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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하의 별 Mar 12. 2021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녀들

그녀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나에게는 어릴 적부터 이모라고 부르는 엄마와 친한 친구들이 있다. 나의 엄마는 사회생활을 오래 하였고 엄마의 친구들은 사회생활을 한 사람도 있고 전업주부로 지낸 사람도 있다. 그녀들은 나의 집에 종종 놀러 와서 며칠간 또는 일주일씩 머물다 가곤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모들과 어릴 때부터 친했다. 이모들은 여럿이 함께 올 때도 있고 혼자 나의 집에 올 때도 있었다. 이모들은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나의 집에 와서 쉬다가 가곤 했다. 그렇게 나의 엄마와 이모들은 서로 우정을 깊이 쌓아갔다.


엄마가 퇴직을 하는 시점에 사회생활을 하던 이모들도 퇴직을 비슷한 시기에 하였다. 퇴직을 한 이모들은 그동안 못했던 여행을 하고 싶어 했고 전업주부였던 이모들은 이모부들에게서 자유롭고 싶어 해서 엄마와 이모들은 부지런히 해외여행을 함께 떠나곤 했다. 서유럽, 북유럽, 동유럽, 동남아 등등 엄마와 이모들은 노년의 삶에서 가장 젊은 시절인 그때 부지런히 추억을 쌓았다.


나는 엄마와 이모들이 여행 추억만 쌓는 줄 알았는데 작게나마 좋은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엄마와 이모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에 이름도 짓고 총무도 선발하고 한 달에 한 번씩 1만 원에서 10만 원 사이로 회비도 자유롭게 내었다. 돈을 더 내고 싶은 사람은 더 내어도 괜찮았다. 그렇게 모이는 돈으로 "청주 여자 교도소"에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때 청춘시절이었던 나는 교도소라는 이미지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의 말에 엄마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범죄를 지어서 들어온 사람보다는 여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자인 경우가 더 많다고 하였다. 내가 들은 이야기 중에는 오랜 시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신랑이 아이한테까지 손을 대려고 하자 그것을 막으려고 남편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도 빈번하게 있었다.


나는 한두 번 하다가 말겠지라고 생각을 하였지만 엄마와 이모들은 긴 시간 동안 그곳을 드나들었다. 갈 때는 음식도 정성껏 준비하고 그 안에서 필요한 물품도 마련하고 돈도 챙겨서 갔다. 그곳의 사람들에게 어떤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위로" 해주기 위한 행동들이었다. 그녀들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위로를 건네곤 하였다. 내가 왜 일을 사서 하냐고 질문했을 때 엄마와 이모들은 자식도 다 키워놨고 늙어 죽을 때까지 검소하게 살면 나오는 연금으로 살 수도 있다고 나에게 말하면서 죽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청춘시절의 나는 본인에게 시간과 돈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쓰는 엄마와 이모들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엄마와 이모들은 그들의 활동 영역을 더 확장시켰다. 교회에서 후원을 받는 선교사들은 그래도 선교지에서 삶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하고 자립으로 나가 있는 선교사들은 생활이 많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엄마와 이모들은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서 이모들이 우리 집에 모여있을 때 눈치를 보면서 불쑥 말을 하였다.


"이모들, 그냥 지금 하던 일만 하는 게 어때요? 일을 더 크게 벌리지 말고!"

"아주 다 컸다고 이제 이모들 하는 일에 간섭이냐? 프라하의 별, 너 월급 받잖아 회비라도 내!"

"싫어요, 내가 얼마나 힘들게 버는 돈인데 나보고 돈을 내라고 해, 안 해!"


결국 엄마와 이모들은 후원을 받지 못하고 자립으로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명으로 시작했던 이 "모임"은 이모들의 친구의 친구까지 들어오면서 규모가 커졌다. 모임의 사람들은 형편이 다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서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을 하였지만 노후가 미처 마련되지 못해서 여전히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본인의 형편에 맞춰서 회비를 정성껏 내었다. 누군가에게는 1만 원이 작은 돈이지만 정성껏 회비를 내는 사람 중에는 1만 원이 너무 큰돈인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옆에서 주워들으면서 좋은 일인 것은 분명 알겠지만 "나의 형편도 어려운데 다른 이를 돌보아 주는 그녀들"이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때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청춘이었나 보다.


그녀들은 나의 생각보다 꽤 오랫동안 그 모임을 지속하였고 본인들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는 일을 마다 하지 않았다. 모임의 회원들의 이웃 중에 누군가가 연탄이 없다면 그곳에 연탄이 배달이 되었고 누군가가 아이 학비가 없어서 대학에 합격하고도 진학을 못한다면 장학금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 집에 전달이 되었다. 그녀들은 가까운 이웃부터 돌보면서 멀리 있는 선교사에게까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녀들은 본인들이 생각하는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매우 행복해 보였다.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서로 해야 할 일을 정해서 체계적으로 일을 척척 진행을 하였다. 단순 모임이라고 하기에는 일의 분업화가 잘 되어 있었다. 오랜 사회생활과 또는 가정에서의 운영의 경험이 그녀들의 능력을 잘 발휘하도록 도와준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규모의 회비를 요구해서 나도 강제로 회비를 내기 시작했다. 내 동생도 회비를 나와 비슷한 시기에 냈던 것 보면 아마 그녀들은 각자의 자녀들에게 좋은 일에 동참하라고 강제했을 것 같다. 나는 한 두해 내면 되겠지 했지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들의 모임이 해체될 때까지 매달 나의 돈이 회비로 나갔다. 가끔 내 돈이 캄보디아의 어느 선교사에게 갔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지만 마치 세금처럼 자동이체로 회비를 내고 있는 나는 내 돈의 행방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캄보디아에 있는 선교사를 통해 학교가 없는 마을에 학교가 세워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들은 이미 모여져 있는 회비와 십시일반 돈을 더 모아서 목돈을 보낸 적이 있다. 학교 건립에 돈을 전액 보조하기는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추진한 일이었다. 그곳 선교사는 진심으로 감사해했고 학교는 잘 세워졌다고 한다. 이모들이 내가 낸 회비가 그곳 학교를 지을 때 주춧돌 하나는 된다고 말을 해서 나는 "내 돈이 의미 있게 쓰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건립하는데 도움이 된 것은 나에게도 의미 있는 일로 마음에 남은 것 같다.


그녀들의 모임은 친목모임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작게나마 의미 있는 일"을 꾸준히 하였다. 그녀들은 70대가 되기 전에 그 모임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 좋은 일도 이제는 기운이 없어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녀들은 세월과 함께 나이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70대인 그녀들은 각자 본인의 삶에 충실히 살고 있다.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이모들도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아픈 이모들도 있어서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녀들의 "모임"은 해체가 되었지만 여전히 친목으로는 만나고 있다. 몇 년 전 동해로 거주지를 옮긴 나의 부모님 댁에도 방문해서 일주일씩 놀다가 가곤 한다. 내가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하면 옆에서 이모들 목소리가 들려서 나와 반갑게 통화를 하곤 하였다. 이모들은 나의 나이를 물어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본인들만 나이를 먹는 줄 아는 귀여운 이모들이다. 그녀들에게 나는 여전히 어린 프라하의 별 인가 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본인들의 건강을 챙기기도 버거운 그녀들이지만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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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landrraphotography,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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