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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Apr 06. 2024

꽃멍

가끔 꽃멍 하시나요?

새벽녘에 일어나 1층 창가에 놓인 장미에 시선을 둔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처음엔 분홍색이었던 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파스텔화처럼 변해가고 있다. 레몬레이드핑크에서 베이비핑크로 그리고 아주 연한(흰색에 가까운) 핑크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주던 장미가 벌써 꽃송이를 떨구며 시들어간다.

그럼에도 아직 아름다움을 떨치지 않고 있는 장미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 문득 집 밖 꽃님이들이 궁금해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튤빕들은 벌써 잎을 떨구고 있는 중이다.

재작년부터 심기 시작한 튤립은 대부분 지고 꽃봉오리가 몇 개 남지 않았다.

변화무쌍한 이곳 날씨에 올해도 튤립은 꺾이고, 쓰러지며 고생을 많이 했다.

지지대를 세워뒀지만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오렌지색 튤립은 웬만한 성인의 주먹만 하다.

처음엔 진한주황색으로 꽃대를 올리더니 시간이 흐르며 채색한 수채화 위에 물방울을 흩뿌린 듯 색이 서서해 바래고 있다.  

이렇게 한참을 꽃멍을 하다 보니, 처음 구근 심던 날이 생각난다.

앞가든에서 한참 호미질을 하고 있는 내게 건넛집 할아버지가 손 흔들며 보낸 따뜻한 미소와 이전에 심어뒀던 구근을 호미로 잘못 건드려 생채기를 냈던 순간, 작년 봄 저 튤립들이 꽃대를 올리던 시절 남프랑스 여행을 떠났다 돌아와 보니 꽃송이들이 바람에 제다 꺾이고 부러져 있던 처참한 모습들...,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한참 동안 꽃멍을 하다 앞, 뒤 가든으로 나갔다.



튤립!!

너희에 대해 내가 오해한 게 있어.

난 너희 고향은 당연히 네덜란드인 줄 알았어.

좀 더 적극적으로 너희에 대해 알아가면서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이 고향이란 걸 알았어. 세상에, 그 고원이 너희의 고향이라니...,

너희는 꽃말도 색색이 다르더라.

요즘은 색이 너무 다채로워 그 색색의 꽃말은 아직 명명하지 못한 거 같아,


너희는 대체 어느 별에서 온 거니?

너희 별의 중력은 서로를 향해 끌어당기는 게 아니고, 머리 위로만 당기나 봐?

미안, 놀리려는 게 아니라 네가 안타까워서 그래.

네 큰 꽃머리가 바람에 꺾일 까봐...,

어른 주먹보다 큰 튤립, 밤사이 내린 비에 젖은 모습마저 아름답다.

그리고 핑크 너는 어린 왕자의 소행성 B612에서 온 게 분명해!!!

너의 여린 꽃잎은 어린 왕자의 솜털 뽀송한 볼살을 닮았거든,

어쩌면 이런 색을 저 시커먼 땅속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거니?

그리고 노랑이 너는 어린 왕자가 널 봤다면 '여우'를 떠올렸을 거 같다.


금낭화, 너도 왔구나!

너를 보면 엄마가 그립다.

해마다 이맘때면 엄마집 감나무 아래 너랑 닮은 아이가 얼마나 예쁘게 피어 있었는지 너는 알지?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 동화줄에 연결되어 있는 듯하거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너희의 꽃말이 내게는 그렇게 해석된단다.


물망초,

"나를 잊지 마세요.(Forget me not)"

그래 난 너를 잊지 않고 있단다.

잊을 수 없지, 내 곁에 이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데...,

물망초, 넌 그거 아니?

난 널 너무나 좋아해 집에서 내려봤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널  앉힌걸...,


클레마티스?

"고결, 아름다운 마음." = 너의 꽃말이 고결하구나. 

다른 꽃말도 많더구나. 하지만 난 "고결, 아름다운 마음"으로 담아둘게.

사실난 너의 정체가 조금 의심스럽다.

너희가 그 클레마티스과라는건, 니들이 덩굴식물이니 믿고 싶지만,

널 좀 지켜봐야겠다.

하지만 너의 그 보랏빛이 향기는 너무나 사랑스러워.


프리뮬러,

너희들은 색색의 화려함 만큼이나 꽃말도 매혹적이 구나.

"자만과 부귀" 그래, 너희가 일평생 자만해 한들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겠다.

계속 자만해라.

부디 부귀는 내게 다오.^~^


꽃님씨! 정말 미안해,

난 너희의 정채를 정말 알 수가 없구나.

내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곳에 뿌리내리고 있던 너희들, 너희를 알고 싶어 니 옆모습이며, 앞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몇 번을 검색해 봐도 도무지 너희의 이름을 알 수 없구나.

그래도 다채롭게 피어 온 집을 화사하게 만들어줘 너무 고마워.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하얀, 분홍, 보라 빛으로 무리 지어 있으면 너무 아름답다.

무스카리,

너희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는데,

누가 너희에게 "실망, 실의"란 꽃말을 준 거니?

포도송이처럼 송글 송글 맺혀 이렇게 사랑스럽게 피어나건만 말이야.

그래서 난 너희에게 새로운 꽃말을 주고 싶어,

"달큼한 행복"

맘에 드니? 이건 내가 좋아하는 와인의 맛을 표현한 거야.


지금 모국은 온갖 봄꽃으로 가득 차 있겠지?

오늘 아침, 그 그리움에 집안에서 한참, 집 밖에서 한참 꽃멍을 하고 들어왔다.

꽃멍으로,  아름다운 어느 작가님의 봄소식과 내 오랜 친구가 보내준 벚꽃길 사진으로 그리움을 삭인다.

"꽃을 보니 봄이 니가 그립다." 는 짧은 메시지를 주는 이가 있어 가슴 따뜻하다.

봄이 오고 꽃이 피면, 아직도 나를 꽃과함께 기억해주고, 그리워 해주는 이가 있어 행복하다. 누군가의 가슴에 잊혀지지 않는 봄이로 깊이 새겨지길 소망하면서 '꽃멍'을 마무리 하련다.


이른 아침, 리빙룸에 불이 켜지면 우리 집 개냥이 호동이가 바빠진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호동이가 오늘 내 꽃멍에 동참해 줬다.

그 녀석, 나를 좋아하는 걸까?

배나무 아래서 물망초에 빠져 한참을 꽃멍 중인 내 종아리를 부비 부디 하며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내 곁을 이리저리 맴돌다 내가 일어서니 이 녀석 앞장서 계단을 내려간다.

내가 늦으면 뒤돌아서서 날 기다려도 준다.

이놈 길냥이는 아닌 듯하다.

개냥이 호동이 고마워~~^^


"긴 머리 인간, 나를 따르냥옹~~~"


#영국 시골 여행

#영국 시골 살이

#봄꽃

#꽃멍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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