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의 정치성-
예술에 관한 특별한 취향이 있지는 않더라도,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눈에 익은 사람들이 많을 테다. 안개가 자욱해 높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 아득히 높은 산 위에서, 그 밑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뒷모습이 남기는 인상은 그만큼 장엄한 느낌을 남긴다. 지팡이 하나를 짚고서 한쪽 발을 다른 한쪽보다 높게 걸친 채로, 말 그대로 ‘안개의 바다’가 넓은 산등성이 사이를 꽉 채우는 장엄한 풍경을 굽어보는 남자의 모습은 적잖이 비범해 보이는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등을 돌린 채 수평선 너머 지는 노을이나, 무한히 펼쳐진듯한 바다, 안개 낀 산등성이, 항구 도시에 내려앉은 밤의 어스름 등, 숭고한 자태를 자아내는 자연물을 바라보는 인물의 뒷모습을 즐겨 그렸다. 물론 회화 속에서 그림 밖 관람자에게 등을 돌린 인물의 모습이 프리드리히 이전에 그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지오토 벽화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The Art of Painting> 같은 회화들이 그 예다. 하지만, 이를 풍경화에 결부시켜 종교적 색채를 띠면서도 절제된 그림을 완성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렵다[1].
그런 그의 그림들 가운데서도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다른 그림들과 구별되는 배치 구조를 보여준다. 가령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와 같은 ‘등 돌린 사람’의 모티프를 사용한 <항구의 밤(자매들)>(이하 <밤>)은, 밤의 어스름이 내려앉은 항구를 바라보는 한 쌍의 등 돌린 자매를 그림의 하단부에 배치한다. <밤>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시선은 화면을 채우는 사물의 밀도가 가장 높은 그림의 가운데를 향하며, 동시에 등을 돌린 채 항구를 바라보는 두 여성의 존재를 지각하게 된다. 이내 감상자는 자매의 시선을 좇아 다시 시선을 위로 진행시키며 뾰족이 솟은 고딕 구조물과 돛대들이 즐비한 항구의 정경을 파악하고 비로소 화면 안의 정경을 종합적으로 인지한다. 말하자면, <밤>에서 등을 돌린 인물은 풍경을 향하는 감상자의 시선을 안내하는 장치인 동시에, 풍경의 일부이기도 하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이하 <방랑자>)는 다르다. 등을 돌린 인물을 정중앙에 배치했다. 프리드리히의 ‘등 돌린 사람’ 가운데서도 ‘방랑자’처럼 화면의 정중앙을 차지하며 시선을 빼앗는 작품은 드물다. 안개 낀 산등성이의 풍경을 눈에 담으려다가도 감상자의 시선은 이내 방랑자의 등에 부딪히게 된다. 심심한 화면의 상단은 감상자가 곧 시선을 돌리게 하고, 하단은 남자를 지탱하는 바위가 채우고 있어, 자연스레 방랑자에게로 시선이 진행하게 된다. 측면으로 눈을 돌려도 방랑자를 양옆에서 지탱하는 듯한 바위산과 방랑자의 가슴에서 양옆으로 사선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산 줄기를 따라 방랑자에게로 시선이 돌아오게 된다. 하단의 바위와 측면의 산 줄기가 그리는 사선으로 인해 화면의 무게 중심이 남자의 몸통을 향하며 방랑자의 시선보다 낮은 곳에 형성됨으로써, 방랑자가 그림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프리드리히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자연물의 숭고함’이라는 이념보다도 광활한 자연물을 굽어보는 남자의 위엄이 <방랑자>에서는 더 강조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방랑자>는 그의 다른 풍경화들보다도 훨씬 연극적이며 화가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방랑자는 <항구의 밤(자매들)>에서 보았던, 감상자의 시선을 안내하는 보조적 장치로서의 모티프가 아니라, 프리드리히가 특별히 강조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주인공인 셈이다.
방랑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작가인 프리드리히의 개인사적 맥락을 추적해보아야 할까? 물론, 엄격한 루터교 신자인 아버지를 둔 그의 가정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색채를 얼마간 설명할 수 있게 해줄지 모른다. 성장기에 그가 잇달아 겪은 어머니와 동생, 누이들의 죽음 역시,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자연의 초월적 힘에 대한 감정을 그의 내면에 심어주어 그의 회화의 주요한 테마가 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2]. 하지만 여전히 방랑자의 정체와 그가 상징하는 의미는 의문에 부쳐진다.
미술사학자인 Koerner는, 그의 정체에 대한 하나의 유력한 대답을 제시한다. 그림 속의 방랑자가 입고 있는 초록색의 옷은 자원 입대한 군인의 유니폼이며, 유니폼을 입고 있는 방랑자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나폴레옹에 대항해 동원한 포병대의 일원이라는 것이다[3]. 그렇다면 프리드리히가 살았던 시대의 거시적 맥락과 그 맥락 위에서의 프리드리히의 위치를 해석해볼 필요가 있겠다.
예술사적 흐름 속에서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 사조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위치지울 수 있다. 그는 낭만주의자로서 자연물이 주는 숭고의 심상을 탐닉했고 그래서 그의 그림은 ‘숭고회화’ 라고 불리운다. ‘숭고’라는 개념에는, 진즉 영국에서 유행한 숭고론의 흐름에서부터, 숭고를 미(美)와의 대조 속에서 파악한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 버크의 ‘미(美)’와 ‘숭고’의 구분을 계승한 칸트에 이르기까지, 미학적으로 해석되어 온 나름의 짧은 역사가 있었다. 버크에 따르면, “숭고의 지배적 원리”는 공포이며, 공포는 즉 ‘추론’의 힘을 앗아가는 강력한 감정으로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결부된 자기 보존의 욕망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다[4]. 칸트에 따르면 “숭고한 것이란 그것과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이 작은” 절대적으로 큰 것의 이념에 의해 생겨나며, 인간의 ‘종합적 표상능력’을 훨씬 능가함으로써 그 상상력을 위축시키는 것이다[5]. 즉 숭고를 탐구한 두 사상가에게 있어 숭고의 정념은, 항상 인간의 지성 작용이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맥락에서, 프리드리히의 숭고에 대한 도취는 그의 시대에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귀결된 정치적 격변을 낳았던 계몽주의에 대한 이념적 반작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세계관의 중심에 설정하고, 실험과 실증의 방법을 통해 그 어떤 도그마에도 구애받지 않고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자연을 다루었던 계몽주의의 이념 아래에서, 프리드리히가 보여준 것과 같은 자연의 숭고함은 있을 수 없었다. 인지적으로 완벽히 장악된 명징한 대상에서 숭고함을 느낄 수는 없는 이치이다. 버크가 숭고의 지배적 원리인 공포는 추론의 힘을 앗아간다고 말했듯, 얼마간 지적 이해를 유보함으로써만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 숭고의 정념이다. 숭고의 이념을 정치적 모범으로까지 생각한 에드먼드 버크[6]가 계몽주의의 결실인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열렬한 비판자였으며, 프리드리히 역시 반계몽•반혁명의 기치 아래 활동한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멤버였다는 사실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문예 비평가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버크에게 ”사회생활은 토대와 기원을 알 수 없는 재현의 무한 연쇄”[7]다. 버크는 “연쇄의 무한과 연쇄 각각이 상정하는 동일성”[8]을 보존함으로써 실체를 알 수 없는 사회의 기원을 획득하고, 기원적 자연으로부터 관습의 합법성을 찾아내고자 했으며, 급진적 변화에 대한 그의 완강한 거부는 이런 태도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미지의 자연에 대한 버크의 이같은 모종의 신비화는, 낭만주의자 프리드리히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닮았다.
마침 프리드리히가 19세가 될 때 즈음인 1793년은, 버크의 프랑스 혁명 비판서인 『프랑스혁명에 대한 고찰』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해이기도 했다[9]. 프랑스 대혁명은 구 질서를 보전하기 위해 혁명의 전복을 기도하는 내외 세력의 반동과 더불어 폭력적인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이런 가운데 독일의 지식인들은 잡지나 신문 따위의 지면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며 혁명에 대한 위협감을 하나의 사상적 흐름, 운동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낭만주의란 그 산물로서, 기실 프랑스 혁명에 대항해 ‘독일적’ 가치를 보호하고 통합하려는 정치적 활동이었다[10].
프리드리히가 1808년 이래 아른트와 같은 애국적 민족주의자들과 깊은 친교를 맺었다는 사실[11] 역시 그의 정치적 성격을 짐작케 한다. 버크에게 그랬듯, 프리드리히에게도 자연은 단순히 종교적이고 신비스러운 낭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이념이 지향하는 이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그가 독일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프랑스 패잔병의 모습을 그린 <숲 속의 사냥꾼>을 출품한 사실이나, 조국의 배신자들의 그림을 계획했다가 포기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는 사실[12]에서 그의 회화 작업의 정치적 동기를 읽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등을 돌린 인물이 화면의 중앙에 부각되는 <방랑자>의 이례적인 성격은 기실, 그 표현의 수위는 다를지언정 반계몽주의와 독일 민족주의의 이념적 표현이라는 프리드리히 회화들의 한 테마와 같은 계열 안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방랑자는 계몽주의가 추동한 혁명과 물질문화의 진보라는 역사적 흐름에 반항하고자 했던 프리드리히의 이념이 투영된 아이콘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그의 사후 그 그림이 나치 극우 민족주의의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한때 그의 그림에 덧씌워졌던 정치적 혐의를 두고, 그저 그를 이용하려 한 나치에 의해 억울하게 얼룩진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썩 정직한 사실 인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프리드리히의 그림이 그 작자가 저지르지도 않은 반인륜적 범죄에 연루되어 매도당할 필요는 없지만, 그를 옹호하기 위해 기어코 프리드리히의 대자연에 대한 흠모는 순결한 것이었노라 말하는 것 역시, 그 그림의 진가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게 할 뿐인 것은 매한가지다.
본디 정치적이었던 그의 그림을 그 시대적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읽어주는 것이야말로, 그에 대한 정확한 복원이다.
<인용 및 참고 문헌>
1) 이화진, “C.D.프리드리히(C.D.Friedrich)의 풍경화에 나타난 공간 구성 연구”,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제22집 (2004), p.92; 이유리, “그림으로 독일을 대변하다, 프리드리히의 <산속의 십자가>”, 『매일노동뉴스』2017년 5월, http://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 xno=144500.
2) 변기숙, “독일 낭만주의 철학이 회화의 미친 영향 -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eidrich) 작품을 중심으로”, 『유럽문화예술학회논집』, 제3집 (2011), pp.34-35
3) J.L.Koerner, Caspar David Friedrich and the Subject of Landscape (London: Reaktion Books, 2009), pp.210-211
4)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김민수, “숭고와 자기보존의 미학 탐구”, 『범한철학』, 제88집 (2018), p.267에서 재인용)
5) 임마뉴엘 칸트, 『판단력 비판』(안성찬, “숭고의 미학:그 기원과 개념사 연구”, 문학박사학위논문, 서강대학교, 2001, p.95에서 재인용)
6) 유경훈, “울스턴크래프트와 버크—프랑스대혁명과 계몽 논쟁”, 『영어영문학21』, 제26권
7) T.Eagleton, The Ideology of Aesthetic, (Oxford: Blackwell, 1990) (유경훈, 같은 글, p.155에서 재인용)
8) 유경훈, 같은 글, p.155
10) 김인혜,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회화이념”,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제18집 (2002), p.57
11) 김인혜, 같은 글, PP.57-58
12) 이화진, 같은 글, p.84
13) 이화진, 같은 글, pp.8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