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빈곤율은 감소해왔지만, 모든 나라들에서 균등한 감소세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왜?'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 어떤 곳에서는 왜 빈곤율이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떤 곳에서는 왜 의미있는 진보를 경험하지 못했는가? «계몽»은 그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제시하는데(pp. 148-156), 개중 "마오쩌둥의 죽음(p. 148)"으로 상징되는 세 개를 한 데 묶으면, 크게 "공산주의(그리고 각국에 침투한 사회주의)의 몰락(p. 148)", "세계화(p. 150)", "과학과 기술(p. 155)" 세 가지의 이유로 정리된다.
핑커의 대답들 중 가장 논쟁적 반응이 예상되는 건 단연 '세계화'다. 핑커 본인의 말처럼 "세계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정치 스펙트럼 여기저기서 공포스럽다, 혐오스럽다 하는 반응이 튀어나온다(«계몽», p.151)." 하지만, "개발 전문가들은 세계화가 각국의 빈곤층에게 수지맞는 일이었다는 점에 동의(p.151)"한다. 사실, 국가 간 교류의 양적 확대가 빈곤층에게 해로울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핑커가 인용한 디턴(Angus Deaton)의 말처럼 세계화가 곧 신자유주의적 음모라고 볼 수도 없다. 세계화와 빈곤 사이의 관계를 다룬 경제학자들의 연구들 중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의 하나인 "무역, 성장, 그리고 빈곤(Trade, Growth, and Poverty)"이 이런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 논문에서 두 경제학자 데이비드 달러(David Dollar)와 아트 크레이(Aart Kraay)는 1980년대 이후 20년 간, 세계화에 적극 동참한 "세계화 국가(globalizer)"들은 다른 개발도상국이나 선진국들에 비해 더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경제 성장률이 더 높을수록 저소득층의 소득도 따라 증가해 절대적 빈곤이 급격히 감소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Dollar & Kraay, 2004). 달러와 크레이의 분석에 의하면, 무역량이 증가할수록, 연평균 경제성장률 역시 유의미하게 높아지는 통계적 관계가 나타난다. 반면 무역의 확대가 소득 불평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그 밖에도 많은 경제학 문헌들은, 비슷한 시기 국제 무역의 확대는 더 높은 경제 성장률로 이어졌다는 통계 분석을 보고한다(Frankel & Romer, 1999; Irwin & Tervio, 2002).
그럼, '세계화'가 그렇게 뜨거운 감자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문가들을 무시하는 무지한 우민들, 이데올로그들, 포퓰리스트들의 불평불만일 뿐이었을까? 하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사실관계를 벼려내는 일이 필요하다. "정치 스펙트럼 여기저기"에서 제기되는 '세계화'에 대한 논쟁의 쟁점들은 이를테면 "컨테이너선과 제트 비행기 덕분에 ... 폭발적으로 증가(«계몽», p.150)"한 무역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투자와 거래에 드는 관세와 여타 장벽(p.150)"이 무너지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즉 80년대 이후 '세계화'를 그 이전과 구별짓는 정치적 의미는, 무역량의 양적인 변화뿐 아니라 국제질서 및 여러 국가들의 국내 정치 장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정책적 변화다. 그리고 이 변화의 주역이 바로 IMF와 세계은행, WTO 등의 국제기구들이다. 특히 8-90년대 라틴 아메리카 및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 개발 도상국의 경제 패러다임을 바꾼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IMF와 세계은행이 워싱턴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 일련의 정책들의 목록은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를 발명해낸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John Williamson)은 이 용어가 그의 본디 의도를 벗어나, 극단적 시장 근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와 마치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데에 불편을 표하기도 하지만(Williamson, 1990; 2009),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Dani Rodrik)이 지적한 것처럼, 시간이 흘러 애초의 '워싱턴 컨센서스'에 자본 시장 개방 따위의 내용들이 섞이며, 애초의 온건한 내용과는 달리 개방 경제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주장으로 그 용어의 의미가 변모하게 되었다(로드릭, 2011, pp.245-6). 그 내용은 곧 무역·금융 자유화, 민영화, 규제 완화 따위였다. 그리고 이 '워싱턴 컨센서스'에 관해서라면, 적어도 핑커가 얘기하는 수준의 "개발 전문가들의 동의"를 말하기는 어렵다. 가령, 대니 로드릭이나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같은 개발경제학자들은 IMF, 세계은행 등의 국제기구가 개발도상국들에 강요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데에 앞장서온 인물들이기도 하다(Serra & Stiglitz, 2008).
달러와 크레이처럼 "세계화 국가(globalizer)"에 중국과 인도를 포함시켜 세계화의 긍정적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하는 건, 이렇게 현실에 실제로 적용되는 정책과 관련한 쟁점을 호도할 수 있다. 로드릭은 중국과 인도 모두 고속 성장이 시작된 후 10년이 지난 이후에야 관세의 대폭 인하와 같은 무역 자유화를 추진했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는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무역 제한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한다(Rodrik, 2008; pp. 220-221). 중국은 무역 자유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인 70년대 후반 이후 약 10년 동안에도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인도 역시 전향적인 무역 개방 정책이 실시되기 시작한 1991-93년 이전 1980년대에 이미 경제 성장률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는데, 이 때에는 오히려 그 전 70년대에 비해 평균 관세율이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 요컨대, 인도와 중국 두 나라 모두 국제 무역에 참여하며 무역량을 늘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무역량'이 곧 '워싱턴 컨센서스'가 추진한 자유 무역, '무역 개방'의 정책 변수와 똑같지는 않으며, 로드릭의 지적처럼, "정책 결정자들에게 적절한 질문은 무역이 좋은지 나쁜지가 아니라, 개혁 과정에서 올바른 정책 조합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역 자유화가 얼마나 우선되어야 하는지이다(p.220)." 로드릭과 로드리게즈(Francisco Rodríguez)의 유명한 2000년 논문 "무역 정책과 경제 성장: 국제 횡단면 증거에 대한 회의론자의 안내(Trade Policy and Economic Growth: A Skeptic's Guide to the Cross-National Evidence)"는 이처럼 ‘관세율’과 같이 구체적인 정책 변수로서 적절히 정의된 무역 자유화를 독립변수로 삼으면, 무역 개방과 경제 성장 사이에 유의미한 통계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Rodríguez & Rodrik, 2000).
그 ‘정책 변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도 물론 쉽지 않은 문제다. 하워드 나이(Howard Nye)와 산제이 레디(Sanjay Reddy) 등은 달러와 크레이의 논문을 비판하며, 무역 개방 변수와 종속변수를 주어진 시점의 절대적 ‘수준’으로 정의하고 비교할 것인지, 시점 간의 ‘변화’로 비교할 것인지에 따라 무역 개방과 경제 성장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는 지적을 제기한 바 있다(Nye, Reddy & Watkins, 2002). 달러와 크레이의 논문에서는 1985-89년에서 1995-97년 사이에 관세율의 감소가 큰 나라들을 ‘세계화 국가’로 분류했지만, 실은 이 나라들은 관세율의 절대적 수준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은 나라들이었다. 그에 비해, 관세율의 변화가 작았던 나라들은 이미 관세율이 낮은 나라들이었던 것. 관세율이 낮은 나라들을 ‘비세계화 국가’로 분류하는, 해석의 난점이 생기는 비교다. 이같은 문제에 대해, 달러와 크레이는 그들의 논문에서, 주어진 시점의 ‘수준’으로 변수를 삼고 성장률을 비교하면, 국가들의 지리적 위치나 혹은 다른 사회 제도 등의 제3의 변수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런 변수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갖는다는 전제 하에, 시점 간의 ‘변화’를 변수로 삼고 성장률을 비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이와 레디 등은 무역 자유화 변수와 일관되게, 성장률 역시 주어진 시점의 수준이 아닌 시점 간 변화를 보게 되면, ‘비세계화 국가’의 성장률 향상이 더 크다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달러와 크레이의 논문에 따르면 ‘세계화 국가’로 분류되었지만 사실은 관세율 수준이 높았던 나라들은 낮은 관세율을 가진 나라들에 비해 성장률의 수준도 높았다.
물론 로드리게즈와 로드릭의 지적이 제기된 이후 많은 연구자들이 방법론적으로 개선된 접근을 통해 무역 개방과 경제 성장 사이의 긍정적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를 해욌지만, 여전히 비슷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예컨대, 무역 개방과 경제 성장 사이의 긍정적 관계를 보여준 적지 않은 중요한 연구들(Sachs & Warner, 1995; Wacziarg & Welch, 2008; Billmeier & Nannicini, 2013)이, 암시장 환율 프리미엄을 무역 자유화를 정의하는 한 항목으로 사용해왔다. 로드리게즈와 로드릭이 이미 2001년 논문에서 '무역 자유화'뿐만 아니라 다른 거시경제적 불안 요인이 변수에 반영되어 무역 자유화의 효과를 특정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비판한 방법이다. 한편, 에스떼바데오르달(Antoni Estevadeordal)과 테일러(Alan Taylor)는 1970년대에서 2000년 사이 관세율의 변화가 성장률의 변화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관계가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으며, 정책 변수로서 적절하게 정의할 때에도, 무역 자유화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볼 수 있다는 걸 설득력있게 보여준다(Estevadeordal & Taylor, 2013). 하지만, 에스떼바데오르달과 테일러의 논문에 대한 최근의 재현 연구에 따르면, 이 통계적 관계는 몇 가지 가정들에 의존해 강건성이 낮다(Hoyos, 2021). 즉, 자료에서 이상치와 일관되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지는 값들을 제거하고, 모든 국가들이 1990년에 자유화되었다는 의심스러운 가정을 수정하면 애초 에스떼바데오르달과 테일러 논문에서 발견한 통계적 관계는 사라진다는 것.
또한, 무역 자유화와 경제 성장률 사이의 관계는 조건적이라는 증거들도 있다. 가령, 무역 자유화가 그 나라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다른 효과를 갖는다는 사실을 강조해온 연구들의 흐름이 있다. 그 가운데 몇 연구들은, 높은 관세 수준이 고소득 국가들에서는 GDP와 부정적인 관계를 맺지만, 저소득 국가들에서는 관세 수준이 높을수록 오히려 GDP도 높아진다는 결과를 보고한다(DeJong & Ripoll, 2006; Kim & Lin, 2009; Kim, Lin, & Suen, 2011). 한편, 시야를 넓혀 훨씬 긴 시간적 지평에 걸쳐 관세율과 성장률 사이의 관계에 대해 비교한 연구는, 관세율과 경제 성장률 사이의 관계가 모든 시대와 조건에서 일관되게 똑같은 방향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Clemens & Williamson, 2004). 1914년 이전에는 관세율과 성장률 사이에 일관되게 플러스의 상관관계가 나타나지만, 1950년대 이후 1999년까지의 자료에서는 똑같은 샘플에서도 마이너스의 관계가 나타나며, 그 관계는 무역 파트너의 관세율에 따라 조건적으로 나타났다. 즉, 무역 파트너의 관세율이 높을 때에는 관세율이 높은 것이 높은 경제 성장률로 이어지지만, 일반적으로는 관세율이 높으면 경제 성장률은 낮았다는 것. 반면, 무역 파트너의 관세율을 고려하지 않은 통계 분석에서는, 로드리게즈와 로드릭의 회귀분석 결과처럼 관세율과 성장률 사이에 유의미한 관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몰락이 빈곤 감소의 원인이라는 «계몽»의 주장은 과거 공산주의 체제였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전후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역시 설명의 난점에 부딪히게 된다. 그림1에서 보듯,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많은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로 이행하며 더 부유해져서 자본주의 경제와의 격차를 좁힌 것이 아니라, 10-20년 동안 경제가 크게 후퇴했다가 그 후 몇 년에 걸쳐 원점으로 회귀하는 U자 곡선의 궤적을 그렸다.
그림2에서 보듯, 이런 추세는 1991-2년경을 기점으로 한 극빈율의 상승으로 나타난다. 세계은행에서 출간한 연구들 역시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옛 공산권 국가들의 빈곤율이 상승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논의할 정도다(Milanovic, 1998; Klugman & Braithwaite, 1998).
반면 이들과 똑같이 공산주의 계획경제 체제였다가 조금 앞서 점진적인 개혁개방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으며, 아직도 공공 부문의 역할과 비중이 큰 혼합 경제를 운용하는 중국은, 꾸준히 높은 비율로 경제가 성장해왔다. 이 차이를 역시 개발경제학은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틀로 설명해준다. 가령, 사유재산권의 확립과 민영화를 주요한 아젠다로 삼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비교적 충실히 이행한 구소련 국가들에 비해, 중국은 공공 기업의 전면적인 민영화 대신 독특한 소유권 구조의 '향진기업(Township and Village Enterprises; TVEs)'을 발전시킨다. 즉, 중앙정부에게도, 민간의 개인에게도 분명한 소유권이 주어지지 않은 채 지방정부('향Township', '진Village')가 운영한 기업이다. 사유재산권이 보장되기 어려운 제도·이념적 환경에서, 지방정부에 의해 보호되는 향진기업은, 사유재산 제도를 억지로 이식하지 않으면서도 사유재산권이 제공하는 것과 같은 인센티브의 효과를 대신해줄 수 있었다(Qian, 2002). 로드릭의 표현으로는, 향진기업 중심의 성장은 "정부가 모든 재산의 궁극적인 주인으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국민에게 재산권을 보장(로드릭, 2011, p.227)"할 수 있었던 묘안이었다. 향진기업의 운영은 지방정부의 재정과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방정부에게 향진기업을 지원할 유인이 있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향진기업은 90년대 초반까지 중국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떠오른다(향진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는 로드릭 등의 주장에 대해서도, 모든 향진기업이 공공 또는 집단 소유는 아니었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민간 소유 즉 '개체소유' 기업이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Huang, 2011). 물론 이는 로드릭이 다소 간과한 측면이긴 하지만, '향'과 '촌'에 의해 운영되는 집단소유 기업이 1990년대 초반까지도 향진기업의 생산액과 고용인 수의 과반을 차지한 데 비해, 성장률은 집단소유 기업과 개체소유 기업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임반석, 2015)은, 로드릭이 주목한 독특한 소유 구조의 집단소유 향진기업이 8-90년대 중국 경제 성장의 주역이었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중국의 재산권 관련 개혁이 가진 또 다른 특이점은 토지 및 농업 정책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계획경제 시대의 중국은 여느 사회주의 국가처럼 농산물의 할당 생산량과 가격을 농민들에게 부과하여 노동자들에게 배급했는데, 체제 전환기에 이루어진 개혁의 방향은 전면적인 민영화와 시장화를 도입한 구소련의 방식과는 달랐다. 로드릭에 따르면, 계획경제적 요소를 일거에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으면서도 시장이 주는 인센티브를 접목시켜 제도 변화의 충격을 완화한 것이 중국의 해법이었다(로드릭, 2011, p.226-227). 토지의 국가 소유 하에서 농민이 할당 생산량을 정액에 상납하고 정부는 노동자에게 배급하는 시스템의 요체는 유지하되, 집단 농장을 해체해 가족 농장을 촉진한 것. 이 '농가책임제'와 '이중가격시스템(dual-track pricing system)' 하에서 농민들은 농가별로 할당된 생산량을 초과하는 분량에 대해서는 시장가로 자율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후 중국의 농업생산성은 크게 향상되었으며, 이런 이중가격시스템은 농업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영역들로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Lau, Qian & Roland 1997). 즉 국가가 계획 가격에 조달하는 곡물의 양은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전체 곡물의 생산량은 크게 증가했고, 석탄과 철강, 소비재 시장 등으로까지 이중가격시스템이 확산되며 중국 경제의 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 이렇게 집단 농장의 해체가 곧 자본주의적 농업의 발달로 귀결되지 않고 가족농을 성장시킨 것 역시, 중국 경제 개발의 특징적 면모다. 중국의 대규모 서베이 자료를 이용해 농업 인구 중 전형적 임금노동자의 비율을 추산한 한 연구에 의하면, 그 규모는 최소 3.0~3.4%에서 최대 5~8%에 지나지 않아, 18세기 농업혁명기의 영국은 물론, 동시대의 인도, "동아시아 모델"의 일본 등 사례와 비교해보아도 그 비중이 낮은 수준이다(Huang, Yuan, & Peng, 2012).
물론, 중국의 경제 발전을 오히려 윌리엄슨이 애초에 제기했던 온건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틀 안에서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Kennedy, 2010). 실제로, 개혁개방 이전에 비해서는 오늘날 중국 경제가 시장경제와 개방경제에 한층 더 가까워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은 국제금융기구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다른 개발도상국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제도들을 운용해온 것은 물론,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선 지금도 여전히 경제의 운용에서 국가의 역할이 중심적인 체제다. 현재 중국의 공공 자산 비율(2015년 기준 약 30%)은 과거 서구 국가들이 이차대전 이후 경영했었던 혼합경제(약 15-25%)에 비해서도 높으며, 중국 법인 지분의 공공 소유 비율 역시 2015년 기준 약 60% 수준으로 매우 높은 편이다(Piketty, Yang & Zucman, 2019). 뿐만 아니라, 2007-8년 이후 공공 부문 비율은 더 이상 감소하고 있지 않아, 과연 앞으로도 중국의 자본주의 이행이 보다 심화될지는 불투명하다.
계획경제 체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비슷한 시기에 겪으면서도, IMF 등의 권고 하에 중국과는 달리 급격하고 전면적인 민영화와 시장화의 길을 걸었던 구소련 국가들의 발전상은 중국과 극명히 대조된다. 사회주의 ‘철밥통’의 보호를 받다가 자본주의 시장에 무방비로 노출된 구소련 시민들의 충격은 사망률 통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림3을 보라. 기대수명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 중국에 비해, 러시아는 사망률의 상승으로 인해 기대수명 그래프가 움푹 패인 골을 만들고 있다. 러시아의 기대수명은 2010년경이 되어서야 소련 붕괴 이전의 고점을 회복한다. 저명한 의학 저널 란셋(The Lancet)에 게재되기도 한 사회학자 스터클러(David Stuckler) 등의 연구는, 러시아뿐 아니라 동유럽 및 과거 소련 출신의 여러 국가들에서, 체제이행기의 급격한 민영화가 노동연령층 남성의 사망률 증가로 이어지는 유의미한 통계적 관계를 발견한 바 있다(Stuckler, King & McKee, 2009; Azarova et al. 2017).
사실, 앨런(Allen, 2017)의 방법으로 새로 ‘극빈율’을 계산했던 모아소스(Moatsos, 2021)의 데이터에 의하면, 과거 소련 연방 국가들의 사례들만큼이나 극단적이지는 않았더라도, 중국 역시 자본주의 이행의 충격으로부터 아주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의 시장 경제로의 이행이 심화되는 90년대 초중반 경 모아소스 데이터의 ‘극빈율’이 치솟아 위로 뾰족한 뿔 모양의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것.
한편 모아소스의 데이터에 따르면, 동유럽 및 과거 소련 연방 지역의 극빈율은, 소련 해체 직전까지 감소하며 거의 0%에 가까운 바닥을 찍었다가, 소련 붕괴 직후 수직 상승한 이후에는 가장 최근까지도 자본주의 이행 직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극빈율 감소의 원인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몰락’이라고 말하는 스티븐 핑커의 주장은 과연 이런 사실을 어떻게 매끄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에 비해 사회주의가 아주 철저히 몰락한 동유럽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자본주의 이행 후 극빈율이 오히려 더 높아졌다. 스티븐 핑커가 공산주의 몰락이 극빈 퇴치의 주인공이라는 제 주장과 관련된 사실관계를 보다 면밀히 검토했다면 어땠을까? 단편적 사실에 제 입맛에 맞는 해석을 간단히 덧칠하는 그야말로 그 자신이 경멸하는 “이데올로그”가 아닐까?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워싱턴 컨센서스'의 아젠다들이 표준적으로 시행된 8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사정 역시 중국과 크게 대조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외채위기를 겪으며 1980년 즈음을 기점으로 무역 및 금융 자유화, 노동시장 개혁, 민영화 등의 '워싱턴 컨센서스'의 표준적인 정책들이 도입되었지만, 경제성장률은 오히려 '수입대체산업화'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1960-80년대보다도 낮아졌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도입되기 시작하는 80년대 초 치솟은 극빈율은 2000년경까지도 1980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다(그림6).
'워싱턴 컨센서스'가 8-90년대 유럽과 중앙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빈곤율이 상승한 까닭을 설명한다면, 2000년대 이후 이 경향이 완화되는 것도 설명할 수 있을까? 실제로 '워싱턴 컨센서스'의 매운 맛을 본 개발도상국들은 2000년대 즈음 접어들어서는 정책 노선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IMF와 세계은행 등이 제시한 시장개혁이 98년 금융공황으로 돌아온 경험을 겪은 러시아는, 에너지 분야 국유기업들의 역할을 강화하고, 산업정책으로써 자동차 산업과 조선업 등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나가는 등, 경제정책의 기조를 개입주의로 전환한다(사피르, 2012). 이런 정책 기조 변화의 성적표는 석유 등 에너지 가격의 변화에 힘입어, 그림2("Russian Federation")에서 보는 바와 같아졌다. 라틴 아메리카 역시 2000년대 이후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반감을 갖는 정치 세력들이 연달아 집권하는 '핑크 타이드' 아래에, 사회복지 영역 등에서 정부의 역할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고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에 나섰으며, 그 결과는 불평등의 뚜렷한 완화로 나타났다. 세계은행에서 발행된 페이퍼도 불평등의 감소가 200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빈곤율 감소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Lustig, Lopez-Calva & Ortiz-Juarez, 2012).
경제학자 와이즈브롯(Martin Weisbrot)과 그가 소속된 연구소 CEPR은, IMF와 세계은행 등의 국제기구들이 주도하는 세계화가 진행된 8-90년대 20년과 그 전후의 약 20년, 즉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의 여러 사회개발 지표의 변화를 팔로업하는 연구들을 발행해왔다. 2003년에 발간된 연구에서 와이즈브롯은 1인당 GDP, 기대수명, 영유아사망률, 교육 등의 지표에 걸쳐, 같은 구간의 성장률 혹은 연평균 변화량이 그 이전 20년에 비해 후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Weisbrot, Baker, Kraev & Chen, 2003). 즉, 1960년 1인당 GDP 수준을 다섯 구간으로 나눈 뒤, 해당 구간에 속하는 나라들의 성장률을 보았더니, 모든 구간에서 80년대 이후 20년의 성장률이 이전 20년에 비해 낮았던 것. 1인당 GDP뿐만 아니라 기대수명, 문맹률, 초등학교 등록률 등에서도, 특히 낮은 구간의 저개발 국가들에서 이런 후퇴가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
그에 비해 같은 지표들의 2000년대 이후 추세는 뚜렷한 회복세를 보여준다(Weisbrot, 2015). 와이즈브롯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라틴 아메리카 등 개발도상국들에서 IMF의 국제적 영향력이 감소하는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전 경제위기의 경험들을 거치며 많은 반발과 불신을 산 IMF의 금융지원 규모는, 고점을 찍었던 2003년에 비해 2007년에는 그 20% 수준으로 급감한다. 물론 이 규모는 불과 몇 년 뒤 다시 종전의 수준을 회복하지만, 와이즈브롯에 따르면 그 대부분은, 개발도상국보다는 유럽 지역에서 IMF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과 관련있다.
최근의 몇 연구들은 IMF의 금융지원 조건으로 부과된 정책 개혁이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건강 악화, 저소득층의 소득 감소로 이어지는 인과적 관계를 통계적으로 훨씬 세련되게 보여준다. 1980년대에서 2014년에 걸친 137개 개발도상국들의 패널자료로 1인당 GDP를 포함한 여러 관련 변수를 통제한 회귀분석의 결과는, IMF의 구제금융을 대가로 참가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요구 사항들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해당 국가의 신생아 사망률을 높이고, 시민들의 의료 제도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밝혀준다(Forster, Kentikelenis, Stubbs & King, 2019). 1973년에서 2013년에 걸친 150여개 국가에 대한 분석 결과는, IMF 프로그램이 저소득층의 소득 감소를 통해 불평등의 확대로 이어졌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Lang, 2020).
그렇다면, "자유 무역과 세계화, 워싱턴 컨센서스”, “신자유주의” 덕분에, 인류 역사상 빈곤이 가장 크게 줄었다는 해석(Worstall, 2016)은 틀림없이 사실과 멀다. "자유 무역"과 "워싱턴 컨센서스", "신자유주의"에 가장 가까운 정책을 채택한 지역들의 성적표는 오히려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몰락과 세계화가 빈곤의 감소를 견인했다는 핑커의 해석도, 이 시기 빈곤율의 지역별 동향에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를 일관되게 해석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정부의 경제적 역할을 확대하는 것이 항상 바람직할 수는 없다. 과도하게 힘이 큰 정부의 잘못된 정책은, 진보를 역행시키기도 한다. 단적으로, 지금 베네수엘라의 사정을 보자. 빈곤율 감소의 방향타는 로드릭의 말처럼 시장의 제도적 장점을 정부의 적절한 역할로 잘 살려낸 혼합 경제가 쥐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균형잡힌 해석일 테다.
핑커는 국제 무역의 확대라는 '세계화'의 경제적 차원과, 세계화와 관련한 공공 담론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어온 정치적 차원의 정책 변수를 구분하지 않고, 그저 세계화가 빈곤을 줄였다고 하지만, 문제는 어떤 '세계화'인지다. 일단 세계화에 동참하기만 하면 높은 경제 성장률과 생활 수준의 향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정치의 역할은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며 대류에 순응하는 것 뿐일 테다. 즉, ‘세계화’라는 경제적 힘이 빈곤의 종식을 가져다올 것을 낙관하며, 그 흐름을 거스르려는 무지한 대중들의 포퓰리즘을 잘 방어해내면 된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세계화에 참여하는지가 결과를 크게 좌우하는 중요한 매개라면, ‘정치’가 가진 역할의 무게가 사뭇 커진다.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의 주도 하에 이뤄진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세계화'가 8-90년대에 많은 개발도상국에 야기한 생활수준의 후퇴 혹은 정체, 그 이후의 반등은, 정치적 선택이 결과의 큰 차이를 낳은 핵심 변수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아시아 국가들은 세계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진영에게도, 반대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진영에게도 모두 적절한 사례를 뒷받침해준다는 아이러니컬함을 지적한 로드릭(2011, p.222)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문제는 "세계화냐, 아니냐" 하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세계화에 참여하는지가 8-90년대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구 공산권의 운명을 나눈 변수였다. 13억 인구 중국의 몸집과 ‘1.9 달러’라는 의심스러운 국제빈곤선의 기준에 의해, 저개발 국가들에 드리웠던 8-90년대의 큰 굴곡이 가려진, ‘신낙관주의자’들의 매끄러운 그래프로는 알아채기 어려운 사실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