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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 Oct 21. 2021

«팩트풀니스»,«지금 다시 계몽»: 그건 계몽이 아니다


 ‘벽돌책’으로 악명이 높은 스티븐 핑커의 새 책이 번역되었다. 이름하야 «지금 다시 계몽».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등 다양한 저술 활동으로 논쟁적 지식인의 반열에 오른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책답게, «지금 다시 계몽» 역시 출판 이후 여러 오피니언 리더들의 입도마에 올랐다. 2018년 «지금 다시 계몽»의 첫 출간 이후 그 책 내용으로 테드(TED) 강연에 나선 스티븐 핑커. 해당 강연의 제목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은 나아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나빠지고 있을까요?" 그의 답은 명료하다.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다. 왜냐고? 객관적인 통계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계몽»에서 스티븐 핑커는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오해를 여러 통계와 그래프들을 통해 반박한다. 산업혁명 이래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인류는 빈곤으로부터 벗어났고, 과거에 비해 더 건강해졌고, 더 오래 살게 되었으며, 더욱 평화로워졌고, 더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 오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티븐 핑커가 지목하는 한 가지 이유는 '언론'. 나날이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어휘들을 헤드라인으로 선정해 앞다퉈 암울한 보도들을 쏟아내는 언론들이, 세상이 더 나빠지고 있다는 오해를 부추긴다는 것.


 최근 세계적 석학들의 대중 강연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화제를 모은 공영교육방송 EBS의 '위대한 수업'에도 출연한 스티븐 핑커. 그 제목은 공영교육방송 치고는 다소 부박하다. '팩트 폭격'이라는 이름의 강의로 출연했다(1편, 2편, 3편). 강연의 주요 내용은 대략 최근 번역 출판된 그의 전작 «지금 다시 계몽»의 내용과 역시 큰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대략 이렇다: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 데이터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데이터가 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거부감을 보이는데, 이는 사람들의 인지 체계에 뿌리박은 심리적 편향과, 부정적인 사건만 보도하는 언론 때문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데이터와 수치, 사실에 근거해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진보를 이룰 수 있다".


스티븐 핑커의 신작 «지금 다시 계몽»


 출판계의 동향에 밝은 사람이라면, 이런 내용에 기시감을 느낄 법하다. 이미 사회과학 분야의 스테디셀러 자리에 오른 한스 로슬링«팩트풀니스»와 똑같은 주장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저서는 '신낙관주의(New Optimism)'라는 이름의 사조로 한 데 묶이는 가장 대표적인 저서들이다(Burkeman, 2017). 역시 TED 강연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 한스 로슬링은 그의 마지막 TED 강연에서 청중들을 향해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을 매우 체계적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깨우쳐준다.


“지난 세기 동안 자연재해에 의한 연간 사망자 수는 어떻게 변했을까?”


“30세 여성은 평균적으로 몇 년을 학교에서 공부했을까?(같은 나이의 남성은 평균적으로 8년을 공부했다)”


“지난 20년 동안 극단적 빈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비율은 어떻게 변했을까?”


 한스 로슬링이 던진 3지선일의 퀴즈에, 사람들은 일관되게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거나, 혹은 실제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는 응답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첫번째 질문에 대다수가 재해 사망자가 두 배 이상 증가했거나(33%) 변함없이 그대로라고 응답했다(37%). 정답은 “반 이상 줄었다”였다. 두번째 질문에도 사람들은 7년이라는 정답 대신 5년(31%), 3년(49%)이라는 오답을 선택했다. 마지막 질문에도 “거의 절반이 줄었다”는 정답을 택했던 사람들은 32%에 불과했다. 정답률이 거의 찍어서 맞힐 확률에 근접하거나 그보다 못한 수준이다. 자신들이 이 객관식 퀴즈들에 무작위로 아무 버튼이나 눌렀던 침팬지보다도 낮은 응답률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꼬집는 로슬링의 유머에 사람들은 파안대소한다. 몇 번의 비슷한 질문들로 훈련된 청중들은, 이제는 다른 질문들에서는 침팬지를 이길 수 있을 테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더 올바른 '관점'을 처방받았기 때문. 즉, 우리의 체계적인 오해가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 로슬링은 그의 저서 «팩트풀니스»에서는 그 밖에도 여러 질문들을 던지며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오해가 매우 체계적이라는 점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로슬링이 «팩트풀니스»에서 던진 질문들 가운데에는 이런 질문도 있다.


“1996년 호랑이, 대왕판다, 검은코뿔소가 모두 멸종위기종에 등록되었다. 이 셋 중 몇 종이 오늘날 더 위급한 단계의 멸종위기종이 되었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이다 . 동물 생태와 환경 문제만큼은 문명의 진보에 따라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믿었던가? 그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무언가 더 나빠지고 있다는 우리의 직관이 이다지도 틀려먹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잖은가.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


 로슬링은 아예 사람들에게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직접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로슬링의 말대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 응답했던 것. 한스 로슬링은 이 응답 결과를 ‘부정 본능’이라는 인지적 편향의 증거로 간주한다. 한스 로슬링이 수많은 통계들을 통해 증명했듯,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더 나빠진다는 사람들의 응답은 그냥 틀린 답인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 전개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범주 혼동의 오류다. 아무리 자연재해의 사망자 수가 지난 세기동안 줄어들었어도, 극단적 빈곤율이 지난 20년 간 전에 비해 줄어들었어도,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대해 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그 판단의 준거를 어떤 가치에, 어떤 시점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에도, 로슬링은 그가 준비한 통계들만으로도 간단히 세상이 좋아진다는 가치판단이 굳건히 정당화된다고 의심치 않는 모양이다. 그는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판단이 어떤 가치와 사실에 준거를 두고 있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이 세상의 변화에 대해 침팬지보다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닫고 로슬링의 강연에 매료된 사람들은, 로슬링에게 이미 설득되어버렸다. 로슬링이 선사한 상쾌한 충격은 그의 호언장담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아예 뒤집어버린 것이다. «팩트풀니스»에 스티븐 핑커는 이런 추천사를 남긴다: "풍부한 데이터를 통해 우리의 인지과정이 어떻게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그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세상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만 같다. 한스 로슬링의 바통을 이어받아 그의  TED 강연에 공동 강연자로 나선 그 아들 올라 오슬링은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것들은 나아집니다. (세상의 변화의 방향에 관한) 당신 앞의 질문에 대해, 확실하지 않으면 ‘나아진다’라고 추측해야 합니다”


 근데, 정말 그럴까? 그들의 강연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 대중들이 만약 아래와 같은 질문들을 받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21세기가 시작된 후 지난 약 20년 동안, 전세계의


1. 우울증 비율은 어떻게 변했을까?
2. 성인 비만 비율은 어떻게 변했을까?
3.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 웃음, 즐거움 등 긍정적인 감정은 늘어났을까, 줄어들었을까?
4. 사람들이 느끼는 걱정, 슬픔, 화 등 부정적인 감정은 늘어났을까, 줄어들었을까?
5. 자유민주주의 점수는 어떻게 변했을까?
6.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어떻게 변했을까?
7. 세계 난민 수는 어떻게 변했을까?
8. 1인당 생태용량은 어떻게 변했을까?
9. 척추동물의 생물다양성은 어떻게 변했을까?
10.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의 수는 어떻게 변했을까?


 이 각각의 질문들에 로슬링이 그랬던 것처럼 “더 나빠졌다”, “큰 변함없다”, “더 좋아지고 있다”는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게 했다면? 로슬링의 강연에 매료된 사람들이라면, 이 질문들에 이제는 더 좋아지고 있다는 대답을 대략 일관되게 내놓지 않았을까? 지난 20년 동안 줄어든 ‘극단적 빈곤’ 비율과 자연재해 사망자 수처럼, 우울증과 비만, 부정적 감정 경험은 줄어들고, 세상은 더 민주적으로 변하며, 환경 문제도 꾸준히 진보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만약 그런 느낌을 따라 저 10가지 항목 모두에서 세상이 더 좋아지고 있다고 대답했다면, 당신의 정답률은 0%다. 실제로는 이 항목들은 지난 20년 사이에 큰 변화 없이 거의 일정하거나(우울증, 긍정적 감정), 혹은 더 나빠진(비만, 부정적 감정, 민주주의, 난민, 생태용량, 생물 다양성, 멸종) 지표들이다(‘감정’ 시계열은 2006년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유의하라).



 사회학자 베르그렌(Christian Bergrren)이 «팩트풀니스»에 대해 남긴 서평(Berggren, 2018)처럼, 괴상하게도, 그의 책에는 “줄어드는 나쁜 것들”과 “늘어나는 좋은 것들”에 관한 그래프들만 있을뿐, 늘어나는 나쁜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전반적으로 생물다양성이 감소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이 증가하는 판에, 멸종 위기에서 벗어난 세 종류의 동물만 콕 찝어 물어보는 대목에서는 더더욱 의도적 체리피킹을 의심하게 한다. 물론, 단순히 세상의 나빠지고 있는 면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는 것만이 이들 두 낙관주의자(혹은 ‘가능성 옹호론자(«팩트풀니스», p. 100)’의 문제인 건 아니다. 두 저자에 대한 비평의 목적이 세상이 실제로는 나빠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면, 그건 유치한 물량 공세로 귀결될 테다.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비관주의자들의 그래프와 좋아지고 있다는 낙관주의자들의 그래프들 중 어느 쪽이 더 많은지 따위가 중요할까?  «팩트풀니스»와 «지금 다시 계몽»을 제대로 비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카운터 팩트가 아니라, 그들이 내세우는 ‘팩트’의 사실관계와 의미 구조를 해부해, 그 세계관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의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 ‘낙관주의자’라는 건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이들의 낙관주의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 작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 나오는 ‘팡글로스’라는 인물을 떠올렸나보다. 팡글로스는 주인공 캉디드의 가정교사로서, 상식적이지 않은 황당한 사고로 캉디드에게 낙관주의를 설파하는 인물이다. 가령, 폭풍우를 만난 배 위에서 캉디드의 은인이 바다에 떨어지자, 팡글로스는 애초부터 항만이 그런 사고가 일어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며 궤변을 늘어놓는다. 즉, 세상 만물에 원인과 결과가 있고 결과를 위해 원인이 있으므로, 정해진 궁극의 목적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그가 물 속에 빠져 죽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이런 황당한 팡글로스의 사고방식은 그 이름을 '근거없이 낙천적인 사람'을 뜻하는 대명사로 만들었다.


 스티븐 핑커는 자신은 팡글로스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오히려, 팡글로스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비관주의자(«계몽», p.72)"인데, "요즘의 낙관주의자들은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p. 72)"이다. 그의 말대로 팡글로스에게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오늘날의 '낙관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팡글로스와는 다르다. '신낙관주의자'라고 불리우는 오늘날의 '낙관주의자'들은, 팡글로스와 같은 허황된 예언이 아니라, 팩트, 데이터 따위에 근거해 세상의 변화는 긍정적인 곳을 향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위대한 강의> '팩트 폭격' 2강. 세상은 우리의 통념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잘못된 통념은 데이터가 아닌 뉴스만 봤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신낙관주의'라는 용어는 리처드 도킨스와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등, '과학'의 기치를 내걸며 신앙과 유신론에 맞서 싸웠던 '신무신론(the New Atheism)'의 신조를 떠올리게 한다(Burkeman, 2017; 실제로 스티븐 핑커는 이 신무신론자들의 지향에 상당한 동의를 표한다. «계몽» 23장 649-650쪽을 보라). 인간 이성의 새로운 한계를 거듭 개척하는 과학의 가치를 신뢰하며 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낙관주의에 동참한 이들은, 과학적 '계몽' 정신의 지지자답게, 세상의 진보를 '과학적' 증거, '팩트'로 증명해보인다. 즉, 각종 통계와 데이터가 세상의 진보를 증거한다는 것.


 재치있는 입담과 화려한 그래프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야에 숨어 있던 맹점을 멋지게 꼬집어낸 한스 로슬링의 테드 강연은 '신낙관주의'가 대중 담론으로 가장 흥행한 결정적 장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평을 받았던 첫 강연 이후 그는 빈곤과 경제 성장, 유아 사망률 등 개발과 보건 문제에 관한 몇 개의 테드 강연들을 더 남겼다. 베스트셀러 «팩트풀니스»는 바로 이 테드 강연들의 내용을 하나로 엮어내 탄생한 책이었다.


 세상의 진보를 데이터, '팩트'로 증명해보이겠다는 시도는 «팩트풀니스»와 비슷하지만, «계몽»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그 진보의 동력을 '계몽주의'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신무신론자들의 정신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계몽»의 학술적 엉성함을 잘 드러내는 대목도 이 계몽 사상에 대한 저자의 이해에 있다. 가령, '계몽'의 시대인 17~19세기 프랑스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벨은 «계몽»에 대한 서평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핑커가 '계몽' 이라는 단어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적으로 불분명하다. ...그는 계몽을 18세기의 마지막 3분의 2에 해당하는 시기에 위치지으면서도 정작 실제 그 시기의 사상가들과 저술가들은 거의 참고하지 않는다."


 그 저서의 핵심 주제인 '계몽주의'에 대한 이해를 두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지적받자, 핑커는 이렇게 대답한다:


'계몽주의'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고른 이유는, 그것이 내가 옹호하려는 이상을 더 캐치하게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계몽»은 지성사 연구가 아니다. 그 시대의 모든 작가들이 그 이상에 똑같이 찬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단어를 두고 트집잡는 건 무의미하다. ...'계몽주의'는 관습적으로 인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을 사용하는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핑커가 말하는 '계몽주의'는 그 정의 상, 실제 계몽 시대의 사상가들에게 보편적 지지를 얻은 이념이 아니라, 저자 본인이 지지하는 이성적·과학적 이상일 뿐이라는 것. 이건 그야말로 무적의 정의다. 계몽주의의 모든 나쁜 것은 그저 간편하게 이성과 과학의 '잘못된' 사용, 오용이었다고 말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몽이 아니다!" 요컨대, «계몽»의 틀 안에서, 계몽주의는 '정의 상(by definition)' 옳은 것에 가깝다. 이런 고무줄같은 느슨한 정의는 연쇄적으로, 역사의 모든 진보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정의 상' 계몽주의의 성공이라는 식으로 확장된다. 그가 그저 세상의 '진보'를 보여주는 수많은 팩토이드들을 늘어놓을 뿐, 그 '진보'들이 계몽주의로부터 비롯한 것이라는 그 인과관계 주장을 증명해보이려는 어떤 본격적인 학술적 논의를 «계몽»에서 전개하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즉, 정의 상 계몽주의는 옳으며 곧 진보이기 때문에, 진보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논증이 완결되는 구조를 «계몽»이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몽»은, 저자 본인이 쉽게 인정해버린 것처럼 '계몽주의'에 대한 학술적 정의에 기초한 지성사적 작업이 아니라, 저자의 조야한 이해로 키치하게 정의한 용어를 제재로 한 인상비평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무줄같은 '계몽주의'의 정의는 너무 쉽고 간편하게 저자의 정치적 입맛에 맞게 확장된다. 계몽주의란 '휴머니즘'이고 '열린 사회'이며, '코스모폴리타니즘'이고 '고전적 자유주의'다(«계몽», p.21). 따라서 자유민주주의가 곧 ‘계몽’ 정신의 구현이고,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곧 ‘계몽’ 정신의 구현이라는 식이다. 그 이전 '신낙관주의' 저술들의 자유주의 변론의 한 아류로서 «계몽»의 성격이 노정되는 대목이다.


 «계몽»에서 스티븐 핑커는,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인류는 자본주의 이전의 보편적 빈곤으로부터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을 경험했고, 21세기에는 이 흐름으로부터 비교적 소외되었던 저소득 국가들이 선발주자들을 따라잡는 '위대한 수렴(the Great Convergence)'을 통해 인류의 나머지가 구원받고 있다고 주장한다(«계몽», p.550). 핑커에 의하면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옹호론을 읽는 순간 입에 물고 있는 음료를 바지에 쏟지만, 자본주의의 경제적 혜택은 너무나 명백(p.149)"하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덕택에 유례없는 풍요를 누린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 않냐고? 핑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자본주의 덕분에 경제적으로만 부유해진 것도 아니다. 경제적으로 더 부유할수록 수명도 길고, 더 건강하며, 심지어 더 행복해진다(p.157).


 버크먼의 지적처럼, "신낙관주의는 이념적 주장이다: 전반적으로, 그 지지자들은 자유 시장의 힘을 옹호하며, 그들의 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류의 최근 과거와 임박한 미래에 대한 밝은 그림을 유도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수명은 늘어났고 빈곤과 불평등은 줄어들었다며 "신낙관주의자"를 자처하는 역사학자 요한 노르베리(Johan Norberg)의 «글로벌 자본주의를 옹호하며(In defense of global capitalism)»는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이들의 '낙관'이 오늘날 경제 질서에 대한 합리화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Norberg, 2005). "합리적 낙관주의자(Rational Optimist)"를 자처하며 역시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는 맷 리들리(Matt Ridley)도 누구보다 시장 경제의 순기능을 역설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Ridley, 2010).


 특히, 빈곤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불평등의 확대와 금융 위기 등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비판에 맞서 자본주의를 합리화해준다. 자유지상주의 성향의 영국 싱크탱크 '애덤 스미스 연구소(Adam Smith Institute)'의 다음 기사 역시 그 좋은 예다. 이 기사는 신자유주의가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가디언 지의 한 칼럼에 대해,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 등 ‘신낙관주의자’들이 인용해온 것과 꼭 같은 빈곤율 통계를 인용하며 이렇게 반박한다: "자유 무역과 세계화, 워싱턴 컨센서스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적용된 이 신자유주의의 세대는 어떤 영향을 남겼을까? 바로 인류 종의 역사상 가장 큰 절대적 빈곤의 감소다. 이 감소가 매우 컸던 덕분에, 불평등도 세계적으로 감소해왔다(Worstall, 2016)".


 도대체 그 실체가 불분명한 "포스트모던 네오-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조던 피터슨 역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알려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의 공개 토론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통해, 세상은 유례없이 부유해졌고 빈곤은 전대미문의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1800년부터 2017년 사이에 인플레이션을 보정한 소득은 40배 증가했으며,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미숙련 노동의 소득이 16배 증가했습니다. GDP는 180년에서 1800년 사이에는 단지 약 0.5배의 비율로 증가했을 뿐이었습니다. 즉 180년에서 1800년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이 평평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17년 사이에 갑자기 이런 믿을 수 없는 부(wealth)의 증가가 일어난 것이며, 이는 분명 그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꼭대기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절대적 빈곤을 겪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부유해지고 있고, 온건한 자유 시장 정책을 채택한 국가들에서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빨리 빈곤을 근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빠른 속도로 빈곤을 근절하고 있다는 그의 구체적인 증거는 세계은행이 발표해온 ‘극단적 빈곤’에 관한 통계다. UN의 새천년개발목표 가운데 하나가 2000년에서 2015년 사이에 이 ‘극단적 빈곤’을 50% 줄이는 것이었는데, 그 목표를 2012년에 이미 목표보다 3년 앞서 달성했다는 것. 더 나아가, 2030년까지 이 극단적 빈곤을 완전히 근절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언급하며, 피터슨은 자본주의가 ‘부익부 빈익빈’을 가져온다는 비판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삶도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개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빈곤율에 관한 통계만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날 가장 가난한 대륙인 아프리카의 유아사망률도, 이제는 과거 1952년 유럽의 그것과 같은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면,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기아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모든 증거들은 그 최선의 방법이 자유 시장 경제에 가까운 무언가를 실행하는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굶주린 배를 안고 잠에 드는 사람들이 지구 상에 남아있지 않은가? 스티븐 핑커에게 빈곤과 굶주림의 존재는 사회 구조를 비난할 이유가 전혀 되지 않는다. 빈곤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생기는 일이 아니라, 인간 존재 본연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핑커는 이 인간 삶 본연의 생태를 열역학 제2법칙, 즉, 닫힌 계에서 분자 배열의 무질서한 정도인 '엔트로피'는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설명한다(«계몽», 2장). 엔트로피의 법칙은 빈곤이 곧 인간 존재의 '디폴트'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상의 그 어떤 물질도,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알아서 쓰임새가 있는 물건으로 질서있게 정렬될 수는 없기 때문. 그 정치적 함축은 이렇다: 우리 사회에 '빈곤'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할 근거는 없다. 못난 정치인이든, 탐욕스러운 부자이든, 불합리한 사회 구조이든, 그 어떤 불의한 이유로 인해 가난이 생겨난 것이 아니며, 빈곤은 인간 실존의 기본값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빈곤이 줄어든 것이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바람직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천재지변이나 질병에 가해자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오늘날에도 가난을 논할 때는 가난은 누구 탓인가 하는 주장들이 난무하다(p.52)"며 핑커는 모순을 꼬집는다. 비난할 누군가를 찾아내는 이 정치적 담론들은 핑커가 '계몽주의'의 핵심 정신으로 간주하는 '이성'의 이상적인 작용을 방해한다. "이슈들이 정치화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완전히 이성적일 수 있(p.576)"으며, 따라서 "공공 담론을 더 이성적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슈들을 가능한 한 탈정치화해야 한다(p.577)." 로슬링도 «팩트풀니스»에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지목하여 비난하는 ‘비난 본능’을 비판하는 데에 한 장(9장 ‘비난 본능’)을 할애하는가 하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념은 전문가나 활동가처럼 한 가지 생각이나 한 가지 해결책에 매몰되게 하고, 그러다 보면 더욱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p.278).” 물론, “이념은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와 공공 의료보험을 안겨주었다(같은 쪽)”고도 말하는 로슬링의 관점은 핑커에 비교하면 다소 완화된 편이다. 하지만, ‘신낙관주의’의 대표 저술로 거론되는 두 책이 탈정치적, 탈이념적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특히 자본주의가 불편하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세상이 좋아진다는 '신낙관주의자'들의 이야기에 그토록 반발하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더 좋아지는 것을 거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신낙관주의자들의 귀인(attribution) 논리에 있다. 진보는, 진보주의자들의 정치가 아니라 기술관료적으로 운용되는 자본주의 시장질서 덕분에 이뤄진다! 발전의 척도로서 ‘진보’가, 정치-이념적 의미의 ‘진보’ 없이도 이뤄진다는데 어떤 진보주의자가 좋아할까? “‘진보(the progressive)’들은 진보(progress)를 정말 싫어한다”는 스티븐 핑커의 말처럼, 그의 이야기에 화내는 사람들이 대략 다 ‘진보’인 것은 이런 이유다.


 버크먼의 말처럼, 신낙관주의는 정치적 편향으로 오염된 공공 담론장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한 이해를 공급해주겠다고 약속한다(Burkeman, 2017). 하지만 정치적·이념적으로 오염된 '내러티브'로부터 날 것 그대로의 '팩트'를 복원하려는 이 신낙관주의의 탈정치적 지향은, 물론 철학자 랜든 프림(Landon Frim)과 해리슨 플러스(Harrison Fluss)의 비평처럼, "시작할 때부터 망한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다. 좌파의 내러티브가 계급 갈등이고, 우파의 내러티브가 민족과 국가의 그것이었다면, 스티븐 핑커의 내러티브는 '계몽' 정신과 '계몽'의 적들(종교, 좌우파 포퓰리스트, "사회 정의 투사(Social Justice Warrior; SJW)", 이데올로그들) 사이의 갈등으로 구성된다. 좌파의 내러티브에서는 계급투쟁이, 우파의 내러티브에서는 민족 공동체의 결속이 역사를 진보시킨다면, 스티븐 핑커의 내러티브에서 역사의 진보를 견인하는 건 '계몽'의 승리이며, 따라서 그의 정의 상, '고전적 자유주의'의 승리다.


 하지만, 정치철학자이자 지성사 연구자인  그레이의 지적처럼, 사실 많은 계몽 사상가들은 공공연히 자유주의 이념에 적대적이었다(Gray, 2018). 특히  가운데 '이성', '과학', '진보', '인본주의'  아주 정확히 핑커가 '계몽' 중핵 가치로 꼽는 이념들을 좇으면서도 자유주의 가치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아예 사회가 유일한 종교적 권위 하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유럽의 중세를 동경한 인물이기도 했다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나아가, 그에 의하면, 프랑스 파시즘의 이론을 정초한 모라스(Charles Maurras)에게 사상적 영감을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스티븐 핑커 본인 역시 어렴풋이 인지하듯, 계몽주의는 하나의 완결적인 실체가 아니다. 스티븐 핑커가 단순히 생각하는 것처럼 계몽주의가 반드시 세속주의와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관계는 '계몽'=고전적 자유주의가 인류의 진보를 견인해왔다는 «계몽» 테제와 화학적으로  매끄럽게 결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계몽주의 사상사 연구자인 이스라엘(Jonathan Israel) 지적한 것처럼, 핑커가 옹호하는 근대 세계의 중추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평등권,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정교분리의 이상을 정초하는  사상적으로 가장 크게 기여한 주역은 계몽 사상의 "급진적" 분파였다(Israel, 2009). 문제는, 이스라엘이 보여준 것처럼,  "급진" 계몽주의는 자유시장 경제에 기초한 고전경제학의 자유주의와 길항관계를 맺어왔다는 점이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기업 활동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재산 소유에 기초한 자유로운 경제 활동과 자유무역을 보장하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 원리를 옹호한 고전 경제학의 지지자들은, 동시에 군주제와 귀족정, 식민 지배의 '앙시앵 레짐' 옹호하며,  구질서 안에서의 개혁을 지향했던 보수적 계몽주의자들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를 닦았다고 평가받는  로크,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명한 진리계몽», p.622)" 제시했다는 그가 노예무역을 하던 왕립 아프리카 회사에 투자하는 노예제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그저  개인의 모순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그가 대표하는 보수적 계몽주의의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그의 '평등' 원리는 신학적인 것이어서, 예수 앞에서의 영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일 , 시민적 지위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Israel, 2009). 인간 존재의 영적 차원과 시민사회적 차원을 구별하는  이원론을 허물고 '평등' 원리를 시민사회의 영역에까지 관철시켜, 우리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근대적 개념의 '평등' 완성한  스피노자로 대표되는 급진 계몽주의였음을 이스라엘은 보여주고 있다(Israel, 2009).


 보수적 계몽주의자들에 비해, 부의 재분배를 포함한 보다 근본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했던 급진적 계몽 사상가들 가운데에는, 장 메슬리에(Jean Meslier)와 같이 사적 소유를 강하게 부정하며 아예 재화와 토지의 공유를 주장한 공산주의 성향의 계몽주의자 또한 있었다(Pierson, 2016; 52-53). 가장 유명한 계몽 사상가 장 자크 루소 역시 사유재산 제도를 불평등의 기원으로 지목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며, 루소의 민주주의론은 종종 유럽 주류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에 흡수되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Miller, 1984; 118). 요컨대, 실제 계몽주의는 핑커의 '고전적 자유주의' 뿐만 아니라, 우익 파시즘의 계보에서도, 좌익 사회주의 계보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있을만큼 매우 다원적인 운동이었다. 물론 «계몽»에서 이 모든 논의들은 '탈정치'화를 위해 생략되어 있다. '계몽=자유주의=과학=이성≠이데올로기=정치=좌우익=종교'과 같은 식의 조야한 도식을 위해, «계몽»은 이 복잡한 사실관계를 삭제해버린 셈이다.




 «계몽»의 역사 '탈정치화' 과정에서 또 삭제된 것이 있다면, 진보를 위해 불가결했던 사회 운동이다. 데이비드 벨은 서평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보를 설명할 때, 핑커는 일상을 더 안전하게 만들어준 백신 발명가, 화학 비료 개발자, "주목받지 못한 발명가와 공학자, 정책 연구자, 그리고 수치를 만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특정하며 칭찬한다. ...(중략)... 하지만 "민주주의"나 "평등권"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말할 땐, 마치 전체 인구가 자연적으로 더 계몽되고 너그러워진 결과로 진보가 혼자 알아서 이뤄졌다고 믿는 것 같다. 그는 "정의를 향해 구부러지는 신비한 궤적이 실재로 존재(«계몽», p.329)"하는 것처럼 말한다. 576페이지의 «지금 다시 계몽»에서 완전히 부재한 것은 바로, 수세기 동안 평등권과 노예제 폐지, 노동조건 개선, 최저임금, 결사권, 기본적 사회보장, 더 깨끗한 환경, 다른 수많은 진보적 이상을 위해 투쟁한 사회 운동이다.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 역시 인간 복지 향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과들은 노동 조합과 사회 운동, 공적 자금 지원을 받은 연구, 공공 의료 및 교육 시스템에 의해 가능했고, 역사적으로 자본가들은 이런 사회 개혁을 거부해왔다는 사실들을 생략해버리는 '신낙관주의자'들의 모순을 꼬집는다(Hickel, 2019).


 데이터, 수치, 통계, 팩트. 모두 거부할 수 없는 지적 권위가 느껴지는 말들이지만, 이 말들에 누구보다도 집착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신낙관주의자'들조차도 그 어떤 해석의 층위 없이 날 것 그대로의 사실만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근대의 과학철학이 밝혀낸 진리가 있다면, 어떤 사실도 개체적으로 독립적으로 관찰될 수 없으며, 이론의존적이라는 것. 진짜 과학은 원자적으로 흩어져있는 낱낱개의 사실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사실들 중 내가 손에 쥔 가닥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짚어가며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전체론적 작업에 가깝다. 핑커의 큰 그림에는 어설프게 마음대로 직직 그어버린 줄들이 많다. 책의 제목인 '계몽'에 대해서조차도 수많은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가들은 핑커의 이해가 조야하고 자의적이라고 지적한다. 빈곤과 건강, 행복, 평화와 민주주의 등 사회 개발의 '진보'를 증명하는 신낙관주의자들의 온갖 데이터와 수치, 통계, '팩트'들 역시 그 위에 덧칠된 해석의 층위를 뜯어 살펴보면, 신낙관주의자들의 '팩트' 이상으로 중요한 사실관계를 발견해낼 수 있을 테다.


 유럽 지성사 연구자 제시카 리스킨(Jessica Riskin)에 의하면, 스티븐 핑커의 순진한 과학주의와는 다르게, '계몽' 정신의 상징인 칸트와 흄, 디드로는 오히려 데이터와 해석은 불가분하다는 걸 예리하게 알아챈 사람들이었다(Riskin, 2019). 세상이 나아졌는지 나빠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수치'를 들여다보자고 핑커가 얘기할 때, 우리는 그 '수치'가 무엇을 세고, 무엇을 세지 않았으며, 어떤 방식으로, 어떤 단위로 세었는지, 그 수치 이면의 사실관계를 더듬어보고 해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럼 우리는 핑커에게 이렇게 말하게 될 지도: "그건 계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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