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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Tree Nov 09. 2021

주인공은 초반에 죽지 않는다

 

나는 41년 전에 미국 고등학교를 한 학기 다녔다. 지금처럼 대학 수준의 AP과목은 없었지만 그래도 일반 클래스와 우등 클래스가 있었다. 그리고 좋은 대학에 가려면 일반 영어가 아니라 칼리지 영어 (College English)라는 우등 클래스를 택해야 했다. 


미국 고등학교에는 각 학생의 성(last name)에 따라 배정된 카운슬러가 있고 우등 클래스를 수강하기 위해서는 카운슬러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무서운 얼굴에 허스키한 목소리의 내 카운슬러는 외국인 학생을 위한 영어수업 (ESL)만 들을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ESL 클래스에서는 "네 이름은 뭐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취미가 뭐니?" 이런 걸 짝지어서 연습했으니 좋은 대학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나는 칼리지 영어가 뭔지도 모르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는 신념으로 그 무서운 카운슬러에게 끝까지 매달렸다. "해보겠다, 잘할 수 있다, 그리고 못하면 그때 포기하겠으니 제발 기회를 달라"고. 결국 나는 카운슬러의 승인을 받아 칼리지 영어 클래스에 입성했다.


그 당시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한국인은 서너 명의 한인 2세와 나 그리고 J 뿐이었다. J와 나는 한국에서 갓 왔고 동갑이었으며 우연히도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이때부터 나와 J는 그녀가 하늘 여행을 떠나기까지 35년간을 내내 붙어 지냈다. 그런 J와 나는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로 칼리지 영어 클래스에 들어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키가 작고, 하얀 웃는 얼굴의 아이리시 선생님이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일인용 책상이 동그랗게 배열된 교실에는 10명 남짓한 학생이 있었는데 '분단' 또는 '조' 유형의 책상 구조에 익숙한 나는 몹시 낯설고 불편했다. 


칼리지 영어 수업의 첫 번째 교재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고 책을 읽어가면서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고 또 시험을 본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국어 선생님이 작가 소개, 작품의 배경, 글의 주제, 소재 등을 칠판 가득 채워 놓으면 그대로 옮겨 적어 외우면 됐었다. 그리고 수업 내내 선생님이 쏟아내는 설명을 듣고 적었는데 무엇을 어떻게 토론한다는 것인가... 정말 난감했다. 


토론이 시작되면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교실 바닥에 고정시키거나 최대한 나를 숨기기 위해 의자에 눕다시피 했다. 그러나 학생이 10명도 안 되는 교실에서는 헛수고였고 이내 선생님은 나에게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하셨다. 손에 땀을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책에 쓰인 글을 그대로 읽듯 말하는 게 나의 최선이었다. 그러나 문학소년 같은 아이리시 선생님은 내 어설픈 발표를 지적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늘 '그래 좋은 포인트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파악해보렴'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초반은 파시즘에 대항해 스페인 내전에 뛰어든 미국인 로버트 조던이 게릴라 부대에 합류한 첫날 파시스트 병사들에 의해 부모를 잃은 스페인 여자 마리아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읽어도 영어 고전문학은 어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불시에 쪽지 시험이었다. 마리아는 어떻게 됐는지, 마리아의 심리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궁색하고 초라한 몇 줄의 문장을 적어냈다. 그리고 교실을 나서면서 J에게 물었다. "뭐라고 썼니?" J는 "그냥 마리아는 죽게 되었다"라고 시원하게 답했다.  J도 모를 리 없지만 나는 "이 책이 800 페이지고 아직 초반인데 벌써 주인공을 죽이면 어떡하니?"라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쪽지시험 후 마음씨 좋은 아이리시 선생님은 우리를 조용히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의 영어로 이 수업을 듣는 게 매우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하루아침에 영어실력이 늘어날 것도 아니고 별 뾰족한 수가 없어 걱정만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J가 한 손에 무슨 책을 흔들며 나타났다. "이제 우린 살았어. 교회 친구에게 한글로 된 책이 있었다는 거 아니니"... 한글책은 우리에게 보석이었다. 막막하고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신감도 생겼다. 그 후에도 '로미오와 쥴리엣', '주홍글씨'를 읽어야 했는데 J와 나는 한글책을 구해서 영어책과 함께 읽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칼리지 영어 과목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떠올리면 웃는 얼굴의 아이리시 선생님 그리고 초반에 주인공을 과감히 죽여버린 내 친구 J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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