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폴 벤느(Veyne, P., 1983)는 그가 약 40년 전에 제기하고 스스로 답했던 이 질문에 대해서, 그들이 그 신화를 어떤 의미로는 믿었고, 어떤 의미—우리가 경험과학적으로 참으로 판별된 내용에 대해 그것을 믿는 것과 같은—로는 믿지 않았다는, 현명한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이 “하늘에”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하늘에 신이 나타난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누군가가 신화의 시간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헤파이스토스가 재혼을 한 지 얼마 안 되었다거나 아테나도 이제는 아주 늙었다고 지적한다면, 못지않게 놀랐으리라. 그 순간 그는 신화의 시간과 일상적 시간 사이에 막연한 유비관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하지만 일종의 혼수상태에 의해 둘의 이질성을 인식하지 못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폴 벤느, 김현경 옮김, 『그리스인은 신화를 믿었는가? : 구성적 상상력에 대한 에세이』, 서울 : 필로소픽 : 푸른 커뮤니케이션, 2023, pp.50-51.
그가 이 질문을 통해 진정 보여주고자 한 것은 ‘믿음’의 양식의 복수성이며, 우리가 경험과학적 참과 거짓을 분별할 때 적용하는 것과 같은 진실의 잣대는 실은 이 같은 복수의 믿음의 양식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그의 절친 푸코가 지성계(의 극히 일부)를 풍미했던 시대조차 이젠 저물어버리고 실증주의와 정량 분석, 정보 공학이 지배하는 오늘, 우리의 ‘과학’조차 사실 여러 “진실 프로그램”의 하나라는 그의 심오한 통찰은, 아주 궁색한 사변적 사족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삼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화가 그저 ‘거짓’이 아니라 하나의 ‘믿음의 양식’이라는 그의 아이디어만은 우리가 채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신화를 과거 인간의 정신세계와 심리, 행태 따위를 탐구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로 간주할 수 있다는 데에 최소한 얼마간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호메로스와 소포클레스, 그리고 그들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 시인들, 혹은 그들의 이름으로 전해진 그리스 서사시와 극들은 고대 유럽 문명인들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탐구를 위해 긴요한 텍스트라는 점은 분명하다.
본고에서 이와 같은 접근—즉 그 시대의 문학을 당대인들의 정신세계와 ‘믿음의 양식’을 반영하는 하나의 자료로 간주하여 그 사회상을 유추하는—을 통해 엿보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단면은, 그들의 종교가 제시하는 신(神)적 운명과 그 감내 및 수행(pherein)의 이데올로기가 (아마도) 수행했을 부조리의 사회적 의미화이며, 그 분석에 활용할 자료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다. 주지하듯, 소포클레스는 페리클레스가 이끌던 아테네의 황금기로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아테네가 공동체의 위기에 직면하기까지의 기원전 5세기를 겪었던 인물로 전해지며, 『오이디푸스 왕』은 그 위기의 한복판이었던 기원전 429년에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작중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테베에 창궐한 역병의 원흉으로 밝혀지자 그 죄악으로 “오염”된 자신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는데, 즉 오이디푸스가 다스리는 도시국가 테베에 창궐한 역병을 배경으로 시작하는 『오이디푸스 왕』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전염병’(과 전쟁)이라는 공동체의 위기와 그 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을 ‘희생양 제의’(즉 추방)를 집단적으로 의미화하는 양상, 그리고 그것이 수행한 사회적 기능은 무엇이었을 지를 추측하게끔 해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그리스 신화와 비극에서 전염병은 신의 분노 혹은 신벌로 여겨져왔고, 이는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오이디푸스 왕』을, 그리스 신화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신적 운명론이, 어떻게 개인이나 인간 이성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위기와 부조리에 대한 해석적 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결속을 도모했는지에 관한 사례 연구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한편, 『오이디푸스 왕』이 그 초연 이후 2,000여 년 동안 여러 작가들에 의해 변용되어왔다는 사실을 통해서는, 이들을 매개로 한 통시적 비교를 통해 고대 그리스 종교의 운명론이 가진 내적 논리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효과를 누릴 수도 있겠다.
이에 따라, 이후 본고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Ⅱ장에서는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에 닥쳤던 대규모 전염병 유행과 『오이디푸스 왕』의 연관을 논하고, Ⅲ장에서는 『오이디푸스 왕』에 나타난 신적 질서와 운명에 대한 태도를 후대 작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가 집필한 『오이디푸스』와의 비교를 통해서 분석한다. 이를 통해 당대 그리스인들이 맞닥뜨린 부조리가 어떻게 신이 부과한 운명으로 의미화되었으며, 소포클레스가 작중 오이디푸스의 영웅적 덕성을 통해 부조리를 대하는 시민적 태도에 대한 교훈을 남기고자 했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Ⅳ장 결론에서는 이상의 논의 내용을 정리하고 그 의의와 한계에 대해 논의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전쟁과 함께 아테네를 찾아온 거대한 전염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전염병의 전모는 말로 다하기 어렵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도 인간성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심했다.(2.50)”
투키디데스, 박광순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파주 : 범우, 2011, p.185.
“어떤 사람은 간호가 불충분해 사망하고, 어떤 사람은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음에도 죽어갔다. 이 전염병에는 이른바 특효약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중략)... 병은 모든 사람을 쓰러뜨리고, 평소 건강에 주의를 기울이던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2.51) ”
위의 글, p.185.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430년 발생한 이 전염병은 당시 아테네 인구의 1/4인 약 75,000 명에서 100,000 명의 규모를 사망에 이르게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현대 역학과 수학적 모델링에 의하면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혹은 천연두 등으로 추정된다[2]. 당시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인 페리클레스 또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후 2년 6개월 만에 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투키디데스는 전하는데, 그 자신이 이 역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투키디데스는 전염병이 아테네의 시민적‧문명적 교양과 문화를 깊이 잠식한 일대의 사회적‧정치적 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도 이 대전염병은 아테네 시 전체의 질서가 붕괴해가는 발단이 되었다. 즉 이전에는 속박받는 기분으로 은밀히 행했던 행동도 사람들은 당당히 해치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사람들은 모두 명예를 위해서 참고 견디는 일 따위에는 흥미를 잃고, 명예 따위를 획득하기 전에 죽어버릴지 어떨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쾌락에 도움을 주면 그것은 유용하고 선한 것으로 해석했다. 사람의 법도, 신에 대한 두려움도 구속력을 잃었다. 그리고 믿음이 있든 없든 모두 똑같이 죽는 것을 목격하고, 법을 어겼어도 누구도 형집행 때까지 생명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고, 도리어 전염병이라는 죽음의 판결을 이미 받아 그 집행에 위협받고 있는 몸이므로 마땅히 그전에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느꼈다.(2.53)”
투키디데스, 앞의 글, p.185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위와 같이 아테네 제국이 전염병과 전쟁 속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던 고대 그리스의 시대상 속에 탄생한 작품이었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직접 반영하듯, 극의 서막은 오이디푸스의 “온 도시가 향 연기와 더불어 구원을 비는 기도와 죽은 이들을 위한 곡소리로 가득하구나”하는 탄식의 말로 시작한다. 뒤이어 오이디푸스에 대한 탄원자들을 대표하여, 제우스 신의 사제는 역병이 창궐한 테베의 참상을 오이디푸스에게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보시다시피, 도시가
이미 풍랑에 너무나 흔들리며, 죽음의 파도 밑에서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이 나라에서는 대지의 열매를 맺는 이삭에도,
목장에서 풀을 뜯는 소 떼에게도, 여인들의 불모의
산고에도 죽음이 만연해 있나이다. 게다가 불을
가져다주는 신이, 가장 사악한 역병이 도시를 뒤쫓으니,
카드모스의 집은 빈집이 되어가고,
어두운 하데스는 눈물과 신음이 늘어나게 되었나이다.”
소포클레스, 천병희 옮김,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파주 : 숲, 2017, p.21.
아테네를 닥친 전염병의 참상 중에 상연된 『오이디푸스 왕』 속 역병에 대한 이 같은 묘사들을 통해서, 당시의 관객들은 극중 테베의 시민들과 귀족들을 현재의 자신들 및 위정자들에 겹쳐 보게 되었을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소포클레스 자신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페리클레스의 측근 혹은 지지자로서 정치 생활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작품 자체가 그 당시 아테네 상황의 알레고리로 의도되었거나 기능한 측면이 있었음을 추측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즉, 소포클레스는 공인으로서 자신이 공직에 몸담고 있는 정치체가 당면한 사회 문제에 대하여, 극작가이기도 한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써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메시지를 던져야 할 필요를 의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 같은 커뮤니케이션은 그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문화적 코드를 매개로 해야 했고, 이것이 신화 즉 그들의 종교의 역할이었다.
사회학자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일찍이, 종교 혹은 신앙이 비극과 고난 속에서도 사람들을 한 데 묶어 결속시키는 일관된 의미 체계를 공급함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유지에 기여함을 고찰한 바 있다. 죽음과 같은 불행 속에 희생양이 될 누군가(혹은 무엇인가)에게 그 책임을 지워 사회가 직면한 해체와 붕괴의 위협을 극복하는 희생양 제의(scapegoating)가 대표적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이 같은 희생자 제의의 메커니즘이 공동체의 안정과 유지에 기여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서 곧 문명의 토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주지하듯, 『오이디푸스 왕』의 줄거리는 테베의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 없애야만 역병을 멈출 수 있다는 신탁을 받고 아내 이오카스테의 전남편이기도 한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색출하기 위해 조사에 착수한 오이디푸스가, 그 자신이 범인이고 실은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어,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찌른 채 테베를 떠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많은 연구자들은 오이디푸스가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죄악을 스스로 처벌하고 테베를 떠남으로써, 테베 공동체의 ‘오염’을 정화하는 희생양으로 역할하고 있음을 파악한 바 있다[3].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왕』의 희생양 제의는 당대 그리스 사회 속 무엇의 알레고리로 기능했는가? 학자들은 당시 아테네에서 빈번히 이뤄졌던 도편추방제가 '희생양 제의'와 기능적으로 대칭적인 면이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4].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아테네에서 역시 민중파를 대표하는 페리클레스와 보수파의 정치적 대립은 일방의 도편 추방으로 귀결되고는 했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의 추방은 당대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들에 책임을 묻고자 하는 의식의 반영인가? 투키디데스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혼란하던 시기, 절망에 빠진 당시 아테네인들의 비난의 화살이 페리클레스를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여론은 아테네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물을 희생양을 찾고자 하는 분위기로 들끓고 있었다.
그럼, 오이디푸스는 아테네의 위기에 정치적 책임을 져야 했던 정치가를 상징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구체적으로, 페리클레스의 은유로 의도되었던 것일까? 실제로 몇 연구들은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을 통해 페리클레스 방식의 합리적 “지식론”을 비판하고자 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5].그러나 요는,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를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인물에 빗대고자 했는가보다는, 일상화된 위기 상황 속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그들 모두의, 즉 아테네 사회 전체의 알레고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적지 않은 희생자들은 아테네의 관습적인 장례 방식인 화장이 아니라, 단기간에 집단 매장의 방식으로 땅에 묻혀야 했던 것으로 보고된다[6]. 고대인들의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전염병의 파괴적 진행 속에서, 아테네인들이 망자에 대한 예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시신들을 버려두듯 쌓아두어야 했던 정황이다. 투키디데스는 이런 죽음의 광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기 때문에 매장에 필요한 자재도 부족하게 되어, 대부분 부끄러움도 체면도 없는 방식으로 시체를 다루었다. 예를 들면 타인의 화장용 장작이 쌓여 있는 곳에 먼저 가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시체를 올려놓고 태워버리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화장하고 있는 곳에 가족의 시체를 운반해 가 그것을 던져놓고 가버리거나 했다.(2.52) ”
투키디데스, 앞의 글, pp. 186-187
또 한편 투키디데스는 “감염을 두려워해 병자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 하지 않아, 환자가 나온 대부분의 집이 빈집처럼 되어 간호사도 없이 병자 홀로 남아 죽어갔다”고도 기록한다. 의사들 역시 병의 기전을 파악하지 못한 채 많은 환자와 접촉하면서 죽어가기도 했다. 요컨대, 전염병이 아테네 시민들 모두를 현실적 위협에 빠뜨린 상황 속에서, 아테네 시민들은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들과 접촉해야 했던 의료인도,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버려져 죽어가야 했던 병자들도, 공동체의 위기에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가도, 혹은 그 자신도, 그 누구도 ‘희생양’으로 감각할 수 있었다. 희대의 참상 속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아테네인들에게 힘을 북돋워줘야 했던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컨대 내 생각은 한 나라 전체로서 번영하는 쪽이 전체를 희생시키고 시민의 사리사욕을 꾀하는 것보다 개인에게 이득이 크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국가가 멸망하면 자신도 파멸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불운한 사람이 번영하는 국가 속에 있으면 구원받을 기회가 훨씬 많아집니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의 불행을 감내할 수 있지만, 개인은 국가의 멸망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2.60)”
위의 글, p.185
즉 『오이디푸스 왕』은 아테네라는 정치 공동체 차원의 위기에 직면하여, 만연한 죽음과 사회적 폭력, 희생의 의미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약속을 갱신하고 확인함으로써 그 위기의 극복을 도모하고자 했던 정치적 노력 속에 탄생한 작품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오이디푸스 왕』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부조리한 희생에 조우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현실적 부조리의 극적 재현을 통한 감정의 승화를 제시함과 함께, 배우들과 관객이 함께 하는 비극의 무대에서 집단적으로 이 참상과 비극의 의미에 대한 합의를 확인하고 도모하는 장일 수 있었던 것이다.
[1] Bernard Knox, “The Date of the Oedipus Tyrannus of Sophocles”,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77, 1956, pp.133-134.
[2] Littman, Robert J. "The plague of Athens: epidemiology and paleopathology." Mount Sinai Journal of Medicine: A Journal of Translational and Personalized Medicine, 76(5), 2009, pp.456-467.
[3] 최성희, "<오이디푸스 왕>에서의 역병 읽기", 한국연극학, 1(81), 2022, 129쪽.
[4] Vernant, Jean-Pierre., Vidal-Naquet., P. "Myth and tragedy in ancient Greece.", Zone Books, 1990, pp.133-135.
[5] 최성희, 앞의 글, 127-128쪽. 다음 Ⅲ장에서 논의하듯, 극중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그 자신의 지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과신한 “오만”에 대한 신벌로 그려지는 면이 있다.
[6] Baziotopoulou-Valavani E. “A mass burial from the cemetery of Kerameikos”. In: Stamatopoulou, M., Yeroulanou, M., (Eds). 『Excavating Classical Culture. Recent Archaeological Discoveries in Greece. Studies in Classical Archaeology I』. BAR International Series 1031. Oxford, England: Archaeopress, 2002. pp. 187–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