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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 Oct 21. 2021

«지금 다시 계몽» 비판: '빈곤'의 팩트, 혹은 팍툼

«팩트풀니스»와 «지금 다시 계몽»이 몰랐던 것

 '신낙관주의자'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은 TED 혹은 EBS 강의에서 기대수명의 증가와 극빈율의 감소, 재해 사망자의 감소, 전투 사망자의 감소, 민주주의의 확산 등 수많은 '데이터'를 통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보인다. 하지만, 삐딱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반문할 법도 하다: "그 '데이터'는 진짜야?"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하지만, 이들이 조작된 가짜 데이터로 약을 파는 하수는 아니다. 스티븐 핑커는 그가 출연한 EBS 프로그램 <위대한 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론, 데이터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조작되기도 하거든요. 가짜일 수 있어요. 당연히, 뉴스도 거짓일 수 있습니다. 조작될 수 있죠. 또, 완전하지 않은 데이터가 오해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기자, 과학자, 통계학자, 작가들이 데이터 출처를 확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대표성이 있는지, 오염되지는 않았는지도 확인을 해야죠.


 실로,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이 인용하는 주요한 통계들 중, 그 어떤 '조작'이나 '가짜'나 '오염'을 찾기는 어렵다. '신낙관주의자'들의 데이터를 두고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그게 진짜냐" 따위가 아니다. 이렇게 고쳐 물어야 한다: "조작되지 않은 진짜 데이터는 과연 진실인가?" 


 우리가 '팩트'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그것이 인식 주체의 주관에 대해 독립인 ‘객관적’ 사태라는 존재론적 가정이 우리의 내심에 은밀히 자리잡는다. 하지만, 정작 ‘팩트’의 라틴어 어원인 '팍툼(factum)'에는 '만들어진 것(제품; the product)'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사실, '신낙관주의자'들이 '팩트'라고 주장하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인간이 제작한 개념적 구성물에 바탕을 둔, 그야말로 '팍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빈곤은 줄어들고 있고,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며, 사회는 더 민주적으로 변한다는 신낙관주의자들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검증하려 들면, 당장에 '빈곤'과 '평화', '민주주의' 따위의, 인류가 고안해낸 추상적 개념들을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부상한다. 사회과학자들은 조작화를 통해 이 구성개념들을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다시 정의하여 연구에 사용한다. 그래서, 항상 이 사회과학 연구들에서는 과연 측정하고 있는 현상이 우리가 애초에 연구하고자 했던 그 개념과 얼마나 정확히 대응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방법론적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빈곤은 줄어들었다느니, 사회가 더 민주적으로 변한다느니 하는 '팩트'들은 이 조작적 정의의 제약 아래에서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신낙관주의자들의 '팩트 폭격’에서 생략된 건 바로 이런 의미관계다.


 이런 중요한 의미관계의 누락이 현실 진단을 크게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로는 이들이 입을 모아 인용하는 ‘극단적 빈곤’의 감소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산업화 이래 먹고 사는 데에 긴요한 기본적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극단적 빈곤' 인구의 비율이 눈부시게 감소해왔다고 주장한다.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의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로슬링이 «팩트풀니스»에서 던진 이 3지선일의 객관식 문제에 4-5%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국인과 한국인들이 "거의 2배로 늘었다", 혹은 "거의 같다"는 선택지를 골랐지만, 로슬링에 의하면, 지난 20년 동안 극빈층의 비율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이 극빈율 통계는 ‘기대수명’ 통계와 함께, 한스 로슬링이 «팩트풀니스»의 2장 ‘부정 본능’에서 세상이 실제로는 더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로 인용하는 통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통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 다시 계몽»에서 스티븐 핑커 역시 1820년 거의 90%에 육박했던 극빈층 비율은 200년 사이에 10%로 감소했으며, 그 감소 중 절반이 지난 35년 동안, 즉 1980년 이후 2015년까지의 기간 동안 이뤄졌다고 말한다(p.144).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신낙관주의자'들에게 인류의 대다수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 있다는 소식만큼 기쁜 소식은 또 없다.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살림살이가 팍팍하고, 인심이 강퍅해지는 것 같아도, 인구의 절대 다수가 기본적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궁핍한 삶을 살았던 과거가 더 나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림 1의 그래프는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이 이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진 "극단적 빈곤"의 비율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그래프다. 산업화 이전에는 전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극단적 빈곤에 시달렸지만, 이후 이 비율은 눈부시게 감소했으며, 특히 최근으로 올수록 그래프의 기울기가 더 가팔라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불과 몇 년 안에 빈곤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도 허황된 꿈은 아닌 것 같다.


그림1. 1820-2015년 "극단적 빈곤" 인구 비율


 하지만, 이런 손쉬운 낙관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이 '팩트'의 사실관계를 보다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의 그래프는 '빈곤', 그것도 '극단적' 빈곤을 측정하기 위해, 어떤 조작적 정의를 사용하고 있을까?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이 인용하고 있는 그래프들은 모두, 세계은행(World Bank)에 의해 정의된 국제빈곤선인 1.9 달러(2011년 달러)의 기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하루 1.9 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극단적 빈곤"으로 정의했다. 한스 로슬링이 그의 저서 «팩트풀니스»에서 소득 수준 1단계로 분류한 구간과도 대략 일치한다. 그럼, 이 1.9 달러의 빈곤선은 빈곤을 측정하기 위한 적절한 기준일까?





 하루에 고작 1.9달러로 최소한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가능할까? 연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생활수준을 누리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그렇다”라고 대답하기는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해볼 법 하다: “'1.9 달러'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매우 작은 가치일 뿐이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저소득 국가들에서는 그보다 훨씬 큰 구매력을 갖고 있지 않을까?” 단도직입적으로, 그렇지 않다.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 1.9 달러는 나라별 물가 수준과 그로 비롯한 구매력의 차이를 반영한 2011년 PPP 달러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 즉 이론적으로는, 저소득 국가들에서도 2011년 미국에서 1.9 달러가 보유하고 있는 구매력과 동일한 구매력의 화폐로 환산된다. 이 PPP 달러를 한국 화폐인 원(₩)으로 환산한 후, 2011년과 2020년 사이 소비자물가상승률을 반영해 2020년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한 달 6만원에 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따라서, 세계은행의 "극단적 빈곤"의 정의는 한국에서 한 달 약 6만원, 하루 약 2000원 정도로 사는 것에 준하는 상태인 셈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세계은행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낮은 빈곤선을 기준으로 빈곤율을 측정하는 것일까?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보다 높은 기준으로 빈곤을 측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물론, 1.9 달러는 국민소득 3만 달러 국가의 시민에게는 있으나마나 한 하찮은 티끌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이미 배가 부른 ‘가진 자’들의 건방지고 재수없는 관점일지도 모른다. 세계은행이 사용하는 국제빈곤선의 연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경제학자 라발리온(Martin Ravallion)의 작업들이다. 1991년 라발리온은 그의 논문에서 33개 국가의 빈곤선을 1985년 PPP 달러로 환산하여 비교해보았다. 그랬더니 저소득 국가들 가운데 6개 국가의 빈곤선이 한 달 31 달러 수준에 형성되어 있었고(Ravallion, Datt & van de Walle 1991), 이 한 달 31달러의 빈곤선이 곧, 이후 세계은행이 사용한 하루 1달러 국제빈곤선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2001년, 라발리온은 표본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은 10개 빈곤선의 중위값을 취해 1993년 PPP 달러 1.08달러로 국제빈곤선을 수정했고(Chen & Ravallion, 2001), 2008년에는 보다 큰 74개 국가의 표본으로부터 그 가운데 가장 가난한 15개 국가의 빈곤선을 2005년 PPP 달러로 환산, 국제빈곤선을 1.25 달러로 업데이트했다(Ravallion, Chen &  Sangraula, 2008). 그리고 가장 최근에 사용되는 1.9 달러의 빈곤선은 라발리온이 도출한 빈곤선을 물가의 변화를 반영해 2011년 PPP 달러로 환산한 세계은행 소속 경제학자들의 연구(Ferreira et al., 2016)를 따르고 있다. 즉,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은 빈곤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을 바탕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표본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빈곤선을 동일한 단위로 환산해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 적용하면, 빈곤선이 비교적 높은 나라들의 빈곤율은 과소평가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딴지에 대해서는 다음처럼 반박해볼 수 있다: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은 모든 빈곤을 측정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기준일지 모르겠지만, 가장 보수적인 추정으로서, 그 어떤 눈높이로 바라보든지 “빈곤하다”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가난을 측정하는 데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라발리온은 전체 표본 국가들 사이에서는 그 나라의 평균적인 소비 수준이 증가함에 따라 빈곤선도 따라서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 양(+)의 기울기를 보이지만, 국제빈곤선 근처에 빈곤선을 형성하고 있는 가장 가난한 나라들 사이에서는 그런 관계가 비교적 약하거나, 혹은 그 기울기가 “평평(flat)”하다고 주장한다(Ravallion, Datt & van de Walle 1991; Chen & Ravallion, 2001; Ravallion, Chen &  Sangraula, 2008). 말하자면,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빈곤선은, 그 나라의 소득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의미의 빈곤이 아니라, 최소한의 보편적 필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 의미의 빈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한 것. 세계은행이 1.9 달러의 국제빈곤선을 통해 측정한 빈곤을 기본적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극단적 빈곤”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근데,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은 단순히 그 기준이 지나치게 낮다는 데에 그 문제가 있지 않다. 더 복잡한 문제가 세계은행이 빈곤선을 환산할 때 사용하는 '구매력평가(Purchasing Power Parity; PPP)'라는 개념에 있다. 세계은행은 국제빈곤선을 계산하기 위해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빈곤선을 ‘달러($)’라는 동일한 단위로 환산한다. 이 환산에 적용되는 것이 바로 ‘구매력평가지수(Purchasing Power Parities; PPPs)’. 예를 들어, 한국에서 1.9달러 미만 빈곤율을 계산하려면 1.9달러를 한국의 화폐인 원(₩)으로 변환하여야 하는데, 단순히 달러/원 환율을 적용해 변환하면, 한국과 미국의 물가 차이 때문에 구매력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런 차이를 제거하고 미국의 1.9 달러와 동일한 구매력을 가진 한국 원(₩)이 얼마인지를 계산하기 위해 필요한 게 PPP 환산율이다.


 이 구매력평가(PPP)의 개념을 가장 쉽게 이해해볼 수 있는 예시는 '빅맥 지수'다.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전세계의 맥도날드 체인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빅맥 햄버거의 가격을 달러로 환산해, 여러 나라들 사이의 물가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지수, 즉 빅맥 지수를 발표해왔다. «이코노미스트»에 의하면, 2021년 7월 기준 빅맥 가격은 한국에서는 4600원, 미국에서는 5.65 달러로, 곧 동일한 구매력(=빅맥 하나를 살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진 두 화폐 사이의 교환비율은 814.16이다(실제 원/달러 환율인 1150.35에 비해 29.2% 낮다; The Economist, 2021). 세계은행이 적용하는 구매력평가지수의 산출은 물론 빅맥지수보다 복잡하지만, 그 기본적 논리는 이 빅맥지수의 논리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빅맥지수는 고정된 재화(빅맥 햄버거) 하나만을 기준으로 측정된다면, 세계은행의 PPP 환산율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여러 재화와 용역의 집합(바스켓)에 대해 집계된다는 것이 차이다.


 경제학자 산제이 레디(Sanjay Reddy)에 의하면 이 PPP의 기준 바스켓이 세계은행의 빈곤 측정이 안고 있는 문제다. 빈곤층이 생계를 유지하거나 혹은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재화가 아니라, 전체 인구가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재화와 용역을 반영하기 때문(Reddy & Pogge, 2009). 예를 들어, 저소득층일수록 전체 지출에서 식료품의 지출 비율('엥겔지수')이 높다는 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만큼, 빈곤층이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먹거리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무엇보다, 우리가 '빈곤'을 측정하는 궁극적 이해관심이 생명체로서의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궁핍의 실태를 파악하는 데에 있다면, 생명 기능의 유지를 위한 물질대사와 직결되어 있는 음식의 섭취에 더 큰 관심을 두는 것이 더욱 당연하다. 즉, '극단적 빈곤'을 측정하는 본디의 목적을 만족시키려면, 인구의 일반적인 소비 성향을 반영하는 재화 및 용역 집합에 대한 구매력이 아니라, 이런 '기본적 욕구'의 충족과 직결되는 재화에 대한 구매력을 측정해야 한다. 하지만,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을 달러로 환산하기 위해 일반 구매력평가지수를 적용하면, 그 나라들에서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빈곤선 수준만큼 구매하는 데에 필요한 달러가 얼마인지가 아니라, 인구의 평균적인 소비 품목을 그만큼 구매하는 데에 필요한 달러가 얼마인지를 계산하게 되는 셈이다. 마찬가지의 오류가 달러로 환산한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을 전세계 각 국가의 화폐로 환산할 때에도 발생한다. 실제로는 빈곤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식품 따위의 품목을 1.9 달러 어치 사는 데에 필요한 루피(인도 화폐)의 액수를 계산해야 인도의 빈곤선을 보다 정확히 측정할 수 있지만, 인구의 평균적인 소비 품목을 1.9 달러 어치 사는 데에 필요한 루피가 얼마인지를 계산하게 되는 셈이다.


 레디의 계산에 의하면 식품의 물가로 환산율을 계산해 빈곤선을 환산하면, 각 나라의 화폐로 환산된 국제빈곤선이 전체 품목으로 계산한 구매력평가지수를 적용했을 때보다 높아진다(Reddy & Pogge, 2009). 세계은행의 방법론이 많은 나라들에서 빈곤율을 실제보다 낮게 측정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증거다(물론, 빈곤층이라고 해서 모든 소득을 식품을 구매하는 데에 사용하지는 않겠지만, 일반 인구의 소비 성향보다는, 식품에 대한 구매력이 '빈곤'의 구성개념에 비추어 더 타당한 접근이라는 것이 레디의 입장이다. 또한, 일반 PPP 지수로 환산한 비용보다 실제 가난한 나라들에서 해당 재화를 구매하는 데에 소요되는 비용이 더 높은 건 식품 뿐 아니라 다른 상당수의 기본 필수재들 역시 마찬가지다; Pogge & Reddy, 2006). 뿐만 아니라, 식품 가운데서도 특히 주식에 가까운 곡물 및 빵의 물가로 PPP 환산율을 계산해 적용하면, 국가별 소비 수준과 빈곤선 사이의 관계도 보다 더 가파른 기울기로 변한다. 즉, 라발리온이 주장한, 빈곤선이 가장 낮은 저소득 국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그 평균적인 소비 수준과 빈곤선 사이의 "평평한(flat)" 기울기(Chen & Ravallion, 2001)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레디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들 나라의 빈곤선도 1993년 가치로 한 달 26달러에서 87달러의 사이에 소비 수준과 비교적 완만한 양(+)의 기울기(탄력성; 독립변수의 변화율에 대한 종속변수의 변화율)를 가지며 분포하는데, 빈곤선을 빵 및 곡물의 물가를 기준으로 PPP 환산했을 때에는 전체 품목의 물가로 PPP 환산율을 적용했을 때에 비해, 그 기울기가 두 배로 커졌다. 즉, 빈곤층의 생활수준과 가장 밀접한 식품들(빵, 곡물)에 대한 구매력을 기준으로 빈곤선을 측정했더니, 가난한 나라들에서도 한 나라의 1인당 소비 수준의 증가는 빈곤선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통계적 관계가 있었다. 레디의 분석대로라면,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이 소득 수준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최소한의 욕구를 반영한다는 주장도 그 근거가 취약해진 셈이다(사실, 보다 최근 자료를 바탕으로 한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식품 PPPs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최빈국들의 빈곤선과 소비 수준 사이에 양(+)의 기울기가 나타난다; Jollife & Prydz, 2016).


 그럼, 식품의 물가를 반영한 구매력평가지수로 빈곤율을 계산하면 그 시계열적 추이는 어떻게 변할까? 우선, 레디에 의하면 '1.9 달러'는 어떤 역량이나 기본 욕구의 비용에 기초하지 않은 자의적 기준이다. 반면, 미국 농무부의 영양 정책 진흥 센터(Center for Nutrition Policy and Promotion)는 미국에서 권장 식이 허용량(Recommended Dietary Allowance)을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2인 자녀 포함의 4인 가구 기준 일인당 하루 5.04 달러로 추산한 바 있는데, 레디는 PPP가 모든 나라들에서 똑같은 수준의 구매력을 보전한다는 논리를 따르면, 국제빈곤선은 기준 국가인 미국에서 역시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구매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5.04 달러를 ‘식량 빈곤선’의 기준으로 제시한다(Reddy & Lahoti, 2015). 그리고 이 ‘식량 빈곤선’에 그 구성개념(‘권장 식이 허용량’)과 일관되게 식품 PPP지수를 적용해 환산하여 빈곤율을 계산하였더니, 1.9 달러의 빈곤선에 일반 PPP지수를 적용했을 때보다 빈곤 인구가 훨씬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같은 5.04 달러의 빈곤선에서도, 식품 PPP지수로 환산했을 때 일반 PPP지수로 환산한 경우보다 빈곤 인구가 더 많이 계수되었다. 레디의 연구에 의하면, 5.04 달러 미만 빈곤 인구 수는 1980년 28억 8천만 명에서 38억 8천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빈곤율 역시 1980년 68.9%에서 2000년 70%로 소폭 증가하였다가, 2000년대 이후에야 의미있는 감소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그림 2).


그림2. 5.04달러 식량 빈곤 비율(‘Food ($5.04)’)과 1.9달러 ‘극빈율’(‘GC ($1.90)’)






 근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PPP지수의 문제는 주어진 한 시점에서 서로 다른 화폐의 구매력을 비교하는 것과 관련한 것이지만, 이 비판을 시계열적 차원에서 한층 더 밀어붙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세계은행은 서로 다른 화폐를 통일적인 단위(달러)로 환산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연도의 화폐가 동등한 가치를 보유하도록 물가지수를 적용해 명목금액을 실질금액으로 환산한다. 여기서도 PPP지수와 비슷하게, 물가지수를 산출하는 기준이 되는 재화와 용역의 집합이, '빈곤'이라는 구성개념에 비추어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즉, 전체 인구의 소비 패턴을 반영하는 일반적 재화들의 물가 변화가 아니라,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에 필요한 재화의 물가 변화를 측정해야 하지만, 세계은행이 사용하는 물가지수는 일반적 물가 변동을 반영하는 지수다. 뿐만 아니라,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 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그 사회에 통용되는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누려야 할 새로운 종류의 재화와 용역이 생기기도 한다. 가령, 일터와 가정이 물리적으로 멀지 않았던 농업사회에 비해, 도시화가 한층 진척된 산업사회에서는 먼 거리의 통근을 위한 대중교통이나 자가용의 유류비 등의 비용이 새로 발생한다. 이런 경우, 빈곤층의 구매력이 향상하더라도 그 증가한 구매력의 상당수가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수반한 새로운 종류의 비용에 의해 흡수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빈곤층의 소득과 소비의 증가가 실제로 그 생활수준의 의미있는 향상에 기여하지 못했더라도 빈곤율이 감소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시계열적 비교의 문제가 더욱 중요한 것은, '극빈층 비율'의 시계열적 변화를 견인한 가장 핵심적인 두 주역 가운데 하나인 인도의 사례 때문이다(나머지 하나의 주역은 중국이다). 인도 경제학자 웃사 파트낙(Utsa Patnaik)은, 시계열적 비교의 매개인 물가지수가 극빈층의 소비 패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까닭에, 인도의 빈곤율이 생활수준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감소하는 통계적 착시가 있다고 주장한다(Patnaik, 2007). 높은 경제성장률로 통계 상으로는 빈곤율이 감소하는 시기에, 보통 ‘영양 결핍(undernutrition)’ 상태로 간주되는, 하루 2100 칼로리 미만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인구의 비율은 증가했다는 것. 개방 이후 인도의 경제 성장 및 빈곤율, 영양 상태 사이의 이 언뜻 모순적인 관계는, 여러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과 다양한 해석을 일으킨다(Deaton & Drèze, 2009). 따라서, 파트낙의 주장처럼 통계상 영양 섭취의 악화를 전적으로 빈곤의 증가로 간주하는 건 다소 과격한 해석이다. 인도 빈곤층이 실제로는 경제력이 높아졌지만 영양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음식에 소비하지 않기로 자발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Banerjee & Duflo, 2012), 산업 구조의 변화와 육체 노동 지출의 감소 따위로 과거와 같은 수준의 영양 섭취가 불필요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Deaton & Drèze, 2009; Eli & Li, 2012), 실제로는 더 많은 음식과 영양을 섭취하지만 가계 조사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누락된 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Smith, 2013). 하지만, 이런 사정들을 고려한 여러 변수들을 모형에 포함하여 통계적 분석을 수행했을 때에도,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한 비용 증가가 인도의 통계 보고 상 영양 섭취의 감소로 이어진다는 최근의 실증 연구(Basole & Basu, 2015)는, 통계 상 영양 섭취의 감소 추세가 얼마간은 실제 후생의 후퇴 요인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Basu & Basole, 2012)을 지지해준다. 가계조사 상 보고된 영양 섭취의 통계보다 더 안정적인 영양 상태의 지표로 여겨지는 신체측정 지표도 이런 해석과 얼마간 일치하는 추이를 보여준다. 생활수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여겨지는 아동의 신체측정 지표의 개선이 높은 경제 성장률에 비해서 기대에 못 미치는 기록을 보여준 것. 특히 장기적이고 만성적인 영양 상태를 반영해 위생 환경의 개선과도 관련 있는 발육 부진(stunting; 연령 대비 신장으로 측정)과는 달리, 단기적 영양 상태를 반영하는 소모(wasting; 신장 대비 체중으로 측정)의 비율은, 90년대 이후 지속적이고 뚜렷한 개선의 추세를 보이지 않는다.


 이 밖에도 세계은행의 빈곤선이 과연 타당한 근거가 있는지 의심할만한 이유는 더 있다(Reddy & Pogge, 2009). 단적으로, 빈곤율이 높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의 물가 자료가 선진국들에 비해 신빙성이 낮다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같은 재화에 대해서도 빈곤층이 부담하는 물가 수준은 그 나라의 일반적 시민들이 경험하는 물가와는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빈곤층은 같은 물건을 구입하더라도 더 적게 구입할 수밖에 없어 높은 단가를 지불하게 되기 때문이다(Rao, 2000). 더욱이, 통계 자료를 생성할 사회적 인프라가 부실하고, 빈곤 통계가 정치적 고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을, 과연 액면가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Fischer, 2018). 세계은행의 빈곤선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검토한 끝에, 유엔(UN)의 '극단적 빈곤 및 인권 문제에 관한 특별보고관'을 지낸 필립 올스턴(Philip Alston)은,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된 최종보고서에서 1.9달러의 국제빈곤선을 바탕으로 한 세계은행의 접근이 빈곤 문제의 실태를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서는 부적절하다고 결론짓는다(Alston, 2020).






 1.9 달러의 빈곤선이 가지고 있는 또다른 문제는 작은 오차에 민감하다는 것. 경제학자 앤디 섬너(Andy Sumner)와 피터 에드워드(Peter Edward)는, 빈곤선의 크기에 따른 인구 밀도의 분포를 그려보았을 때, 1.9달러 빈곤선은 인구 밀도가 높은 구간에 속해서, 빈곤선의 단 10센트만큼의 오차도 통계상 빈곤 인구를 1억 명 증가시킬 정도로 결과의 큰 차이를 낳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Edward & Sumner, 2016). 섬너와 에드워드가 빈곤율 감소의 실태가 세계은행 통계의 전망만큼 대단히 '낙관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또다른 이유는, 빈곤율이 감소하는 세계적 추세에 단 한 개 국가인 중국의 기여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인구수가 가장 많은 중국에서 빈곤율이 빠른 속도로 감소하며, 전체적인 추세 역시 우하향의 궤적을 그리게 된 것.


 섬너와 에드워드가 '1.9 달러'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5달러다. 전세계 국가들의 빈곤선의 평균과 세계 시민들의 소비 수준의 중위값이 모두 하루 5달러 즈음에 형성되어 있으며, 측정오차에 대한 민감도가 크게 낮아지기 시작하는 구간도 5달러 근처이기 때문이다. 그림3에서 파악할 수 있듯, 세계은행의 1.9달러 빈곤선을 기준으로는 1981년부터 빈곤율이 우하향의 직선을 그리며 최근까지 빠른 속도로 감소해왔지만,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서는, 1981년부터 1999년까지 5달러 미만 빈곤율이 55.3%에서 59%로 증가한다(물론, 빈곤율이 높은 개발도상국들의 인구 증가율이 선진국보다 높다는 점을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 물론 그 이후 2000년대 이래에는 다시 감소하기 시작해 2016년 46.5%를 기록하지만, 애초 빈곤율이 증가하기 이전 1981년에 비해서는 35년 동안 8.8%p 감소한 수준일 뿐이다. 즉, 스티븐 핑커가 산업화 이래 이뤄진 빈곤율 감소의 절반이 일어난 시기로 지목한 기간동안 이뤄진 변화의 보다 구체적인 실상이다. 세계은행의 기준을 따라 그린 애초의 그래프에 비해 빈곤율이 단순히 더 높을 뿐만 아니라, 특히 1980-90년대의 약 20년에 걸쳐서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추세 역시 감소세가 아닌 완만한 증가세로 나타난다. 세계적 차원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 역시, 중국을 제외하고 나면, 2000년까지는 증가하는 추세를 관찰할 수 있다.



그림3. 중국 바깥 5달러 빈곤율(‘$5.0, excl.CHN’)과 세계은행의 1.9달러 빈곤율($1.9)


 물론, 세계은행의 '틀린' 빈곤선 대신 다른 '진짜' 빈곤선(즉, '5달러')으로 그래프를 그리는 게 세계은행의 빈곤 측정법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스티븐 핑커는 더 나아가, 전세계의 소득 분포 자체가 상향 이동했기 때문에, 빈곤이 감소했다는 자신의 ‘팩트’는 어떤 빈곤선을 선택하는지와 무관하게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논리가 타당하려면 같은 수준의 소득이 세계의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시기에 걸쳐 비슷한 구매력과 생활수준을 보장해야 한다. 어떠한 기준으로든 생활수준 사이의 비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측정의 일관성이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에드워드와 섬너의 '5달러 빈곤선'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앞선 연구들에서 보다시피 이는 사실과 멀다. 따라서, 지역과 국가별로 여러 빈곤선 근처의 소득 분포의 변화를 조금 더 뉘앙스 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평균적인 소득 수준이 비교적 낮고 사회적 개발 수준이 낮았던 아시아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는 1.9 달러의 빈곤선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에 비해 사회 경제적 수준이 높았던 지역에서 살아가는 빈곤층의 생활수준 변화는, 보다 높은 빈곤선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을 테다.


 세계은행은 “앳킨슨 리포트”라고 불리우는 보고서의 권고를 수용해 소득 수준에 따라 빈곤선을 차별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즉 세계은행의 소득 분류 기준에 따라 빈곤선을 달리 계산하면 중하위 소득(lower-middle income) 국가 빈곤선의 중위값은 하루 3.2 달러, 중상위 소득(upper-middle income) 국가 빈곤선의 중위값은 하루 5.5 달러다(Jollife & Prydz, 2016). 세계은행의 분류체계 상 ‘저소득 국가’의 빈곤선에 해당하는 1.9 달러를 제외하고는, 모든 빈곤선에서 2000년까지 중국 바깥의 빈곤율이 소폭 증가하고 있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4). 1.9 달러의 빈곤선에서도 인도의 기여를 제외하면 중국 바깥 세계의 빈곤율은 2000년까지 뚜렷한 변화 없이 정체하는 양상을 띤다. 같은 기간 인도 빈곤율의 감소를 액면가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웠던 사정을 고려하면, 어떤 기준으로든 빈곤 상태가 명백하게 개선되기 시작하는 건 2000년대 이후다. 스티븐 핑커가 1820년 이래 인류사에서 이뤄진 빈곤율 감소의 '절반' 가까이가 일어난 시기로 지목한 35년의 기간 중 첫 절반(1981-99) 동안, 사실 중국 바깥에서는 빈곤의 개선이 정체하고 있었다.



그림4. 수준별 국제빈곤선에 따른 빈곤율 ("excl.CHN": 중국을 제외한 빈곤율)


 최근 경제학자 로버트 앨런(Robert Allen)에 의해 제안된 방법으로 극빈율을 새로이 계산한 미카일 모아소스(Michail Moatsos)의 연구도 비슷한 패턴을 드러낸다(Moatsos, 2021). 그간 세계은행 식의 빈곤 측정법에 제기된 비판은 대략 PPP와 CPI 등 지수 문제에 수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다른 단위로 측정된 다른 연도, 다른 지역들의 소득 수준을 일관되게 비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들 지수들이기 때문이다. 이 지수의 사용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를 피하는 방법은, 애초에 지수를 통해 소득을 환산하여 빈곤율을 계산하지 않고, 매 시점 지역별로 그 빈곤선을 그 고유한 화폐 단위로 측정해 계산하는 것. 즉, 당해 연도 그 지역의 물가 자료를 이용해, 각 품목의 영양 함량과 그 물가라는 제약 아래에 일정한 수준의 영양 함량을 섭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득을 계산하는 최적화를 수행하여 그 지역 화폐로 빈곤선을 정하고 빈곤율을 측정한 것이 앨런의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Allen, 2017).


 이같은 방법으로 ‘극단적 빈곤’ 비율을 다시 계산한 모아소스 데이터의 시계열은, 세계은행의 방법으로 그린 애초의 그래프(그림 5의 노란색 그래프)와 비교해보았을 때 1980년대 이후의 전개가 사뭇 다르다. 1980-90년대 20년을 그 전후 20년씩과 비교해보면 문제가 명료히 보인다. 대체로 장기적으로는 빈곤율이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지만 노란색 그래프와는 달리, 그 추세가 8-90년대에는 정체하는 것.


그림5. 기준과 방법을 달리 한 극빈율;"excl.CHN": 중국 제외, “excl.CHN&IND”: 중국과 인도 제외, “DAD”: 세계은행의 방법(“Dollar A Day")


 이 ‘사실관계’에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가 있다. IMF,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의 주도 하에, 8-90년대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함께 세계 시장으로의 통합을 단행한다. 스티븐 핑커와 ‘신낙관주의자’들의 ‘극빈’ 비율 그래프가 보여주는 건, 바로 이 시기에 세계의 가장 궁핍한 사람들이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는 비슷한 구간을 맴돌다가 80년대 이후 급격한 기울기로 감소하기 시작하는 그림5 노란색 그래프의 궤적이 정확히 그런 내러티브를 뒷받침한다. 스티븐 핑커는 같은 방법으로 그려진 극빈율 그래프를 들이밀며,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빈곤 인구들을 가난의 구렁텅이로부터 구원하고 있는 '위대한 수렴'은 80년대 이후 전개된 세계화의 물결과 공산주의의 몰락에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계몽», pp.148-151). 애덤 스미스 연구소는 이 그래프의 의미를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준다. "자유 무역과 세계화, 워싱턴 컨센서스”, “신자유주의” 덕분에, 인류 역사상 빈곤이 가장 크게 줄었으며, 불평등도 감소했다는 것(Worstall, 2016). ‘팩트’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자본주의’ 편이다!


 근데 빈곤층의 살림을 보다 현실적으로 반영한 방법으로 극빈율의 시계열을 다시 그려보면 그림이 사뭇 달라진다는 점을, 이들은 알지 못했다. 저 국제금융기구들이 주도하는 세계화가 가장 급진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에 실은 극빈율의 개선이 정체되기 시작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상승하기도 했다는, 신낙관주의자들의 그래프가 보여주지 않는 이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그들의 ‘팩트’는 와해된다.


 2000년대 이후 극빈율 감소를 견인하는 두 주역이 중국과 인도라는 점 역시 눈에 띈다. 2000년부터 18년 동안, 모아소스 데이터에서 전세계의 극빈율은 25.4%에서 10%로 약 15.4%p 감소하지만, 두 나라를 제외하고 계산해보면 20.2%에서 11.8%로 약 8.4%p 감소했을 뿐이다. 이들 두 나라는 IMF나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들의 지도가 아니라, 국가 주도의 전략적 결정에 의해 점진적으로 세계화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다른 ‘남반구’ 개발도상국들과 차별화되며, 특히 중국은 과거 같은 공산주의 계획경제를 운용하던 러시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과도 사뭇 큰 대조를 이룬다. 과거 소련 출신의 이행기 국가들에 비해 중국의 경제 개발은 여전히 가격 통제와 공공 소유 등 계획 경제의 요소를 크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은 국유 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가장 큰 나라이기도 하다(Rodrik, 2011; Piketty, Yang & Zucman, 2019).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통계가 ‘자유 시장’의 확산 덕분에 극빈율이 감소해왔다는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서 스티븐 핑커는 무어라고 할까? 가디언지에 게재된 비판에 대한 입장을 묻는 그의 독자에게 남긴 답장을 보면, 대략  '팩트를 부정하다니, 극좌 맑시스트 이데올로그가 틀림없군!' 정도가 그의 생각인 것 같다. 그의 발언은 이렇다: “내가 왜 세계적 경제 개발에 대한 (전문가들의) 컨센서스를 맑시스트 이데올로그에 대항하여 옹호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진지한 학술적 쟁점들을 균형감 있게 면밀히 검토하기 보다, 개중에 가장 '정치적'인 반응을 콕 찝어 이념적으로 비방하는 식이다. (물론 그가 언급한 가디언지 기사가 핑커를 비롯한 신낙관주의자들의 내러티브를 비판한 방식은 다소 엉성할지언정) «계몽»에서 공공 담론의 '탈정치화'를 역설하는 인물치고는 굉장히 정치적인 대응이지 않은가?


 물론, 빈곤이 줄어들었다는 '신낙관주의자'들의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과연 팩트다. 핑커와 같은 신낙관주의자들이 말해온 것처럼 눈부시지는 않아도, 적어도 2000년대 이래 세계의 빈곤율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세계은행 빈곤 데이터의 시계열이 시작된 1980년대 이래 35년의 기간 중 그 어떤 임의의 한 시점에 비해서도, 오늘날의 빈곤율이 더 낮다는 데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팩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관계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신낙관주의'의 '팩트'도 복잡하게 펼쳐진 사실관계 가운데 선별된 것일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신낙관주의'의 '팩트'가 강력한 힘을 갖는 것도, 실은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의 제약 하에 (종종 정치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임을 무시할 수 없다. '신낙관주의자'들은 이런 의미관계를 물신화해, 마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신들의 '팩트'에는 주관적 이해관심과는 무관한 자기완결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이 부여하는 의미의 힘은 취하는 정치적 효과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신낙관주의'의 팩트 물신주의가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문제적인 까닭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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