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계몽» 비판을 위하여
바야흐로 ‘팩트’의 시대다. ‘역사의 종언’으로 이념의 시대가 저문 자리에, 이성과 과학이 이념의 권위를 대체한 시대다. 서구 언론들이 1990년대에 '팩트체크'라는 새 저널리즘 형식을 발굴해내며, 냉전기 문화전쟁의 첨병에서 팩트와 진실의 가치를 좇는 매체로 거듭나는 것도, 우연찮게도 이런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있다. 국내에서 팩트체크를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JTBC가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가장 신뢰받는 언론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 현상은, '팩트체크'의 저널리즘적 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이제 '팩트체크'는 정격 저널리즘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권력에 대한 언론의 견제가, 무엇보다도 정치인의 발언이 '팩트'인지 아닌지를 검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정치적 진리의 최종 심급은 더 이상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이념적 가치가 아니라, ‘팩트’다. 고루한 이념적 가치를 앞세우는 이상주의자들은 ‘팩폭(팩트 폭력)’ 앞에 무력하고, 기껏해야 냉소와 비웃음을 마주할 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포스트 트루스(탈진실)’의 부상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2017년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 모인 인파가 ‘역대 최다’ 였다는 당시 백악관 대변인의 발언이 사진 자료를 통해 거짓으로 밝혀지자, 트럼프의 측근인 백악관 고문 켈리엔 콘웨이가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이었다고 변명하는 장면은, 탈진실 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장면이 되어버렸다. 뉴미디어의 등장은, 제 입맛에 맞는 정파적 뉴스를 선호하는 대중의 미디어 소비 행태에 편승하며 ‘가짜뉴스’의 시대를 탄생시켰다. 한국도 가짜뉴스가 던진 새로운 화두를 피해가진 못했다. 유튜브와 카카오톡을 통해 유포되는 가짜뉴스는 매번 정치권을 뜨겁게 달군다. ‘탈진실’이란, 더 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사실’ 역시 제 기호에 따라 소비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이 ‘대안적 사실’과 ‘가짜 뉴스’의 시대적 풍경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팩폭’의 쾌감을 탐닉하지만, 더 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은, ‘팩트’ 시대의 탈진실이라는 이 이율배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어권에서는 ‘팩토이드(factoid)’를 종종 팩트와 구별하고는 한다. 미국 작가 노만 메일러가 마릴린 먼로의 전기에서 만들어낸 “팩토이드(factoid)”라는 단어는, 영단어 “팩트(fact)”와, “유사한 것”이라는 의미의 접미사 “-oid”가 결합되어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왔다(Dictionary by Merriam Webster, 2021). 1980-90년대에 CNN 뉴스 채널은 이 '팩토이드'라는 단어를 헤드라인에 포함시켜 사용하며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단편적 사실"이라는 의미로 유행시켰다고 한다. 요컨대, 팩토이드는 사실의 형식을 취하지만 맥락적 정보를 결여해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거나, 혹은 실제로는 '사실'이 아닌 단편적 정보라고 할 수 있다.
팩토이드는 물론 ‘팩트’의 형식을 취하지만, 팩트와 다르다. 팩트는 사실’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가령, 해외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돌멩이와 아이폰을 비교하는 아래의 ‘밈’은, 사실관계가 결여된 단편적 사실(팩토이드)이 어떻게 부조리한 결론을 내놓을 수 있는지를 재치있게 보여준다. 신형 아이폰 모델에 비해 돌멩이가 더 저렴하고(“Affordable”), 내구성도 좋고(“Shatter Proof”), 새로운 신형 모델의 출시로 인해 가치가 떨어질 일도 없다(“Won’t Be Obsolete”).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비교로 아이폰 대신 돌멩이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아이폰 소비자들의 주된 이해관심은 통신 기능을 갖춘 장비를 구매하는 것이며, 가격과 내구성 따위는 모두 그 이해관심 하에서만 부차적인 관련을 갖는 사항이라는, 사실‘관계’가 고려되지 않은 비교이기 때문이다. 즉 ‘팩트’의 형식을 취하더라도, 적절한 사실관계와 맥락이 뒷받침되지 않는 팩토이드에는, 실질적 의미가 없다.
반대로, 팩트의 권위는 그 사실관계가 부여하는 추론적 힘과 역할, 함축으로부터 비롯된다. 사실관계가 사상된 ‘팩트’가 실은 공허한 까닭이 여기 있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상품 사회가 빚어낸 관계적 속성인 상품 가치를, 상품의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성질로 착각하며 좇는 행태를 ‘물신주의’라고 이름한 바 있다. 마르크스의 이 도식에서 ‘상품’의 자리에 ‘팩트’를 넣는다면, 팩트에 권위를 부여하는 사실관계의 의미망은 무시한 채, 팩트의 권위만 좇는 행태를 우리는 ‘팩트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강준만(2019)은 이 '팩트 물신주의'를 반지성주의("이성적·합리적 소통을 수용하지 않는 정신상태나 태도(pp.35-36)")의 핵심적인 작용방식으로 지목한다. 팩트 물신주의는,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익숙한 정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가용성 편향’과 맞물려 동작한다. 즉, 가용성 편향에 의해 선별된 제 주관적 경험 세계의 ‘팩트’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험 세계를 비껴선 팩트들과, 단순명료한 ‘팩트’로 정리되지 않는 추상적 구조를 인식에서 배제해버린다는 것(p. 43). 이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교류하며 가용성 편향이 더 강화되기 쉬운 온라인 환경에서 훨씬 두드러진다. 즉 팩트 물신주의는, 타자의 이질적 경험을 인정하지 않는 독단적 인식 구조와 소통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합리적 의사소통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김수아, 2017; 김수아, 2020).
이 왜곡된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는 우리가 ‘탈진실’이라고 부른 현상과도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팩트’의 형식을 취하는 '대안적 사실’의 출현, 아무런 객관성을 담지하지 못하지만 뉴스의 형식을 취하는 ‘가짜뉴스’의 유통 따위가 모두, 사실관계의 의미망이라는 추상적 구조에 대한 치밀한 검토는 생략한 채 단순 명료한 ‘팩트’(혹은 팩토이드)를 좇는 현상과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복잡다단한 사실관계가 생략된 단편적 정보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동질적 성원들끼리의 폐쇄적 교류를 더 강화하는 소셜 미디어 등, 팩트 물신주의 반지성과 긴밀히 연결된 요소들은 역시, ‘가짜뉴스’를 부추기는 환경 요인이기도 하다(Allcott & Gentzkow, 2017; Allcott, Gentzkow & Yu, 2019).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비로소 “‘팩트’ 시대의 탈진실”이라는 이율배반을 무모순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강준만(2019)의 분석에 의하면, ‘팩트’ 시대의 상징적 현상인 ‘팩트 폭력’은 기실, 복잡한 사실관계 대신 단순하고 선명한 ‘팩트’로 상대를 제압하는 왜곡된 오락적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이며, 즉 사실관계가 아닌 팩트의 권위만 착즙하는 팩트 물신주의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팩트 물신주의는 폐쇄적이고 경직적인 인지 회로를 형성함으로써, ‘대안적 사실’과 ‘가짜뉴스’ 따위 탈진실의 확산에 기여한다. 어떤 의미에서, ‘팩트’의 지배와 탈진실의 부상은 실은 '팩트 물신'의 반지성주의라는 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현상인 셈이다.
이 팩트 물신주의는 최근 출판 시장을 통해 번듯한 ‘담론’의 탈을 쓰고 전개되기 시작했다. 최근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 등, 주요 저서들의 번역 출판으로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오른 ‘신낙관주의(New Optimism)’ 사조가 바로 그 사례다. 특히, 이 사조를 대표하는 가장 저명한 논자인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지금 다시 계몽»은 팩트 물신주의의 담론 구조에 대한 매우 좋은 케이스 스터디의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다시 계몽»은,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말하는 '과학적' 신념인 '신낙관주의' 사조의 텍스트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는 텍스트다(Burkeman, 2017). «지금 다시 계몽(이하 "계몽")»에는 세상의 진보를 '증명'하는 '팩트'들이 수십여 가지의 그래프들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책이 나열하는 적잖은 '팩트'들이, 그 '팩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핵심적인 사실관계들은 생략한 채, 저자의 주의주장에 따라 편의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령, 그가 전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부터 뚝심있게 밀어붙이는 "인류의 폭력성은 감소하고, 더 평화로워지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계몽»은, 가장 극단적 폭력인 '전쟁'이 감소하고 있다고 말한다. «계몽»이 전쟁의 감소세를 보여주는 증거로 인용하고 있는 두 그래프는, 각각 1500년 이후 열강 사이의 전쟁 햇수 비율('그림 11.1', p.249)과, 1946년 이후의 전투 사망자 비율('그림 11.2', p.252)이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열강 사이의 전쟁이 줄어"드는 동시에, 전체 분쟁의 양상이 변하면서 그 성격이 점점 '열강 사이의 전쟁'으로부터 식민지 정복과 내전, 학살 따위로 옮겨져왔으며(Guilhot, 2018), 근대로 올수록 기술 발전에 힘입어 각 나라들이 운용하는 무력 체계의 살상력이 증가해왔다는 중요한 사실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전쟁이 감소"한다고 평화화를 역설하는 것이 적절할까? 마찬가지로, 1945년 이후의 '장기 평화'가 그 이전 시대 "전쟁들 사이에 낀 휴식기(«계몽», p. 248)"에 비해 특별히 차별화되는 "장기적" 추세인지를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2차 대전 이후의 전투 사망자 비율만으로 우하향하는 그래프를 그릴 것이 아니라, 분쟁 사망자의 보다 장기적인 추이를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특히, 그의 '팩트'들 가운데 상당수가 '빈곤', '평화', '민주주의'와 같이, 자연 세계의 물질적 배열과 관련한 사실이 아닌, 인간이 고안해낸 개념적 구성물에 대한 것이라는 점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모종의 사회적 약속 하에서 의미를 갖는 개념들을, 스티븐 핑커는 날 것 그대로의 팩트인 양 무비판적으로 그의 논의 전개에 이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극빈(극단적 빈곤)'의 정의로 원용하는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 '하루 1.9 달러'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 충족이라는 이해관심에 비추어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그가 인용하는 폴리티 IV 프로젝트의 민주주의 지수를 사용한 '민주정 대 전제정' 점수는 민주화의 시계열적 추세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타당할까? 사실,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이 인류의 복리 후생과 관련해 모든 시대와 지역, 계층에 걸쳐 일관된 의미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Reddy & Pogge, 2009; Edward & Sumner 2016; Allen, 2017). 스티븐 핑커는, 이런 의미의 제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하루 1.9 달러' 미만의 소비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줄어왔다는 기술적 사실을 '극빈'이 줄어들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 관계를 생략한 '팩트', 혹은 팩토이드의 자의적 배열이 '진보 공포증'을 가진 '(진보)지식인'들에 대한 적대적 표현으로 연결된다는 점은, «계몽»의 담론적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하나의 힌트가 되어줄 수 있다. 포퓰리즘적 반엘리트주의나 종교적 색채를 띠는 반과학 따위 미국 맥락의 정통 반지성주의와는 담론적으로 상극을 이루는 듯한 «계몽»의 내용과, 역사학자 데이비드 벨(David. A. Bell)의 비평처럼 '지식인'들에 대한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적대를 지지하게 되는 그 반지성적 정치적 효과 사이의 역설은, 반지성주의를 특정한 이념적 지향으로서가 아니라,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미시적으로 정의한 강준만(2019)의 접근을 취할 때 역시 무모순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계몽»에서 스티븐 핑커가 드러내는 사실관계의 추상적 의미 구조에 대한 성찰 결여, ‘지식인’들을 향한 적대와 몰이해 따위는, ‘반지성주의’의 정치 커뮤니케이션적 특징인 ‘성찰 불능’, ‘적대적 표현’ 등(강준만, 2019; p.36)과 꼭 대응하기 때문이다.
핑커로 대표되는 ‘신낙관주의’의 이런 흐름이 특별히 더 문제적인 건, 산적한 여러 사회 문제들에 관한 정치적 우려에 대해 냉소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신낙관주의' 흐름에 대한 기획기사에서 «가디언» 지의 기자 올리버 버크만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 삶의 고통이 수백년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 신낙관주의자들의 본질적 관심은 아니다. ...몇 가지 더 논쟁적인 함의들이 있다. ...(비록 신낙관주의자들의 저술에 항상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주장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지난 수십년 간 해온 것이 무엇이건, 그것이 분명히 잘 기능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 끌고 온 정치 경제 질서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Burkeman, 2017).” 즉, 빈곤, 건강, 행복, 불평등, 평화, 민주주의 등 인간 개발 및 발전과 관련한 여러 과제들에 대해 긴박하게 반응하며 사회의 진보적 개혁을 이루려는 정치적 행동들은, 기껏해야 호들갑이 되고 만다. 불평등이니 기후변화니 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이 뒤집혀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껏 해온 대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벨에 의하면 그 논리의 정치적 귀결은 “기술관료적 신자유주의(Bell, 2018)”다. 이런 «계몽»과 ‘신낙관주의’의 논리적 귀결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사실’로 유포해온 ‘팩트’들을 그 의미구조 속에서 재조명해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빈곤, 불평등, 민주주의 등 사회 발전의 핵심적인 영역들에 관한 담론에서, '팩트 물신주의'가 질식시킨 사실관계에 기초한 합리적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복원하는 작업이기도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