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책’으로 악명이 높은 스티븐 핑커의 새 책이 번역되었다. 이름하야 «지금 다시 계몽».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등 다양한 저술 활동으로 논쟁적 지식인의 반열에 오른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책답게, «지금 다시 계몽» 역시 출판 이후 여러 오피니언 리더들의 입도마에 올랐다. 2018년 «지금 다시 계몽»의 첫 출간 이후 그 책 내용으로 테드(TED) 강연에 나선 스티븐 핑커. 해당 강연의 제목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은 나아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나빠지고 있을까요?" 그의 답은 명료하다.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다. 왜냐고? 객관적인 통계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계몽»에서 스티븐 핑커는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오해를 여러 통계와 그래프들을 통해 반박한다. 산업혁명 이래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인류는 빈곤으로부터 벗어났고, 과거에 비해 더 건강해졌고, 더 오래 살게 되었으며, 더욱 평화로워졌고, 더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 오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티븐 핑커가 지목하는 한 가지 이유는 '언론'. 나날이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어휘들을 헤드라인으로 선정해 앞다퉈 암울한 보도들을 쏟아내는 언론들이, 세상이 더 나빠지고 있다는 오해를 부추긴다는 것.
최근 세계적 석학들의 대중 강연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화제를 모은 공영교육방송 EBS의 '위대한 수업'에도 출연한 스티븐 핑커. 그 제목은 공영교육방송 치고는 다소 부박하다. '팩트 폭격'이라는 이름의 강의로 출연했다(1편, 2편, 3편). 강연의 주요 내용은 대략 최근 번역 출판된 그의 전작 «지금 다시 계몽»의 내용과 역시 큰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대략 이렇다: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 데이터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데이터가 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거부감을 보이는데, 이는 사람들의 인지 체계에 뿌리박은 심리적 편향과, 부정적인 사건만 보도하는 언론 때문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데이터와 수치, 사실에 근거해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진보를 이룰 수 있다".
출판계의 동향에 밝은 사람이라면, 이런 내용에 기시감을 느낄 법하다. 이미 사회과학 분야의 스테디셀러 자리에 오른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와 똑같은 주장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저서는 '신낙관주의(New Optimism)'라는 이름의 사조로 한 데 묶이는 가장 대표적인 저서들이다(Burkeman, 2017). 역시 TED 강연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 한스 로슬링은 그의 마지막 TED 강연에서 청중들을 향해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을 매우 체계적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깨우쳐준다.
“지난 세기 동안 자연재해에 의한 연간 사망자 수는 어떻게 변했을까?”
“30세 여성은 평균적으로 몇 년을 학교에서 공부했을까?(같은 나이의 남성은 평균적으로 8년을 공부했다)”
“지난 20년 동안 극단적 빈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비율은 어떻게 변했을까?”
한스 로슬링이 던진 3지선일의 퀴즈에, 사람들은 일관되게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거나, 혹은 실제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는 응답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첫번째 질문에 대다수가 재해 사망자가 두 배 이상 증가했거나(33%) 변함없이 그대로라고 응답했다(37%). 정답은 “반 이상 줄었다”였다. 두번째 질문에도 사람들은 7년이라는 정답 대신 5년(31%), 3년(49%)이라는 오답을 선택했다. 마지막 질문에도 “거의 절반이 줄었다”는 정답을 택했던 사람들은 32%에 불과했다. 정답률이 거의 찍어서 맞힐 확률에 근접하거나 그보다 못한 수준이다. 자신들이 이 객관식 퀴즈들에 무작위로 아무 버튼이나 눌렀던 침팬지보다도 낮은 응답률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꼬집는 로슬링의 유머에 사람들은 파안대소한다. 몇 번의 비슷한 질문들로 훈련된 청중들은, 이제는 다른 질문들에서는 침팬지를 이길 수 있을 테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더 올바른 '관점'을 처방받았기 때문. 즉, 우리의 체계적인 오해가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 로슬링은 그의 저서 «팩트풀니스»에서는 그 밖에도 여러 질문들을 던지며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오해가 매우 체계적이라는 점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로슬링이 «팩트풀니스»에서 던진 질문들 가운데에는 이런 질문도 있다.
“1996년 호랑이, 대왕판다, 검은코뿔소가 모두 멸종위기종에 등록되었다. 이 셋 중 몇 종이 오늘날 더 위급한 단계의 멸종위기종이 되었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이다 . 동물 생태와 환경 문제만큼은 문명의 진보에 따라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믿었던가? 그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무언가 더 나빠지고 있다는 우리의 직관이 이다지도 틀려먹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잖은가.
로슬링은 아예 사람들에게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직접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로슬링의 말대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 응답했던 것. 한스 로슬링은 이 응답 결과를 ‘부정 본능’이라는 인지적 편향의 증거로 간주한다. 한스 로슬링이 수많은 통계들을 통해 증명했듯,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더 나빠진다는 사람들의 응답은 그냥 틀린 답인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 전개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범주 혼동의 오류다. 아무리 자연재해의 사망자 수가 지난 세기동안 줄어들었어도, 극단적 빈곤율이 지난 20년 간 전에 비해 줄어들었어도,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대해 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그 판단의 준거를 어떤 가치에, 어떤 시점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에도, 로슬링은 그가 준비한 통계들만으로도 간단히 세상이 좋아진다는 가치판단이 굳건히 정당화된다고 의심치 않는 모양이다. 그는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판단이 어떤 가치와 사실에 준거를 두고 있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이 세상의 변화에 대해 침팬지보다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닫고 로슬링의 강연에 매료된 사람들은, 로슬링에게 이미 설득되어버렸다. 로슬링이 선사한 상쾌한 충격은 그의 호언장담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아예 뒤집어버린 것이다. «팩트풀니스»에 스티븐 핑커는 이런 추천사를 남긴다: "풍부한 데이터를 통해 우리의 인지과정이 어떻게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그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세상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만 같다. 한스 로슬링의 바통을 이어받아 그의 TED 강연에 공동 강연자로 나선 그 아들 올라 오슬링은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것들은 나아집니다. (세상의 변화의 방향에 관한) 당신 앞의 질문에 대해, 확실하지 않으면 ‘나아진다’라고 추측해야 합니다”
근데, 정말 그럴까? 그들의 강연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 대중들이 만약 아래와 같은 질문들을 받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21세기가 시작된 후 지난 약 20년 동안, 전세계의
1. 우울증 비율은 어떻게 변했을까?
2. 성인 비만 비율은 어떻게 변했을까?
3.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 웃음, 즐거움 등 긍정적인 감정은 늘어났을까, 줄어들었을까?
4. 사람들이 느끼는 걱정, 슬픔, 화 등 부정적인 감정은 늘어났을까, 줄어들었을까?
5. 자유민주주의 점수는 어떻게 변했을까?
6.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어떻게 변했을까?
7. 세계 난민 수는 어떻게 변했을까?
8. 1인당 생태용량은 어떻게 변했을까?
9. 척추동물의 생물다양성은 어떻게 변했을까?
10.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의 수는 어떻게 변했을까?
이 각각의 질문들에 로슬링이 그랬던 것처럼 “더 나빠졌다”, “큰 변함없다”, “더 좋아지고 있다”는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게 했다면? 로슬링의 강연에 매료된 사람들이라면, 이 질문들에 이제는 더 좋아지고 있다는 대답을 대략 일관되게 내놓지 않았을까? 지난 20년 동안 줄어든 ‘극단적 빈곤’ 비율과 자연재해 사망자 수처럼, 우울증과 비만, 부정적 감정 경험은 줄어들고, 세상은 더 민주적으로 변하며, 환경 문제도 꾸준히 진보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만약 그런 느낌을 따라 저 10가지 항목 모두에서 세상이 더 좋아지고 있다고 대답했다면, 당신의 정답률은 0%다. 실제로는 이 항목들은 지난 20년 사이에 큰 변화 없이 거의 일정하거나(우울증, 긍정적 감정), 혹은 더 나빠진(비만, 부정적 감정, 민주주의, 난민, 생태용량, 생물 다양성, 멸종) 지표들이다(‘감정’ 시계열은 2006년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유의하라).
사회학자 베르그렌(Christian Bergrren)이 «팩트풀니스»에 대해 남긴 서평(Berggren, 2018)처럼, 괴상하게도, 그의 책에는 “줄어드는 나쁜 것들”과 “늘어나는 좋은 것들”에 관한 그래프들만 있을뿐, 늘어나는 나쁜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전반적으로 생물다양성이 감소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이 증가하는 판에, 멸종 위기에서 벗어난 세 종류의 동물만 콕 찝어 물어보는 대목에서는 더더욱 의도적 체리피킹을 의심하게 한다. 물론, 단순히 세상의 나빠지고 있는 면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는 것만이 이들 두 낙관주의자(혹은 ‘가능성 옹호론자(«팩트풀니스», p. 100)’의 문제인 건 아니다. 두 저자에 대한 비평의 목적이 세상이 실제로는 나빠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면, 그건 유치한 물량 공세로 귀결될 테다.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비관주의자들의 그래프와 좋아지고 있다는 낙관주의자들의 그래프들 중 어느 쪽이 더 많은지 따위가 중요할까? «팩트풀니스»와 «지금 다시 계몽»을 제대로 비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카운터 팩트가 아니라, 그들이 내세우는 ‘팩트’의 사실관계와 의미 구조를 해부해, 그 세계관을 해체하는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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