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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왕』의 희생양 제의는 그 ‘희생양’에게 어떤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가? 오이디푸스는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죄 중 그 무엇 하나 자신이 알고 저지르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행위가 어떻게 그의 책임이 된다는 말인가? 이것을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는가? 희생양의 대속을 통해 공동체의 오염은 정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제시하더라도, 희생자 제의의 희생양에게 부과되는 이 부조리는 여전히 해명되지 못한 채 남는 것처럼 보인다.
오이디푸스를 몰락시킨 운명의 부조리에 대해서 그 작가인 소포클레스가 어떠한 방식으로 관객들을 납득시키고자 했는지는 작중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그리고 또한 코로스의 노랫말들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 배태된 그리스 신화의 운명론적 세계관이 가진 내적 논리는, 이와 가장 극명히 대조되는 후대 작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보다 선명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죄책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이 그리스 비극의 변용을 고민했던 후대의 작가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근대의 시대정신이 되었던 계몽주의와 2,400년 전 아득히 먼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세계관을 서로 견줌으로써는 비교의 이점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즉, 1659년 프랑스 극작가인 코르네이유가 개작한 『오이디푸스』와, 1718년 계몽 사상가 볼테르의 『오이디푸스』는 각각 고전주의와 계몽주의라는 이념에 비추어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이 가지는 의미를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의 시대정신이 되었던 계몽주의와 2,400년 전 아득히 먼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세계관을 서로 견줌으로써는 비교의 이점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볼테르의 『오이디푸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오이디푸스의 부조리한 운명과 그 운명을 주재하는 신들에 대해, 현대적 관점에서 매우 타당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즉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신들 그 자신에 의해 부과된 운명에 대해 희생자인 오이디푸스의 책임을 물어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오이디푸스 왕』의 신은 매우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존재다. 이런 신들의 폭정과 압제로부터의 자유, 해방의 가치를 옹호하는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오이디푸스』에서, 우리는 이런 악한 신에 대한 불만이 거듭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불만은, 제도화된 신 즉 제도 종교의 현실에 대한 볼테르의 비판 의식과 맞닿아 있다. 가령 볼테르가 개작한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선왕 라이오스의 살해자라는 대제사장의 말에 아래와 같이 비방을 쏟아낸다.
“지나친 덕성이여! 최고의 혐오스러움이여!
한 명은 거의 신처럼, 한 명은 사기꾼 성직자처럼 말하는구나.
(대제사장에게)
여기 성전들의 특권을 보라!
면책특권으로 불경스러워진 너의 입은
너의 왕을 더러운 죄목을 들어 비난하려고
신과의 관계를 무례하게 남용하는구나!
너는 노한 내가 아직도
네 손으로 모욕한 성직자를 존중해야 할 줄 믿느냐.
배신자여, 너의 입을 빌려 말한 신들을 보니
제단 아래 너를 바쳐야겠다.”
볼테르, 전종호 옮김,『오이디푸스』. 서울 : 지만지드라마, 2020, 78-79쪽.
“성전들의 특권”, “면책특권”을 가진 성직자들이 신을 빙자하여 정치적 권위(=“왕”)를 무시하고 횡포(“무례”, “남용”)를 부린다는 인식은 절대적인 교회 권력의 횡포를 비판했던 볼테르 자신의 현실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해도 과한 주장은 아닐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부인(이자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과거 연인이었고, 그 자신이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던, 헤라클레스의 절친했던 영웅 필록테테스 역시 대제사장의 폭로에 분노한 오이디푸스에게 이르는 말에서 다음과 같이 사제를 비난한다.
“헛된 신탁들에 근거해서
사제는 군주들을 종종 가혹하게 대합니다.
한편, 고집 센 백성들은, 맹목적인 열정으로,
어리석게도 우상숭배라는 거룩한 굴레에 묶여,
신앙심에 이끌려 가장 신성한 법을 무시하며,
자신들의 왕을 배신하면서도 신을 찬양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책, 82-83쪽.
사실, 볼테르의 『오이디푸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중 신들 혹은 사제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오카스테 역시 선왕 라이오스 살해의 범인이 자신이라는 대제사장의 말에 불안해하는 오이디푸스에게, 그녀의 “독실한 신앙심”에 배반당했던 기억을 들어서 사제의 말이 허황되고 “쓸데없는 공포”를 줄 뿐이라며 안심시킨다.
“저는 신들을 믿었습니다, 전하. 그리고 독실한 신앙심은 잔인하게,
아들에 대한 제 모정을 완전히 억눌렀습니다.”
위의 책, 96쪽.
제 아들(즉 오이디푸스)이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을 저지를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아들을 죽이도록 한 선택이, 결국 살해당한 그의 남편 라이오스를 살리지도 못했으며, “거짓 신탁(96)”에 휘둘려 잔인하게도 제 아들까지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독실한 신앙심”은 기껏해야 “잔인”한 결과로 귀결될 뿐이었다. 이오카스테는 대중들이 사제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그들 지식은 모두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이루어졌(93)”을 뿐이라고 헐뜯는다.
하지만 이내 오이디푸스가 진범일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자, 이오카스테는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악마가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이러한 공포에 빠뜨릴 수 있을까요(98)?” 신들이 그들에게 선사한 비극적 운명은 “악마”적이기까지 하다고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마침내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사실이 모두 드러나자, 신들을 향해 이렇게 비난과 원망의 말을 쏟는다.
“잔혹한 신들이여, 내 범죄는 당신들 탓이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벌하고 있구나!”
위의 책, 132쪽.
자신의 범죄가 신들의 탓이며, 그 잘못을 자신에게 물어 벌하고 있다는 점의 부조리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이오카스테는 그 자결로써 “나를 범죄로 몰아넣은 신을 부끄럽게 만들 것(140)”이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죄책을 물어야 할 대상은 오히려 범죄의 운명을 설계한 신들이었다.
코르네이유의 『오이디푸스(박무호 역, 울산대학교 출판부)』역시 오이디푸스를 파국으로 몰아세우는 것을 예정한 신들에 대해 그들의 뜻이 “그릇된 정의(217)”이자 “부당한 엄격함(217)”이며 “부당한 분노(236)”임을 오이디푸스와 디르세 등의 대사를 통해 거듭 표현하고 있다. 예수회로부터 교육을 받은 코르네이유의 경우, 이와 같은 불만은 신과 종교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예수회와 대립하였던 칼뱅주의적 예정설 및 그를 닮은 얀센주의식 교리 이해에 대한 것에 더 가까웠을 테지만, 적어도 오이디푸스 신화의 신들이 부정의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 관하여는 볼테르와 다르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억울한 희생양을 만드는 운명에 대해 그리스인 소포클레스가 제시하는 태도는 이들과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볼테르의 『오이디푸스』에서 이오카스테는 사제의 말에 불안해하는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키면서 사제들과 신탁에 대해 독설을 뱉었건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의 신탁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다르다.
“그렇게 되도록 신탁이 미리 정해놓았던 거예요.
그러니 신탁이라면 염려하지 마세요. 신께서 필요해서
구하시는 것이라면 몸소 쉬이 밝히실 거예요”
소포클레스, 앞의 책, 62쪽.
볼테르의 이오카스테가 과거 자신의 신앙심이 제 아들을 죽였다는 데에 한을 품고 있던 것과 달리, 소포클레스의 이오카스테는 여전히 존경심과 신뢰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인간 이성으로써 신이 내린 징벌의 부조리를 판단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를 “오만”과 “교만”이라고 본다. 이 “오만”과 “교만”을, 소포클레스는 코로스를 통해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오만은 폭군을 낳는 법. 오만은 시의적절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부(富)로
헛되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는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가
가파른 파멸 속으로 굴러떨어진다네.
...(중략)...
정의의 여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상(神像)들을 경외하지 않고
행동이나 말에서 교만의 길을
걷는 자가 있다면, 불운한 교만 때문에
사악한 운명이 그를 잡아갈지어다.”
위의 책, 70-71쪽.
오이디푸스가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신탁이 이뤄졌음을 마침내 깨닫고 자신의 두 눈을 찌른 후에도, 코로스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과, 운명에 대한 통찰력 때문에 불행해졌(97)”다고 노래한다. “모든 일을 지배하려 들지 마”라는 충고와 함께 “그대가 지배한 것들도 평생토록 그대를 따르지는 않았”다며 오이디푸스의 아이들을 그로부터 떼어놓는 크레온의 대사를 통해서도 소포클레스는 자신의 지성과 통제력을 과신한 오이디푸스의 교만을 다시금 상기시키기도 한다(106). 즉,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그 자신 교만에 대한 응보적인 징벌로 그려지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오이디푸스의 부조리한 운명에 대한 소포클레스의 이와 같은 해석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진 신화적 세계관으로부터 해명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세계에 대해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는 “별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27)”라고 일컬은 바 있다. 별이 길을 밝혀주는 시대란 자연적 질서가 지워주는 물리적 한계가 곧 인간의 목적과 의미를 한정 짓는 시대였다. 이는 계몽 정신이 추동한 과학 발전에 힘입은 기술의 진보가 오늘날의 인간에게 선사한 것과 같은, 제 편의에 따라 자연을 구획하고 조작, 관리하는 권능이 고대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고대인들은 자연물에 인격성을 투사하였고, 그것이 고대 그리스 세계의 신이었다. 따라서 그리스인의 세계관에서 세상의 자연적 질서는 곧 신들의 의지이며,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표상되었다. 그렇기에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한계에 의해 한계 지워진 운명은, 인간의 가치판단과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루카치가 말한 ‘총체성’의 시대, 즉 세계와 신, 인간의 삶과 가치가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이루는 시대는, 지식과 기술 문명의 저발전이라는 물질적 조건에 의한 필연이었다.
그렇다면 자연적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그 어떤 관념도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물질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고대인의 윤리 체계는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세계의 거대한 운명 속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작은 운신의 반경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대치만을 그 범위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진정한 윤리는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개척해나가는 데에 있지 않고(운명에 종속된 필멸자들에게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므로), 제 몫의 삶을 가장 의연하고 영웅적으로 살아내는 태도에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비록 그 교만에 대한 응보적 징벌을 받고야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베 시민들을 그 자신의 지략으로 스핑크스로부터 구해낸 영웅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가 시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음은 그의 초라한 말로를 노래하는 코로스 역시 말하고 있다. 비록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을지라도, 여전히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는 영웅적 면모가 있다. 아래 오이디푸스의 대사를 보자.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오,
내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한 분은.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위의 책, 96쪽
그에게 일어난 “쓰라리고 쓰라린” 일은 아폴론의 뜻이었지만,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은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 본인의 선택이었음을 코로스에 대한 답을 통해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대사에서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른 행위에 대해 오이디푸스가 선택한 “가련한”이라는 형용사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번역어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원문 ‘τλάμων (tlāmōn)’에는 인내하고 견디며 의연하다는 뜻이 있다(‘τλάμων (tlāmōn)’의 해석에 관한 내용은, 독서모임 멤버로부터 들은 타학교 교수님 학부 강의 내용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준석(2018)은 『오딧세이아』에서 칼륍소가 제안하는 불멸의 삶을 뿌리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의연한 선택에 대해 “필멸의 운명에 대한 영웅적 추구(58)” 라고 해석한 바 있는데, 오디세우스가 필멸자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운명인 죽음을 영웅적으로 받아들이듯, 오이디푸스 역시 비록 자신이 알지 못하고 행했으나, 신에 의해 부과된 운명을 스스로 승인하고 감내하는 의연한 결정을 통해 자신의 “tlāmōn(틀라몬)”한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운명론적인 신화적 세계를 살고 있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윤리는, 그것이 때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서 감내하는 고상한 정신이 바로 영웅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인간의 속된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를 수용하는 윤리적인 태도를 이 비극이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신적 운명론이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금 전염병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던 『오이디푸스 왕』이 상연되던 시기의 아테네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오이디푸스 왕』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부조리한 희생에 조우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현실적 부조리의 극적 재현을 통한 감정의 승화를 제시함과 함께, 그 운명을 그저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쓰러져가는 영웅의 아름다움을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공동체 해체의 위협을 야기하는 아테네의 위기를 신화적‧사회적 의미망에 포섭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던 소포클레스의 소망을 우리는 마침내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본고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고대 아테네의 전염병과 전쟁이라는 실존적 위기의 알레고리로 재해석하고, 이를 후대 작가인 볼테르의 개작본과 대조하여 고대 그리스의 신적 운명론이 ‘극’이라는 집단적 이야기 생성의 경험을 통해 부조리를 사회적‧윤리적으로 의미화하는 방식을 규명하고자 했다. 비극 속 테베의 역병은 기원전 430년경 아테네 대역병이 휩쓰는 현실을 환기했을 터였다. 『오이디푸스 왕』은 전염병과 전쟁으로 공동체의 해체 위기에 처한 아테네에서, 신화적 코드로 위기를 해석하고 집단적 극적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공적 의례의 장치로 작동했다. 이 신화적인 운명론은 설명 불가능한 사회적 재난과 위기에 신적 질서의 논리를 대입시킴으로써, 개인들에게 위기와 부조리의 의연한 수용이라는 윤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 비극이 제시한 “운명을 견디는 영웅적 인내”는, 볼테르의 “신과 제도 종교에 맞서는 이성적 비판”과의 대비를 통해 더욱 두드러졌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통해, 본고는 『오이디푸스 왕』을 그저 유럽 문학 전통의 최고 고전일 뿐 아니라, 인간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부조리를 신적 운명이라는 코드로 묶어 공동체적 위기를 의례‧연극 안에서 승화한 고대 유럽인의 사례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의 자료로 해석할 수 있었다. 향후 여러 역사적‧고고학적 자료의 발굴을 통해 이상의 분석을 보다 정치하게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는 고전을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을 새로이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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