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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소장이 «팩트풀니스»에 대한 날 선 비판을 페이스북에 포스팅했고, 이게 그 주변 페북 유저들 사이에서 좀 핫했고 논쟁도 있었나보다.
(가독성을 위해 아래부터는 별도의 인터넷 주소를 적지 않고, 본문에 바로 파란색의 하이퍼링크를 걸어둔다)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을 포함해, 스티븐 핑커나 빌 게이츠 같은 정치적 낙관주의자들이 역설하는, 내지는 암묵적으로 시사하는 어떠한 정치적 내러티브에 관심이 많고, 관련한 논쟁들에 관해 이것저것 살펴본 바가 있는 입장에서 여하튼 흥미로웠다.
홍기빈 씨가 언급했던 «팩트풀니스»에 대한 반박으로서 Jason Hickel의 이 글은 많은 나라들에서 국가별로는 그 국가 안에서의 불평등이 늘어났을지언정, 개발도상국들의 추격으로 인해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불평등이 완화되고 있다는 주장을 겨냥한다. 아마 그 한 꼭지에 불평등을 ‘절대적’ 소득 격차로 측정하면 지난 몇십 년 동안 세계적 차원의 불평등은 늘어났다는 반박을 제기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불평등을 로그 스케일, 상대적 불평등이 아닌 선형 스케일, 절대적 격차로 봐야 한다는 Hickel의 주장에 대해서는 브랑코 밀라노비치가 그 부조리를 잘 지적해놓았다.
Jason Hickel이 팩트풀니스 부류의 팡글로시안 내러티브에 대해 제기한 가장 설득력 있고 의미있는 비판은 “A Letter to Steven Pinker (and Bill Gates, for that matter) about Global Poverty”라는 글이다. 이 글의 논점에 대해서는 밀라노비치 역시 상당 부분 공감함을 밝힌 바 있다. 직접 이 글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긴 역사적 간격을 두고 소득과 부(wealth)의 수준을 직접 비교하는 것의 난점(다소 철학적인)을 지적하는 “Historical wealth: How to compare Croesus and Bezos”도 읽어볼 만하다.
Hickel이 “A letter...”에서 제기하는 비판은 이렇다. 스티븐 핑커나 빌 게이츠는 지난 몇십 년, 더 나아가 산업혁명 이래 200여 년 동안 극빈층의 비율이 급격히 감소했다지만, 이런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1)극빈층을 측정하는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하루 1.9 달러)이 지나치게 낮으며, 2)상대적 비율이 아닌 절대적 인구 수로 계산하면 지난 몇십 년 간 빈곤 인구의 수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3)그나마도 줄어든 빈곤 인구는 압도적 다수가 중국에 집중되어 있다. 4) 또한, 빈곤을 직접 측정하는 가계조사는 1980년대에야 비로소 시작되었고, 빌 게이츠 등이 전시하는 빈곤율 그래프에서 그 이전 산업혁명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계열은 GDP와 소득 분배에 대한 데이터로 추정한 빈곤율인데, GDP는 상품 가치가 없는 공유 자원은 제대로 집계하지 않기 때문에, 재화의 획득을 시장이 아닌 공유지에 기대는 비중이 높았던 전자본주의 경제의 빈곤율에 대해서 과대 평가하게 된다.
빈곤이나 불평등이나 모두, 상대적 비율이 아닌 절대적 수, 로그 스케일이 아닌 선형 스케일로 봐야 한다는 Hickel의 2) 주장은 썩 공감하기 어렵다. 1)과 3)에 대해서는, Max Roser와 Joe Hasell이 1.9달러보다 높은 빈곤선을 기준으로도 빈곤율은 줄어들었고,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들에서도 빈곤율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Hickel의 타겟이 빈곤이 줄어들었다는 사실 그 자체 이상으로, 그 같은 사실을 전시하는 정치적 내러티브(“자유 시장, 세계화 만세”)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좀 더 뉘앙스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Hickel은 하루 7.4 달러 수준의 빈곤선으로 중국을 제외한 세계의 빈곤율을 측정하면, 1980-90년대에 걸쳐서는 빈곤율이 오히려 증가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시기 중국의 경제 성장을, 서양 자본주의 국가들의 통상적인 그것과는 다른 성격의 모델로 설명해야 한다는 건, 적지 않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동의를 얻고 있는 사실이다. 이른바 “베이징 컨센서스” 운운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워싱턴 컨센서스’와는 차별화되는 개발 사례로서 밀라노비치나 대니 로드릭 같은 학자들 역시 입을 모아 지적한다.
Hickel은 1)세계은행이 사용하는 국제빈곤선이 지나치게 낮다는 논점을 강조하지만, 이 국제빈곤선에 대해 제기된 가장 대표적인 비판이고 Hickel 역시 아마 참조했을 Reddy & Pogge(2009), Wade(2004)는 단순히 빈곤선이 낮다는 내용은 아니다.
그 가운데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크리티컬한 비판은 이렇다. 서로 다른 화폐를 사용하는 나라들의 빈곤율을 통일된 기준으로 측정하기 위해서는 PPP 환율을 적용해 서로 다른 화폐들을 동일한 구매력의 액수로 맞추어줘야 한다. 세계은행의 2011년 달러 기준 하루 1.9달러라는 국제빈곤선 미만의 빈곤 인구도, 이렇게 PPP환율을 적용해 각 국가의 화폐로 변환하여 측정한다. 문제는, PPP 측정의 레퍼런스가 되는 재화의 바스켓이, 빈곤층의 소비 패턴을 반영하기보다는 세계 인구의 평균적인 소비 행태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빈곤층일수록 전체 지출에서 식료품에 대한 지출 비율(엥겔 비율)이 높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PPP를 계산할 때에는 식료품뿐만 아니라 보다 값싼 개발도상국의 용역 역시 바스켓에 포함된다. 따라서 실제 빈곤층이 지출하는 재화와는 상관이 없는 값싼 용역 때문에 빈곤선이 실제보다 낮게 설정된다. 즉 빈곤율을 실제보다 작게 추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소비 구조에서 용역의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에 의해, 이런 왜곡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이 추정한 PPP 환율을 적용해 계산할 때마다 더 커진다.
Reddy는 식료품으로 구성한 바스킷을 레퍼런스로 측정한 PPP로, 미 농무성이 필수 영양의 섭취를 위해 필요한 비용으로 제시한 5.04 달러 미만의 빈곤율을 측정한 결과, 애초 세계은행의 측정에 비해 빈곤율이 더 높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에서 2000년에 이르기까지 빈곤율은 세계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소 증가(68.9% -> 70%)하는 경향을 나타낸다는 걸 보여준다(Reddy & Lahoti, 2015).
이런 비판에 대해 아무런 대응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Deaton & Dupriez(2011)는 62개 개발도상국의 가구 서베이 자료를 이용해, 빈곤 가구의 소비 패턴으로 보정한 poverty PPPs로 측정해도, 큰 그림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Reddy의 입장은 단호하다. Hickel의 “A letter..”이 쏘아올린 논쟁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같은 주제에 관한 세계은행의 토론회에서, Reddy는 “미국과 케냐 사이의 PPP 환율이, (빈곤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상품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아니라) 일본의 소비 패턴, 스파클링 와인이나 고급차의 글로벌 소비 패턴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은 종류의 부조리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시니컬하게 얘기한다. 그에 따르면, poverty PPP를 사용한 측정도 부적절하긴 매한가지다. 빈곤층이 실제로 어떤 품목을 소비하고 있는지보다는, 어떤 소비가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누가 빈곤층인지를 가려내 빈곤율을 측정하는 것이 목표인데, 그 빈곤층이 이미 특정되어 있는 순환적 논리도 역시 문제다. 그러니, poverty PPP로 측정해도 빈곤율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건 Reddy에 따르면 당연한 결과다.
4)의 논점은 흥미롭지만, 1820년대 이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생활수준은 어쨌든 개선되지 않았느냐는 상식적인 반문에 부딪힌다. 영양 상태를 직접 반영하는 지표인 신장은 산업혁명기에 비해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대수명 역시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Hickel은 “It’s not thanks to capitalism that we’re living longer, but progressive politics”라는 가디언 칼럼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다. 거듭, 그의 목적이 빈곤은 줄어들고 세상은 더 살기 좋아졌다는 ‘팩트’ 이상으로, 그 팩트를 전시하는 정치적 내러티브에 태클을 거는 데에 있다는 걸 상기하자.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전례 없는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고, 그로 말미암아 사망률은 줄고 기대수명은 늘며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게 그 내러티브의 골자다. “It’s not thanks to...”에서 그가 시도하는 건 이 논리 사이의 연결고리 가운데 하나를 끊어내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와 경제 성장이 반드시 더 나은 삶(기대수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게 그의 논지다. 그가 이 칼럼에서 레퍼런스로 쓰는 Simon Szreter의 연구는 산업혁명기 인구사에서 must-read 가운데 하나다. 오늘 마침 브런치에 발행한 이 글에서도 다뤘다. 앵거스 디턴 역시 2006년 논문에서 Szreter의 설명에 무게를 실어주며, 최근의 연구로는 Chapman(2019)의 도구변수 추정 역시 Szreter를 지지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수명도, 다른 측면의 생활 수준도 따라서 증가한다는, 즉 정치적 개입 없이 경제의 풍요만으로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 정치적 낙관주의는 지나치리만큼 단순한 생각인 거다.
종합적으로, “A letter...”와 “It’s not thanks to...”에서 Hickel의 결론은 단순히 세상은 더 나빠졌노라는 얘기가 아니다. 혹여 내가 읽지 못한 행간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그건 틀린 생각임에 의심 없다. 최근 «세상이 나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라는, 이 논쟁에 매우 적합한 이름의 책을 집필한 오찬호 작가의 말로 갈음할 수 있겠다.
“낙관주의자들은 ‘왜 세상이 좋아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한 적 없다. 다만, 좋은 세상은 긍정의 자세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평등한 세상은 ‘더’ 불평등한 세상을 찾아야지만 가능하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끝없이 의심하는 비관적 자세는 결과를 낙관적으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부정하는 건 세상의 변화를 원치 않는 기득권의 익숙한 습관일 뿐이다.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하나의 팩트만이 부유하면, ‘그때 그 시절 덕택에’ 집집마다 자동차 굴리는 것 아니냐는 사람이 등장한다.”
Jason Hickel이라는 저자는 물론 중언부언해서라도 억지스레 본인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는 면이 있다는 인상이긴 하지만(젊어서 그런가 논쟁에서 마지막 말을 상대에게 넘기는 걸 싫어하는 듯하다), 하는 얘기들은 한 번쯤 들어봄직하다는 생각이다. 최근 서구 미디어의 담론장에서 눈에 띄는 신예라는 점에서, 누가 관심 좀 가지고 그 책도 번역도 해주고 하면 좋겠다. 그가 최근 환경 문제에 대해 쓴 글은 나도 좀 읽어보고 싶으니까.
+) 관련된 쟁점, 문헌, 내용들을 생각나는대로 써내려간 글인데, 꽤나 공유가 많이 되어서, 더 정리된 글인 아래 글을 링크한다.
«팩트풀니스»,«지금 다시 계몽» :그건 계몽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