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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 Apr 07. 2021

빈곤은 줄어들고 있을까-«팩트풀니스»가 말하지 않은 것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의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스 로슬링은 출간 이후 사회과학 분야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꿰찬 그의 저서 «팩트풀니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로슬링, 2019). 로슬링이 던진 이 3지선다의 객관식 문제를, 미국인들은 5%, 한국인들은 단 4%만이 맞혔다. 침팬지는 33%의 정답률을 기록했다. 즉, 사람들은 답을 찍어서 맞힐 확률보다도 훨씬 낮은 정답률을 기록한 셈이다. 정답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이지만, 훨씬 많은 사람들이 "거의 2배로 늘었다", 혹은 "거의 같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한스 로슬링은 사람들이 세계의 상태에 대해서 단순히 무지한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며 안타까워 한다. 세상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데도!



한스 로슬링처럼,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팩트'를 알리는 역할을 자처해온 '팩트' 전도사들이 있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를 모든 미국 대학 졸업생들에게 배포하며 적극 권했다고도 하는 억만장자 빌 게이츠는 SNS에 극빈층의 비율을 비롯한 여러 개발 지표들의 지난 200년 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그래프들을 게시하며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널리 퍼뜨리는 데에 앞장 서기도 한다(https://twitter.com/BillGates/status/1086662632587907072). 저명한 심리학자로서 잘 알려진 «Enlightenment Now(지금 다시 계몽)»의 저자 스티븐 핑커 역시 1820년 거의 90%에 육박했던 극빈층 비율은 200년 사이에 10%로 감소했으며, 그 감소 중 절반이 지난 35년 동안, 즉 1980년 이후 2015년까지의 기간 동안 이뤄졌다며(Pinker, 2018; p.87),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림 1의 그래프는 스티븐 핑커와 빌 게이츠가 이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진 "극단적 빈곤"의 비율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그래프다. 산업화 이전에는 전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극단적 빈곤을 겪었지만 이후 그 비율은 눈부시게 감소했으며, 특히 최근으로 올수록 그래프의 기울기가 더 가팔라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불과 몇 년 안에 빈곤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도 허황된 꿈은 아닌 것 같다.




그림 1. 1820-2015년 "극단적 빈곤" 인구 비율



근데, 이 ‘팩트’는 과연 얼마나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팩트일까? “빈곤은 줄어들었다”는 명제가 사실, 정의하기 모호한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 빈곤이 줄어들었다고 말하려면 ‘빈곤’을 양적으로 측정해야 하는데, ’빈곤’은 추상적 개념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계량 가능한 방식으로 재정의 하는 것을 ‘조작적 정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한스 로슬링과 스티븐 핑커의 “극단적 빈곤율이 감소했다”는 명제 역시 어떠한 조작적 정의에 기초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이 인용하고 있는 그래프는 모두, 세계은행(World Bank)에 의해 정의된 국제빈곤선인 1.9 달러(2011년 달러)의 기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하루 1.9 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극단적 빈곤"으로 정의했다. 한스 로슬링이 그의 저서 «팩트풀니스»에서 소득 수준 1단계로 분류한 구간과도 대략 일치한다. 그럼, 이 1.9 달러의 빈곤선은 빈곤을 측정하기 위한 적절한 기준일까?



답이 “예”라면, 하루 1.9 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줄어들면 빈곤은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근데, 문제는 하나 더 남아 있다. ‘줄어들었다’는 건 무슨 기준으로 말해야 할까?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은 모두 '비율'을 기준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빈곤층의 비율이 줄어든 동시에 빈곤 상태에 사는 인구의 절대적 수는 늘어났다면, 과연 빈곤이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빈곤 인구의 무게가 전체 인구 규모에 의해 달라지는 '비율'보다, 모든 빈곤한 사람 한 명 한 명을 같은 무게로 헤아리는 절대적 수가 더 바람직한 기준이 아닐까?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은 1.9 달러는 적절한 기준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상대적 비율의 감소 역시 유일한 최선의 기준은 아니라고 말한다(Hickel, 2019a, 2019b). 그는 그림 1과 같은 그래프를 자신의 SNS에 게시하며 인류의 삶이 눈부시게 개선되어왔다고 역설하는 빌 게이츠를 반박하며 논쟁의 신호탄을 쏘아올린다. 먼저, 왜 그는 1.9 달러가 적절한 기준이 아니라고 말하는 걸까? 물론 빈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는 그 답이 굉장히 모호한 문제이지만, 적어도 적절한 수준의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영양 실조 상태에 있는 인구는 '빈곤'하다고 말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거꾸로, 어떤 '빈곤'의 기준이 경제적 이유로 영양 실조에 처한 사람들이나 식량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그 기준이 과연 빈곤을 측정하는 데에 적절한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히켈에 의하면 1.9 달러의 빈곤선이 바로 그러하다. 오늘날 1.9 달러 미만의 '극단적 빈곤' 상태에 있는 인구는 세계 인구의 10% 수준인 7억 명 정도이지만, 동시에 15억 명 이상이 식량 안보의 위협(food insecurity) 상태에 있으며, 20억 명 이상이 영양 실조(malnutrition)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1.9 달러는 어떤 기본적 욕구에도 바탕을 두지 않은 자의적인 기준이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즉, 세계은행의 “극단적 빈곤” 개념은, 인간의 복지와 관련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준으로 빈곤을 측정하고 있다는 논리다.



그럼 이 '1.9 달러'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을까? '1.9 달러'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매우 작은 가치일 뿐이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저소득 국가들에서는 그보다 훨씬 큰 구매력을 갖고 있지 않을까? 단도직입적으로, 그렇지 않다.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 1.9 달러는 나라별 물가와 그에 따른 구매력의 차이를 반영한 2011년 PPP 달러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이론적으로는, 저소득 국가들에서도 2011년 미국에서 1.9 달러가 보유하고 있는 구매력과 동일한 구매력의 화폐로 환산되는 셈이다. 이 PPP 달러를 한국 화폐인 원()으로 환산한 후, 2011년과 2020년 사이 소비자물가상승률을 반영해 2020년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한 달 6만원에 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따라서, 세계은행의 "극단적 빈곤"의 정의는 한국에서 한 달 약 6만원, 하루 약 2000원 정도로 사는 것에 준하는 상태인 셈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면, 세계은행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낮은 빈곤선을 기준으로 빈곤율을 측정하는 것일까? 세계은행이 사용하는 국제빈곤선의 연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경제학자 라발리온(Martin Ravallion)의 작업들이다. 1991년 그의 논문에서 라발리온은 33개 국가의 빈곤선을 동등한 구매력의 1985년 PPP 달러로 환산하여 비교해보았다. 그랬더니 저소득 국가들 가운데 6개 국가의 빈곤선이 한 달 31 달러 수준에 형성되어 있었고(Ravallion, Datt & van de Walle 1991), 이 한 달 31달러의 빈곤선은 곧 세계은행에 의해 하루 1달러의 국제빈곤선으로 사용되었다. 2001년, 라발리온은 표본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은 10개 빈곤선의 중위값을 취해 1993년 PPP 달러 1.08달러로 국제빈곤선을 수정했고(Chen & Ravallion, 2001), 2009년에는 보다 큰 74개 국가의 표본으로부터, 그 가운데 가장 가난한 15개 국가의 빈곤선을 2005년 PPP 달러로 환산, 국제빈곤선을 1.25 달러로 업데이트했다(Ravallion, Chen &  Sangraula, 2008). 그리고 가장 최근에 사용되는 1.9 달러의 빈곤선은 라발리온이 도출한 빈곤선을 물가의 변화를 반영해 2011년 PPP 달러로 환산한 세계은행 소속 경제학자들의 연구(Ferreira et al., 2016)를 따르고 있다. 즉,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은 빈곤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을 바탕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표본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빈곤선을 동일한 단위로 환산해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 적용하면, 빈곤선이 비교적 높은 나라들의 빈곤율은 과소 평가하게 될 테다.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 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그 사회에 통용되는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 역시 따라 증가할텐데, 이런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동일한 빈곤선으로 빈곤을 측정하면, 빈곤층의 생활수준이 실질적으로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더라도, 단순히 소비의 증가에 따라 빈곤율이 감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Fischer, 2018, p.13). 통시적으로 모든 시대와 사회에 걸쳐 동일하게 적용되는 '절대적 빈곤'의 기준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쉽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럼, 적절한 국제빈곤선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 경제학자 에드워즈(Peter Edwards)는, 74-5세의 표준 기대수명(normal life expectancy)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 빈곤선(Ethical Poverty Line)”을 2.7달러에서 3.9달러 수준으로 계산한 바 있다(Edwards, 2006). 즉, 세계은행의 1달러 국제빈곤선에 비해 2.7배에서 3.9배 높은 기준이다. 그래서 히켈은 2011년의 물가로 계산한 PPP 달러 기준 국제빈곤선인 1.9 달러의 약 3.9배에 해당하는 7.4 달러가 빈곤을 측정하는 데에 보다 적절한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은행의 1.9달러보다 적절한 기준인 하루 7.4 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인구의 절대적 수가 1981년 이래 약 10억 명 가까이 증가했다고 지적한다(Hickel 2016, 2019a, 2019b). 1.9 달러의 빈곤선을 기준으로는 1981년 19억 명에서 2017년 6억 9천만 명 정도로 약 12억 명이나 빈곤 인구가 감소한 것에 비교하면, 그 추세가 사뭇 달라졌다. 빈곤을 측정하는 기준을 상대적 비율이 아닌 절대적 수로,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 1.9 달러가 아닌 7.4 달러로 바꾸니, 그림이 완전히 달라졌다(그림 2).



그림 2. 서로 다른 빈곤선($1.9, $7.4)에 따른 전세계 빈곤 인구



하지만, 세계은행의 빈곤선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물론,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은 모든 빈곤을 측정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기준일지 모르겠지만, 가장 보수적인 추정으로서, 그 어떤 눈높이로 바라보든지 “빈곤하다”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가난을 측정하는 데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1.9 달러는 이미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겐 하찮은 돈일지 모르지만,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라발리온은 전체 표본 국가들 사이에서는 그 나라의 평균적인 소비 수준이 증가함에 따라 빈곤선도 따라서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 양(+)의 기울기를 보이지만, 국제빈곤선 근처에 빈곤선을 형성하고 있는 가장 가난한 나라들 사이에서는 그런 관계가 비교적 약하거나, 혹은 그 기울기가 “평평(flat)”하다고 주장한다(Ravallion, Datt & van de Walle 1991; Chen & Ravallion, 2001; Ravallion, Chen &  Sangraula, 2008). 말하자면,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빈곤선은, 그 나라의 소득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기준의 빈곤이 아니라, 최소한의 보편적 필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 빈곤을 반영하고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세계은행이 1.9 달러의 국제빈곤선을 통해 측정한 빈곤을 기본적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극단적 빈곤”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낮은 수준의 빈곤선을 사용하는 데에도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은 단순히 지나치게 낮다는 데에 그 문제가 있지만은 않다. 더 복잡한 문제가 세계은행이 빈곤선을 환산할 때 사용하는 '구매력평가(Purchasing Power Parity; PPP)'라는 개념에 있다.



세계은행은 국제빈곤선을 계산하기 위해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빈곤선을 ‘달러($)’라는 동일한 단위로 환산한다. 이 환산에 적용되는 것이 바로 ‘구매력평가지수(Purchasing Power Parities; PPPs)’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1.9달러 미만 빈곤율을 계산하려면 1.9달러를 한국의 화폐인 원(₩)으로 변환하여야 하는데, 단순히 달러/원 환율을 적용해 변환하면, 한국과 미국의 물가 차이 때문에 구매력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런 차이를 제거하고 미국의 1.9 달러와 동일한 구매력을 가진 한국 원(₩)이 얼마인지를 계산하기 위해 필요한 게 PPP 환산율이다.



구매력평가(PPP)를 이해하기 위한 쉬운 예가 바로 '빅맥 지수'다.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전세계의 맥도날드 체인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빅맥 햄버거의 가격을 달러로 환산해, 여러 나라들 사이의 물가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지수를 발표해왔다. «이코노미스트»에 의하면, 2021년 1월 기준 빅맥 가격은 한국에서는 4500원, 미국에서는 5.66 달러로, 곧 동일한 구매력(=빅맥 하나를 살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진 두 화폐 사이의 교환비율은 795.05다(The Economist, 2021). 실제 달러/원 환율과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계은행이 적용하는 PPPs의 산출은 물론 빅맥지수보다 복잡하지만, 그 기본적 논리는 이 빅맥지수의 논리와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빅맥지수에서 측정한 물가는 고정된 재화(빅맥 햄버거) 하나만을 기준으로 측정된다면, 세계은행의 PPP 환산율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여러 재화와 용역의 집합(바스켓)에 대한 물가 자료를 바탕으로 계산된다는 차이가 있다.



경제학자 산제이 레디(Sanjay Reddy)에 의하면 이 PPP의 기준 바스켓이 세계은행의 빈곤 측정이 안고 있는 문제다. 빈곤층이 생계를 유지하거나 혹은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재화가 아니라, 전체 인구가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재화와 용역을 반영하기 때문이다(Reddy & Pogge, 2009). 예를 들어, 저소득층일수록 전체 지출에서 식료품의 지출 비율('엥겔지수')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빈곤층이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식품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물론 먹는 것만이 살림살이의 전부는 아닐 테지만, 레디의 주장에 의하면, 단순히 인구의 일반적인 소비 성향을 반영하는 재화와 용역의 집합보다는, 식품의 물가 수준이 빈곤층의 구매력을 측정하는 데에는 보다 적절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을 그와 동일한 가치의 달러로 환산하기 위해 일반 PPPs를 적용하면, 그 나라들에서 식량을 빈곤선 수준만큼 구매하는 데에 필요한 달러가 얼마인지가 아니라, 인구의 평균적인 소비 품목을 그만큼 구매하는 데에 필요한 달러가 얼마인지를 계산하게 되는 셈이다. 마찬가지의 오류가 달러로 환산한 국제빈곤선을 전세계 각 국가의 화폐로 환산할 때에도 발생한다. 실제로는 빈곤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식품 등의 품목을 1.9 달러 어치 사는 데에 필요한 루피(인도 화폐)의 액수를 계산해야 인도의 빈곤선을 보다 정확히 측정할 수 있지만, 인구의 평균적인 소비 품목을 1.9 달러 어치 사는 데에 필요한 루피가 얼마인지를 계산하게 되는 셈이다.



레디의 계산에 의하면 식품의 물가로 PPPs 환산율을 계산해 빈곤선을 환산하면, 각 나라의 화폐로 환산된 국제빈곤선이 전체 품목으로 계산한 PPPs를 적용했을 때보다 높아진다(Reddy & Pogge, 2009). 세계은행의 방법론이 많은 나라들에서 빈곤율을 실제보다 낮게 측정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증거다. 뿐만 아니라, 레디의 주장을 따르면 식품 가운데서도 특히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필요와 긴밀히 관련된, 빵 및 곡물의 물가로 PPP 환산율을 계산해 적용하면, 국가별 소비 수준과 빈곤선 사이의 관계도 보다 더 가파른 기울기로 변한다. 라발리온은 빈곤선이 가장 낮은 저소득 국가들 사이에서는 그 평균적인 소비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빈곤선도 높아지는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었다(Chen & Ravallion, 2001). 즉 한 좌표평면 위에 나타냈을 때, 이들 국가의 소비 수준과 빈곤선은 “평평한(flat)” 기울기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게 그가 주장한 발견이었다. 하지만 레디에 따르면, 이 가장 가난한 나라들 사이에서도 소비 수준과 빈곤선의 관계는 사실 평평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이들 나라의 빈곤선도 1993년 가치로 한 달 26달러에서 87달러의 사이에 소비 수준과 비교적 완만한 양(+)의 기울기(탄력성;독립변수의 변화율에 대한 종속변수의 변화율)를 가지며 분포하는데, 빈곤선을 빵 및 곡물의 물가를 기준으로 PPP 환산했을 때에는 전체 품목의 물가로 PPP 환산율을 적용했을 때에 비해, 그 사이의 기울기가 두 배로 커졌다는 것. 즉, 레디에 의하면 빈곤층의 생활수준과 가장 밀접한 식품들(빵, 곡물)에 대한 구매력을 기준으로 빈곤선을 측정했더니, 가난한 나라들에서도 한 나라의 1인당 소비 수준의 1% 증가는 빈곤선의 0.636% 상승으로 이어지는 통계적 관계가 있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이 소득 수준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최소한의 욕구를 반영한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취약해진 셈이다(사실, 보다 최근 자료를 바탕으로 한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식품 PPPs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최빈국들의 빈곤선과 소비 수준 사이에 양(+)의 기울기가 나타난다; Jollife & Prydz, 2016).



그럼, 이렇게 식품 PPPs로 빈곤율을 계산하면 어떻게 될까? 우선 PPP 환산율을 적용해 각국의 통화로 환산할 빈곤선을 먼저 설정해야 한다. 레디에 의하면, 1.9 달러는 어떤 역량이나 기본 욕구의 비용에 기초하지 않은 자의적 기준이다. 반면, 미국 농무부의 영양 정책 진흥 센터(Center for Nutrition Policy and Promotion)는 미국에서 권장 식이 허용량(Recommended Dietary Allowance)을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2인 자녀 포함의 4인 가구 기준 일인당 하루 5.04 달러로 추산한 바 있는데, 레디는 PPP가 모든 나라들에서 똑같은 수준의 구매력을 보전한다는 논리를 따르면, 국제빈곤선은 기준 국가인 미국에서 역시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구매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5.04 달러를 ‘식량 빈곤선’의 기준으로 제시한다(Reddy & Lahoti, 2015). 그렇게 5.04 달러를 식품 PPPs를 적용해 환산하여 빈곤율을 계산하였더니, 1.9 달러의 빈곤선에 일반 PPPs를 적용했을 때보다 빈곤 인구가 훨씬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같은 5.04 달러의 빈곤선에서도, 식품 PPPs로 환산했을 때 일반 PPPs로 환산한 경우보다 빈곤 인구가 더 많이 계수되었다. 레디와 라호티의 연구에 의하면, 5.04 달러 미만 빈곤 인구 수는 1980년 28억 8천만 명에서 38억 8천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절대적 수가 아닌 빈곤율 역시 1980년 68.9%에서 2000년 70%로 소폭 증가하였다가, 2000년대 이후에야 의미있는 감소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그림 3).



그림 3. 일반 PPPs를 적용한 $1.9 빈곤율과 식품 PPPs를 적용한 $5.04 '식량 빈곤' 비율



세계은행의 빈곤선이 과연 타당한 근거가 있는지 의심할만한 이유는 더 있다(Reddy & Pogge, 2009). 단적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의 물가 자료는 선진국들에 비해 신빙성이 낮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같은 나라 안에서도 빈곤층이 직면하는 물가 수준이 그 나라의 일반적 물가 수준과는 다를 수 있다. 빈곤층은 같은 물건을 구입하더라도 더 적게 구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높은 단가를 지불하게 되기 때문이다(Rao, 2000). 더욱이, 통계 자료를 생성할 사회적 인프라가 부실하고, 빈곤 통계가 정치적 고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저소득 국가들의 빈곤선을, 과연 액면가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인지도 문제다(Fischer, 2018). 세계은행의 빈곤선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검토한 끝에, 유엔(UN)의 '극단적 빈곤 및 인권 문제에 관한 특별보고관'을 지낸 필립 올스턴(Philip Alston)은,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된 최종보고서에서 1.9달러의 국제빈곤선을 바탕으로 한 세계은행의 접근이 빈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서 부적절하다고 결론짓는다(Alston, 2020).



세계은행의 빈곤선에 문제가 있다면, 상대적 비율이 아닌 절대적 수에 착안하는 제이슨 히켈의 두 번째 주장은 어떤가? 빈곤 인구가 지난 사십년 동안 늘어났다고 하더라도, 세계 인구가 그보다 훨씬 더 빨리 증가해왔음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상태가 개선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절대적 인구 수와 상대적 비율의 변화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 둘 중 어느 하나만이 빈곤의 추세를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빈곤이 자연 상태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즉 빈곤이 인류의 디폴트값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전체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빈곤 인구 역시 증가하여도, 빈곤율이 감소하면 '진보'일 거다. 반면, 오늘날과 같이 부유한 세상에서 빈곤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고 따라서 빈곤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빈곤율이 줄어들더라도 빈곤 인구가 늘어나면 빈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말할 테다.



제이슨 히켈은 당연히 후자이고, 스티븐 핑커가 전자에 해당한다. 스티븐 핑커에 의하면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빈곤은 인류의 "디폴트"다(Pinker, 2018, p.25). 물질이 인간의 필요를 위해, 제 쓰임새에 알맞게 알아서 정렬되지는 않으니까. 그는, 질병 따위에는 가해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빈곤에 대해서는 비난할 인물을 찾는 사람들의 행태를 지적한다. 누군가 질병을 만든 게 아니듯, 마찬가지로 악의적인 누군가가 빈곤을 만든 게 아닌데, 사람들은 왜 빈곤 문제에 대해 기득권자들을, 정치인들을 비방하는 걸까? 반면 히켈은, 빈곤율의 감소를 빈곤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인류의 경제적 역량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지표는 그 어느 때보다 악화되었으며, 이는 경제 성장의 과실 절대 다수가 부자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Hickel 2019b).



빈곤 문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관점 차이를 좁히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히켈의 지적대로 빈곤의 지리적 분포를 중국 바깥 세계에 한정해 관찰하면 '비율'과 '절대적 수' 사이의 간극은 비교적 좁혀진다. 즉 빈곤율 감소분의 상당 부분이 아시아,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국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인구수는 1980년대 이후 10억 명 이상을 기록하며, 전세계 인구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중국에서 빈곤율이 급격히 감소하며, 전체적인 추세가 크게 좌우된 것.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서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7.4 달러 미만 빈곤 인구의 절대적 수뿐만 아니라, 상대적 비율 역시 62%에서 67%로 증가했다. 물론 그 이후 2000년대 이래에는 다시 감소하기 시작해 2016년 58%를 기록하지만, 애초 빈곤율이 증가하기 이전 1981년에 비해서는 35년 동안 4%p 감소한 수준일 뿐이다. 즉, 스티븐 핑커가 1820년대 이래 이뤄진 빈곤율 감소의 절반이 일어난 시기로 지목한 기간동안 이뤄진 변화의 보다 구체적인 실상이다. 세계은행의 기준을 따라 그린 애초의 그래프에 비해 빈곤율이 단순히 더 높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경과에 따른 추세 역시 바뀌었다(그림 4). 특히, 1980-90년대에 걸친 약 20년 간의 그림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세계은행의 기준으로는 이 시기 빈곤율은 전세계에 걸쳐 감소 추세를 그리지만, 중국 바깥 세계 7.4 달러 미만의 빈곤율은 완만히 상승하고 있었다.



그림 4. 세계은행의 '극단적 빈곤' 비율($1.9)과 중국 바깥 7.4 달러 미만 빈곤율($7.4, exc.CHN)



하지만 히켈의 비판이 전적으로 타당하지만도 않다. 히켈은 세계은행의 국제빈곤선이 지나치게 낮다고 주장하며 7.4달러가 더 나은 빈곤선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세계은행의 “틀린” 빈곤선 대신 다른 어떤 하나의 빈곤선으로 빈곤을 측정하는 것이, 세계은행의 방법론이 가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히켈은 스티븐 핑커의 접근이 가진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스티븐 핑커는 빈곤선과는 상관 없이, 세계의 전체적인 소득 분포가 상향 이동했다는 사실이 빈곤이 개선된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그의 논리가 타당하려면 같은 수준의 소득이 세계의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시기에 걸쳐 비슷한 구매력과 생활수준을 보장해야 한다. 어떠한 기준으로든 생활수준 사이의 비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측정의 일관성이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히켈의 '7.4달러 빈곤선'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멀다는 걸 이미 앞선 연구들이 지적해왔다. 따라서, 지역과 국가별로 여러 빈곤선 근처의 소득 분포의 변화를 조금 더 뉘앙스 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평균적인 소득 수준이 비교적 낮고 사회적 개발 수준이 낮았던 아시아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는 1.9 달러의 빈곤선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에 비해 사회 경제적 수준이 높았던 지역에서 살아가는 빈곤층의 생활수준 변화는, 보다 높은 빈곤선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겠다. 반대로, 지나치게 높은 빈곤선을 적용하면 빈곤선이 낮게 형성되어 있는 나라들에서 이뤄진 소득 수준의 개선을 가리게 될 수도 있을 테다.



세계은행은 “앳킨슨 리포트”라고 불리우는 보고서의 권고를 수용해 소득 수준에 따라 빈곤선을 차별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즉 세계은행의 소득 분류 기준에 따라 빈곤선을 달리 계산하면 중하위 소득(lower-middle income) 국가 빈곤선의 중위값은 하루 3.2 달러, 중상위 소득(upper-middle income) 국가 빈곤선의 중위값은 하루 5.5 달러다(Jollife & Prydz, 2016). 같은 세계은행의 분류체계 상 ‘저소득 국가’의 빈곤선에 해당하는 1.9 달러를 기준으로는, 중국 다음 가는 몸집인 인도의 성장에 힘입어 8-90년대 중국 바깥 세계의 빈곤율이 소폭 하락하는 반면, ‘중하위 소득 국가’의 3.2 달러 이상의 빈곤선에서는 소폭 증가하고 있었다(그림 5). 요컨대, 인도에서는 빈곤 문제의 의미 있는 개선이 있었지만, ‘중하위 소득’ 이상 수준의 나라들을 포함한 나머지에서는 정체하거나 악화되어, 전반적인 정체의 양상을 띠었다. 어떤 기준으로든 명백한 개선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2000년대 이후다. 스티븐 핑커가 1820년 이래 인류사에서 이뤄진 빈곤율 감소의 '절반' 가까이가 일어난 시기로 지목한 35년의 기간 중 첫 절반(1981-99)은, 사실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서는 빈곤의 개선이 정체했던 시기다.


 

그림 5. 서로 다른 국제빈곤선에 의한 빈곤율 ("exc.CHN": 중국을 제외한 빈곤율)



애초에 중국처럼 빈곤율이 감소한 나라들을 모두 제외하고 관찰하면 결국 빈곤율이 상승하는 추세를 볼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히켈에 의하면 같은 시기 IMF와 같은 국제기구에 의해 구조조정을 강요당하고 강제적으로 세계 시장에 통합당한 남반구와는 달리, 중국은 국가 주도의 자주적 결정에 의해 점진적으로 세계화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남반구의 개발도상국들과 차별화된다. 더 나아가, 히켈은 2000년대 이후 아시아 지역을 제외하고는 빈곤율이 가장 크게 감소한 지역이, 중도 좌익 세력의 '핑크 타이드'가 휩쓴 라틴 아메리카라는 점도, '자유 시장'의 확산과 더불어 빈곤율이 줄어들었다는 스티븐 핑커의 내러티브와 충돌한다고 지적한다. '빈곤'의 측정을 둘러싼 논쟁이 사실, 단순히 '팩트'의 문제가 아니며 서로 다른 정치적 내러티브와 해석 사이의 경합이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팩트의 시시비비와 뉘앙스에 따라 매우 다른 정치적 함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래 빈곤율이 꾸준히 눈부시게 감소해왔다는 핑커의 내러티브는 80년대 이후 전개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긍정하게 된다면, 반대의 입장에서 그를 비판하는 히켈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빌 게이츠를 비판한 히켈의 칼럼을 두고 핑커는 그를 '맑시스트 이데올로그'라고 비방하기도 한다.



물론, 빈곤이 줄어들었다는 낙관주의자들의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과연 '팩트'다. 핑커와 같은 낙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눈부시지는 않아도, 적어도 2000년대 이래 세계의 빈곤율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세계은행 빈곤 데이터의 시계열이 시작된 1980년대 이래 35년의 기간 중 그 어떤 임의의 한 시점에 비해서도, 오늘날의 빈곤율이 더 낮다는 데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10여년 만에 빈곤율이 상승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고로, 사람들이 세상을 실제보다 더 나쁜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낙관주의자'들의 지적이 크게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히켈이 스티븐 핑커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낙관주의자'들의 관심이 빈곤율이 줄어들었다는 팩트를 넘어, 어떤 정치적 함의를 띠는 지점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세계의 빈민들을 "자유 시장"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확산이 구원했으며, 그 결과 인류의 대부분이 세계화의 "승자"가 되었다는 일부 '신낙관주의자'들의 내러티브에는, 생략되거나 단순화된 '팩트'들이 꽤 많다. 고로, 이들이 흐릿한 눈을 뜨고 지나쳐 뭉개버린 자잘한 사실들까지 하나하나 따져본 고해상도의 내러티브는 사뭇 다른 모습일 테다. '낙관주의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팩트’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 있다.






P.S. 이 글의 조회수가 조금 더 높아서, 조금 더 업데이트된 버전인 ​ 포스트​를 링크한다 («지금 다시 계몽» 비판: ‘빈곤’의 팩트, 혹은 팍툼​). «팩트풀니스»와 비슷한 계열의 사조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스티븐 핑커 «지금 다시 계몽»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세계은행의 ‘극빈’ 통계를 분석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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