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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낭만주의: 혁명은 어떻게 프랑스와 독일을 갈라놓았나

- 회화의 비교를 중심으로

by 나인





그림 1.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왼); 그림 2.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오)


Ⅰ. 서론



한 풍경화가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겠다. 독일 낭만주의의 회화이념을 대표하는 작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 1840) 말이다. 그를 말하면서 그의 대표작인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이하‘방랑자’)>(그림 1)를 빼놓기란 어렵다. 산등성이 사이를 부유하는 “안개 바다”를 굽어보는 위엄 있는 자태의 등 돌린 인물이 과연 누구인가에 관해, 미술사학자 Koerner는 흥미로운 가설을 내놓은 바 있다. 즉 그는 프로이센의 군인, 구체적으로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프랑스의 나폴레옹에 대항해 동원한 병사라는 것이다.1) 서론에서 추가적으로 논하지는 않겠지만(그것은 Ⅱ장의 몫이므로), 이로부터 이 인물이 지닌 정치적·이념적 상징성을 해석해내자면, 그는 ― 비록 엄밀하지는 않은 도식일지언정 ― 반(反)-나폴레옹 = 반-계몽 = 반-혁명의 기치를 내세운 보수적 독일 민족주의의 화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낭만주의(Romanticism)’라는 문예사조를 프랑스적 계몽주의에 견주어서 ‘독일적’인 사조로 간주하는 이해가 ― 역시 썩 엄밀하지 않음에도 ― 다소간 통용되는 상식이기는 하지만, 당연하게도 프랑스에 낭만주의의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자로 C. D. 프리드리히를 들 수 있다면,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 화가로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를 꼽는 것은, 그리고 그의 대표작으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하‘자유’)>(그림 2)를 꼽는 것은 역시 무리가 아닐 테다. 주지하듯, <자유>의 주제는 1830년 7월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 샤를 10세를 쫓아낸 프랑스 민중들의 봉기, 7월 혁명에 대한 예찬이다.


본고가 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이 두 그림들로부터 연유한다. 우리는 두 나라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이 두 그림에서 매우 상극의 성질을 띠는 이념의 양극단, 즉 보수적 왕당파 민족주의와 진보적 공화파 자유주의가 대조되고 있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왜 같은 ‘낭만주의’의 명패를 달고서는 한 쪽은 반-혁명으로, 다른 한쪽은 친-혁명으로 경도되고 있는 것일까? <그림 1>과 <그림 2> 사이의 대조는 묘하게도 그저 두 낭만주의의 대조일 뿐만 아니라 아예 두 나라 사이의 대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요하고 장엄한 신중한 자연의 나라 (그래서 재미없는), 독일. 그리고 삼색기를 휘날리는 혁명과 자유의 나라, 프랑스!


본고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두 나라의 정치적·담론적 변화들을 대략이나마 개괄, 이 정치사를 따라서 문예 사조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따라가면서 상술한 질문에 답해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본고의 이후 전개는 다음과 같다. Ⅱ장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을 전후로 한 독일의 정치적 충격과 함께 독일 낭만주의가 어떻게 변용하는지 보겠다. Ⅲ장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과 변동을 중심으로 프랑스 회화 예술 경향의 변화를 살피며, 그것이 어떻게 프랑스 혁명사의 전개와 함께 계몽주의적 신고전주의로부터 낭만주의적 자유주의까지 진행하였는지를 검토해볼 것이다.




Ⅱ. 프랑스 혁명과 독일 낭만주의의 전개



프랑스 대혁명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머지 않은 후세에‘낭만주의’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는 이들을 포함한 많은 독일 사상가들이 혁명과 계몽의 시대정신에 그닥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17년 후까지도 헤겔과 같은 사상가가 나폴레옹을 일컬어 “말을 탄 세계정신”이라고 말했던 일화, 혹은 그보다도 훨씬 나중에 괴테가 그를 “반신반인”이라고 말한 일화는 적잖이 유명하지 않은가.


프레더릭 바이저(Frederick C. Beiser)는 독일 낭만주의의 진행을 세 시기, 즉 초기 낭만주의(1797~1802), 절정기 낭만주의(1802~1815), 후기 낭만주의(1815~1830)로 구분하여, 슐레겔 형제가 창간한 잡지 『아테네움』 중심의 서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셸링과 같은 초기 낭만주의의 많은 사상가들은 계몽주의와 혁명에 적대적이지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독일 내에서 계몽 정신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1790년대까지도 “계몽의 두 가지 근본 원리, 즉 급진적 비판 혹은 개인이 스스로 생각할 권리와 문화, 대중의 교육을 지지”2)했다고 지적한다. 초기 낭만주의는, 계몽의 요람 안에서 그것에 제기된 비판과 그 한계를 계몽의 핵심 가치와 조율하고자 했던, “계몽의 긍정이자 동시에 부정”3)이었다.


하지만 대혁명에 뒤이어 곧 전개되는, 폭력으로 점철된 프랑스 내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독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혁명과 계몽주의에 대한 태도 변화의 분위기가 감지되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 악명 높은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공포정치를 목도하며,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지지하던 사상가들조차도 프랑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세기말에 이르러 점점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가기 시작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비범한 지도자는, 1800년 마침내 제1통령에 등극함으로써 이 정치적 혼란상을 정리해버린다. 나폴레옹의 지도 하에 프랑스는 근대 국민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서 성장했다. 그리고 이런 이웃 국가 프랑스의 정치적 재도약은 독일 사상가들에게 새로운 위기의식을 제공했다. 프랑스가 강력한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군사 강국으로 성장하는 와중에, 독일은 수십 개의 소국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신성하지도, 로마이지도, 제국이지도 않은!― 느슨한 연방 국가 수준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낭만주의는 전-민족국가 단계에 머물러 있던 느슨한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워 결속시킬 수 있는 유력한 문화적 운동으로 부상하였다. 우리가 ‘후기낭만주의’를 통해 형성한 낭만주의에 대한 통속적 인상들―반계몽, 반혁명, 고대-중세적 전통으로의 회귀와 독일적 풍경 및 종교적 삶에 대한 지향 따위―이 실로 전면에 등장하여 정치적으로 부각되는 것도 이때 즈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 독일 낭만주의의 이 같은 반계몽·반혁명· 민족주의적 경향과 정념은 당연하게도,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독일 점령에 즈음하여 정점을 찍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패전으로 고조된 이 시기 독일 사회의 위기감 속에서,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그 유명한 피히테의 『독일민족에게 고함』(1808)이 빛을 발하게도 되었던 것이다.


동일한 위기의 한복판에서 예술가들은 민족이라는 추상적 관념의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재현들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들은 광활하고 장엄한 산맥을 따라 오래 전부터 그 곳에 자리하고 있던 독일의 자연에 민족주의적 정취를 투사했다. 독일의 자연은 ‘독일적’인 것을 희구하던 낭만주의자들의 관념 속‘독일적’인 것의 현전하는 증거였고, 이에 따라 독일적 자연의 미(美)―보다 정확히는 특히 숭고미―를 재현하는 것은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주요한 이념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 화가 C. D. 프리드리히가 남긴 수많은 풍경화들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이제 서론에 제시된 <방랑자> 속 인물을 “반-나폴레옹 = 반-계몽 = 반-혁명의 기치를 내세운 보수적 독일 민족주의의 화신”으로 해석한 맥락도 해명할 수 있겠다. 웅장한 산맥 사이를 부유하는 안개의 바다, 그 숭고한 독일적 자연의 이미지와, 그를 굽어보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독일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병사의 이념이 결합한 작품이 이 <방랑자>라고 말할 수 있다. <방랑자>는 이렇게 ‘독일적’인 것들의 도상을 통해 독일 민족의 가치를 웅변하고 있다.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C. D.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좋아했던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의 자연에 대한 표상은, 계몽주의적 이성의 그것과는 사뭇 대조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숭고란 인간의 추론적 이성의 힘을 압도하는 계량할 수 없는 압도적 크기의 관념이므로, 즉 세상의 가장 근본적 원리가 수학과 기하학으로 서술되는 이성적 법칙이어서, 인간 이성의 작용으로 그것을 우리 뜻에 따라 변형하고 조작하며 관리하고 통제, 이용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식 자연관과는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자연의 이미지가 종교적 심상과 결합하는 것은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인간의 이성 작용으로 간파할 수 있는 세속적인 물질세계 너머, 인간의 알량한 지성의 크기를 압도하는(한다고 주장되는) 무언가를 관념하는 사상체계가 또한 종교가 아니었던가. 바이저가 절정기 낭만주의로 분류한 1811년에 탄생한 프리드리히의 작품 <리젠게비르게의 아침(이하‘아침’>(그림 3)이 그 사례다.


그림 3. 프리드리히, <리젠게비르게의 아침>


<아침>(1811)은 마치 <방랑자>(1818)를 연상시키는 듯, 아득히 먼 지평선까지 걸쳐있는 안개 낀 산등성이를 굽어보는 우뚝 선 암벽을 전경에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방랑자>에서 그 암벽 위에 서있던 인물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대신한다. 우리는 이제 프리드리히의 숭고회화를 매개로 독일 낭만주의의 세 이념―자연·민족·종교―을 모두 아우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사의 격랑에 흔들리던 독일 낭만주의는 즉 나폴레옹으로 현현된 합리적 계몽주의의 혁명적 정치와 맞서, 숭고한 독일적 자연과 종교로 결속된 민족국가라는 하나의 정치 신학적 이상향에 대한 지향으로 귀결했던 것이다.




Ⅲ. 프랑스 낭만주의: 신고전주의적 전통



그렇다면, 프랑스 낭만주의는 독일 낭만주의와 어떻게 달랐는가? 회화 경향으로서 프랑스 낭만주의의 경로는, 그 이전 주자인 (신)고전주의와 비교될 때에 잘 이해될 수 있을 테다. 그럼, 고전주의는 무엇인가? 다소의 학문적‧개념적 엄밀함을 유보하고 과감히 말해본다면, 합리적 계몽주의의 예술적 표현이 (신)고전주의였다.


예술 경향으로서 고전주의는 형식 요소 즉 선·비례·대칭과 같은 규칙을 중시하는 예술 양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세계와 사물의 배열로부터 복잡한 규칙성을 추상해내고, 그 추상적 개념에 천착하는 미술 양식이다.‘추상’이라는 것이 본디 이성의 작용임으로, 고전주의는 즉 이성을 중심에 둔 회화 양식이었다.5)


신고전주의는 고전주의의 이성적이고 형식적인 회화 격률 속에 한층 더 풍부한 감정과 이상주의를 담아냈지만, 미술사학자 윌리엄 본(William Vaughan)은 그럼에도 “신고전주의는 이성과 자연적 감정이 동등하게 양립할 수 있다는 비낭만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와 명백히 다르다”6)고 평가한다.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 회화는 독일 낭만주의 회화가 독일에 관해 은밀하게 그랬던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프랑스의 이념에 대한 선전 예술, 프로파간다였다. 계몽 정신의 정치적 구현인 혁명과 예술적 구현인 고전주의는 아무래도 서로 친화적이었다고 말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가장 선명한 예시는 단연,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친우이며, 프랑스 혁명의 공공연한 지지자이자 급진 공화파인 자코뱅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함께 그의 정치적 삶 역시 위기를 맞았으나, 나폴레옹의 보호 하에 복귀하고, 끝내는 나폴레옹 황제의 수석 궁정 화가가 되는 인물이다.


미술 비평가 제라르 르그랑(Gerard Legrand)은 그에 관해 “다비드는 혁명 덕분에 명성을 얻었다기보다 오히려 혁명에 자신의 명성을 더해주었다”7)고 얘기했다. 혁명이 휘몰아치던 시기에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마라의 죽음> 등 그의 그림들은 당대의 현실과 고전주의 전통의 과거 신화적 영웅상을 접목, 시민적 미덕과 영웅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혁명의 정치적 혼란상을 잠재운 나폴레옹은 다비드가 제시하는 공화주의적‧시민적 영웅의 현현과도 같이 여겨졌다.8) 나폴레옹의 대중적 이미지로 가장 잘 알려져있는 <생베르나르 고개의 나폴레옹(이하‘나폴레옹’)>(1800)이 바로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었던 것이다(그림 4).


그림 4. 다비드, <생베르나르 고개의 나폴레옹>


황제가 공화적‧시민적 영웅이라는 점은 아이러니이지만, 애초에 봉건 왕조를 몰아낸 시민 혁명의 결과가 황제정이라는 것부터가 역사의 아이러니 아니겠는가.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다면, 그것은 신고전주의와 다비드의 모순이라기보다는 그냥 혁명기 정치의 모순이었다. 어쨌건 혁명의 화가이자 나폴레옹 제정 시대의 관변 화가로서 그의 위상은,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의 프랑스 예술의 세대교체에서도 그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만들었다.


유럽 전역에서 그를 찾아올 만큼 떨친 다비드의 명성은, 그의 문하에 있는 후세대 예술가들이 새로운 경향과 기법에 대한 개방적인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도 해주었던 것이다. 사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프랑스는 이미 유럽 예술의 본산과도 같은 나라였다! 그의 제자들에게, 다비드의 아틀리에는 스승의 정치적 위상에 힘입어 국가 의례용 대작 등을 집단 제작하는 현장 실습의 장으로도 기능했을 것이며, 뛰어난 장인적 기예의 형식과, 정치적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혁명적이고 시민적인 가치를 담지한 영감의 조각들이라는 내용을 모두 겸비한 후세대의 예술가로 성장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의 밑에서 훈련 받아 기민한 시사적 감각과 예술적 기예를 겸비하여 스승인 다비드의 라이벌로까지 성장한 인물이,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화가 앙투안 장 그로(Antoine-Jean Gros, 1771-1835)였다. 르그랑의 서술을 빌리자면 그는 <자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방문하는 나폴레옹>(그림 5)이라는 그림을 통해 “보나파르트주의를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동시대인들로부터 가장 위대한 채색화가로 인정받게 된다.”9)


그림 5. 그로, <자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방문하는 나폴레옹>


뛰어난 인품으로 빈자와 약자들을 어루만지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역시 그의 스승인 다비드를 따른 관변 예술가의 작품답게도, 그것이 역사적 사실과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점(그는 실제로는 병에 걸린 군사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10) 때문에도 악명이 높지만, 어쨌든 동일한 인물을 담고 있는 <그림 4>와 <그림 5>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혁명사의 진행 속에 조용히 이뤄지고 있던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의 점진적인 세대교체의 예고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대교체의 또 한 명의 주역이었던 낭만주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의 <기병장교의 돌진>(그림 6) 역시 나폴레옹 제정 하의 프랑스 기병 장교를 그리며 다비드의 <나폴레옹>과 굉장히 유사한 구도와 모티프를 채용하지만, 그 색채와 질감에 있어서는 회화적인 대비를 이룸으로써 초기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의 차이를 드러내는 하나의 비교 사례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림 6. 제리코, <기병장교의 돌진>

혁명과 혁명 영웅들의 위대함을 증거하던 이 프랑스 예술의 경향은, 나폴레옹의 패전과 왕정 복고 시기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혁명은 (잠깐) 패배했어도(물론 나폴레옹이 진정한 혁명의 대행자였는지, 그래서 그의 패배가 곧 혁명의 패배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평가를 달리 할 것이다), 그 혁명을 가능케한 프랑스의 도시 부르주아 공론장과 시민사회는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이들의 유산은 이 시민사회를 통해 계승되고 있었다. 르그랑은 “왕정복고 후 첫 몇 년은 다비드 이후의 고전주의 예술과, 유파를 이룬 적이 없던 소위 낭만주의의 흐름 사이에 예기치 못한 공존이 이루어졌던 시기”11)라고 말한다.


이 새로운 회화의 흐름이 인정되자, 뒤처질 것을 두려워하던 관변화가들은 어떤 소재들을 다시 되살렸다. 제리코는 다비드를 칭송했고, 앵그르는 미술 잡지들로 하여금 ‘중세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까지도 줄곧 다루게 했다. 초상화가들은 늘어나는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기법을 전부 동원하여 혼합하였다.

제라르 르그랑, 박혜정(역),『낭만주의』, 서울 : 생각의 나무, 2004, p. 123.


이 공존의 시기가 지나 마침내 왕정복고 체제를 종식한 7월 혁명이 찾아왔을 때 즈음, 당대의 젊은 화가들은 대다수가 공화파 자유주의자들이었고, 낭만주의는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을 끌어내린 민중들과 함께 대중적 승리를 확인하게 된다.


일찍부터 자유주의자들 및 보나파르트주의자들과 친분을 갖고 있었던 외젠 들라크루아는, 마침내 그간 출품한 그림들을 통해 쌓아온 명성을 토대로 유리한 입지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7월 혁명이 일어난 것과 같은 해인 1830년 10월, 그는 형인 찰스 헨리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내가 조국을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역시 같은 해, 7월 혁명을 이끈 민중들의 영웅성과 혁명을 찬양하는 그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을 완성하고, 혁명군의 봉기가 가장 격렬했던 날짜를 의미하는 <7월 28일>이라는 머리 제목을 붙여준다.




Ⅳ. 결론


이로써 본고는 서론에서 제기했던 질문, 왜 프랑스의 낭만주의와 독일의 낭만주의는 같은 예술 경향의 아래에서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양극을 이루며 나뉘는지에 대한 간단한 답을 제시해보였다.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독일은 민족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할 국민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낭만주의를 호명했고, 이는 독일을 위협하는 “프랑스적” 가치에 대한 안티테제들로 구성되었다. 반면, 그 혁명의 주역이었던 프랑스에서 낭만주의는 제도화된 관변 예술의 흐름 아래에서 신고전주의와의 조용한 세대교체를 점진적으로 이뤄 나갔으며, 이미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우뚝 서 있던 프랑스 예술계의 개방적인 감성과 자신감은 계몽적 신고전주의가 낭만주의를 새 시대의 정신으로 기꺼이 수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낭만주의는 두 나라에서 공히 국민국가 건설기를 풍미했던 사조이니만큼, 어쩌면 두 낭만주의의 대조는 기실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의 대조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그렇게, 두 나라의 낭만주의는 안개 낀 고요하고 장엄한 숲 속의 십자가와, 삼색기를 휘날리며 거리를 가로지르는 혁명의 두 이미지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김인혜,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회화이념: 필립 오토 룽에의 〈시간〉 연작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18, 2002, pp. 53-64.


윌리엄 본, 마순자(역),『낭만주의 미술』, 서울 : 시공사, 2003.


제라르 르그랑, 박혜정(역),『낭만주의』, 서울 : 생각의 나무, 2004.


프레더릭 바이저,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서울: 그린비출판사, 2011.


Koerner, Joseph Leo. 『Caspar David Friedrich and the subject of landscape』. Reaktion books, 2009.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 본고에서 사용한 모든 이미지는 영문/불문/국문 위키백과(wikipedia.org)에서 가져왔다. <자유>의 출처는 아래의 웹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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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oerner, Joseph Leo. 『Caspar David Friedrich and the subject of landscape』. Reaktion books, 2009. pp. 210-211.


2) 프레더릭 바이저, 김주휘(역),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서울: 그린비출판사, 2011, p. 98.


3) 위의 책, p. 112.


4) 김인혜,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회화이념: 필립 오토 룽에의 〈시간〉 연작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18, 2002, pp. 57-58.


5) 서양 전통의 미학론이 미의 원리를 이성적 규칙의 구현에서 찾아왔다면, 낭만주의 미학에서는 인간 이성과 추론의 힘을 압도하는 크기 즉 ‘숭고’라는 개념이 도입된다. 요컨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은 이런 미학 이론의 분기와도 묘하게 포개지는 구석이 있다.


6) 윌리엄 본, 마순자(역), 『낭만주의 미술』, 서울 : 시공사, 2003, p. 35.


7) 제라르 르그랑, 박혜정(역), 『낭만주의』, 서울 : 생각의 나무, 2004, p. 38.


8) 그를 일컬어 “말을 탄 시대정신”이라고 한 헤겔과 “반인반신”이라고 평가한 괴테를 다시금 떠올려보면, 이런 감상은 꽤나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9) 르그랑, 앞의 책, p. 72.


10) 윌리엄 본, 앞의 책, p. 71.


11) 르그랑, 앞의 책,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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