리가 바닥난 상태 여서

연락도 할 수 없고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칠흑 같이 어두운 벙커 안에서

혼자

언제 올지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구출되기 만을

기다리며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날의

 5시간이 본인 인생에

가장 긴 기다림 이였노라

담담히 이야기하던 안내자는

그때 이후로는

벙커에 올 때면 언제나

습관처럼

주머니 많은 작업복에

손전등 3개와

배터리 꽉 찬 핸디 두 개를

넣고

들고 다닌다고 했다.  

오 마이 갓뜨...

나는

 저만치에 서있던 남편에게

무언의 눈빛으로

"이게 깜짝 파티?"라는 의미로

쳐다보았고

어둠 속에서도 내 째림을

기막히게 알아들은 남편은

"나도 몰랐음"이라는 눈빛을

되돌렸다.



그때부터 나는

이 더운 날씨에

벙커 안이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길 잃어버리면 여기서 못 나간다

라는 생각 하나로

 막내의 손을 움켜 잡고

안내자의 등 뒤에

일 순위로 서서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어둡고 좁은 긴 통로 들을 지나

안내자가 멈춰 선

곳에서 우리는  

흑백의 사진 들을 만났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군수물품 공장이 있었던

이곳 카셀은

1차 폭격 대상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에서

 옛날 건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도시 중에 하나인데

폭격 이 쏟아지고 몇 분 사이에

무너져 내린 시가지와

댐 등의 사진 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도시의

처절함 만이 담겨 있었다.

단지

그 옆의 온전한 모습의 사진

들 만이

 예전에는 이런 모습 이였을

 이라는 추하게 해 줄 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안내자를 놓칠 새라 부지런히

 그의 뒤를 따랐고

벙커 안 구석구석을 돌며

보게 된

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흡사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

처럼

보존되어 있는

전화기 무전기 타자기 들과

각각의 공간 별로

어른 기준

천명이 넘게 들어갔다는

벙커 안 좁고 어두운 공간 들은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포의 시간을

숨 죽이며 보냈을지

짐작 해 내기 어렵지 않았다.


안내자는

 이곳 벙커를 관리하고

이렇게 어느 직장 단체 팀 또는

어느 모임의 단체 팀들에게

벙커 안내를 맡아하며

간혹 가다 전쟁 당시

 실제로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 들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중 하나

어느 날

 어느 팀에 소속되어 있던

할아버지가

말없이 서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계시 더 란다.

그래서

안내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 이곳에서

4살 이였던 내가 바로 여기에서..."

라며

너무나 참혹해서

잊을 수 없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 더란다.


평소와 다르지 않던

어느 날

할머니와 집에서 엄마 아빠가

 퇴근 하기 만을 기다리던

어린아이는

갑자기 시작된 폭격으로

 할머니 손에 이끌려

이곳

벙커로 들어오게 되고

그날 이후

퇴근해서 곧 집으로 온다던

엄마 아빠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는

폭격을 피해

살아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기에도 부족한

좁은 공간에서

심지어는

자기의 배설물 위에 앉아

있어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곳에서도 아이를

출산할 수밖에 없던 아주머니도

있어

그야말로 아비규환 자체 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폭격이

벙커를 지날 때면

벙커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

돌며

그 순간 모든 것이

어디론 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 이 들 만큼의

큰 흔들림 이였다고 한다.

그 당시 어린아이였던

할아버지 가 받았던

그 공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전하고 난

안내자는

누군가 내게

"왜 자기 시간 들여 이 음산한 벙커 안에서

이렇게 열심히 설명해 주며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느냐?"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 벙커 안에서  

스쳐지나가 듯

만나게 된

전쟁의 불행을 겪고 살아남은

 증인 들의

잊을 수 없는 증언 들과

곳곳에 흩어져 있던

그때의 자료 들을

모으며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끔찍한 불행으로 몰고 갔는 가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전하는 일 만이

전쟁으로 쓰인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일에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 일

뿐이어서 나는 오늘도 이일을 한다 "

라고 답했다.

라며

우리의 벙커 안내를 끝 마쳤다.

우리는

한동안 손뼉 치는 것도

잊은 체 숙연해지고 있었다.


못 빠져나올 까 봐

전전긍긍

떨었던 벙커 안에서

무사히 밖으로

나오고 난

 우리는

안내자의 생생한 설명

덕분에

마치

전쟁 그 급박하던 그날 그 순간에

서 있다

빠져나온 듯한

아득한 느낌마저 들어

 서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아까 까지만 해도

뭔 놈의 서머 파티를

이런 살벌하고 음산한 곳에서

소름 돋아 가며 하나

라고 생각했던 나는

의미 있고 시원한 서머 파티를

해보려 했다는

파티 주관자인 남편 동료에게

박수를 보냈다.


평소에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그냥 전철역으로

또는

 동네 한 귀퉁이로만

기억하고 지내던

바인베억 벙커는

이제 우리에게

수많은 사람 들의 신음과

공포와 눈물 이

가득했던

곳으로

선명이 남았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세월 로도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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