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버크부터 스티븐 핑커까지
프랑스 작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는 ‘팡글로스’라는 이름의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캉디드’의 가정교사인 팡글로스는, 비상식적이며 과도한 낙관주의자다. 팡글로스의 철학에 따르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최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최선의 상태다. 그의 세계관에서는 세상 만물이 항상 최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캉디드는, 명망 있는 남작 가문의 딸 ‘퀴네공드’와 사랑을 나누다가 남작에게 들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작은 호의에도 감동하며 "세상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순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범죄자가 되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린 그의 여정은 낙관주의자 팡글로스의 가르침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점점 느끼게 해준다. 끊이지 않고 캉디드의 여정을 따라다닌 온갖 불행을 겪는다면, 비관주의자가 되지 않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낙관주의자 팡글로스는 그의 가르침을 끝까지 고집한다. 팡글로스는 캉디드의 모든 불행과 고초들은 심지어 가장 나은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났어야만 할 사건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캉디드»의 저자 볼테르가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사상적 배경에서, 낙관주의자 팡글로스는 모든 불행마저도 실은 가장 조화로운 세상을 향하는 신의 계획 속에 있다는 예정조화설을 상징하는 인물로 흔히 해석된다. 즉, 전지전능하며 선한 신이 다스리는 세상에 전쟁과 가난 따위의 불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낸 이론이었다. 사실과 이성에 기초하지 않는 예정조화설의 신앙이, 인간 이성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비웃음을 사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팡글로스들은 오히려 '사실과 이성'이 그들의 편에 있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계몽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낙관주의는 철저히 '팩트'에 기초한 합리적 사고라는 것. 빌 게이츠(Bill Gates),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한스 로슬링(Hans Rosling) 등 이른바 ‘신낙관주의자(New Optimist)’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바로, 입을 모아 이런 낙관주의를 역설하고 있는 이들이다. 인류의 삶은 과거에 비해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의 변화는 근본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 낙관주의의 핵심적인 근거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이라는 저서를 통해, 과거에 비해 인류의 폭력은 점점 감소하고 있다며 인간 본성의 변화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으로 유명한 저자다. 스티븐 핑커는, 최근에는 전쟁과 폭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인류가 이룩한 괄목할 만한 진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며, 세상은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좋아졌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그의 새로운 주장들을 들고 테드(TED) 강연에 나선 스티븐 핑커는, 숫자들(통계)은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인다며, 각종 통계들을 통해 산업혁명 이래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인류가 과거에 비해 더 건강해졌고, 더 오래 살게 되었으며, 더욱 평화로워졌고, 더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역시 테드 강연이 만들어낸 스타이며, «팩트풀니스»라는 저서로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한스 로슬링 역시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뛰어난 데이터 시각화 능력으로 인상적인 대중 강연을 남긴 한스 로슬링은,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각종 통계를 통해 증명해보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세계가 더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단순히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이 더 나빠지고 있다는 매우 잘못된 믿음을 '체계적으로' 형성하고 있다(p.21). 빈곤율과 건강, 교육 수준 등 여러 지표들에 대한 질문에, 사람들은 일관되게 실제보다 세상이 더 나쁘다고 답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 빈곤율은 줄어들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로 오해했고, 평균 기대수명은 실제보다 낮다고 생각했으며, 여성의 교육 수준도 실제보다 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빌 게이츠는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고 말하는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의 저작들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 왔다(Gates, 2012, 2018a, 2018b). 스티븐 핑커의 «Enlightenment Now»를 그의 인생작으로 손꼽는가 하면,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는 모든 미국 대학 졸업생들에게 배포하며 적극 권하기도 했다. 그 역시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낙관주의 메시지를 다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한편에는 이런 낙관주의자들이 불편한 사람들도 있다. 여전히 세상에는 굶주린 배를 안고 살아가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있고, 전쟁의 위험 속에 불안으로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데도 세상이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니, 인정머리 없다고 생각할 삐딱한 사람들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로슬링의 말에 의하면, 세상을 실제보다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부정 본능'의 세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는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좋아진다고 말하면 냉정해 보이기 때문(p.95)"이다.
미국의 잡지 «커런트 어페어스(Current Affairs)»에 실린 한 풍자 만화는 "냉정"한 신낙관주의자들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잘 보여준다(Freiheit & Gold, 2018). 만화 속에서 스티븐 핑커는 장례식에서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에게는 "인류의 수명은 과거에 비해 훨씬 길어졌다"고 말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총기 난사로 사망했을 '스쿨 슈팅' 현장을 찾아가서는 눈치없이 "데이터에 의하면 과거에 비해 폭력은 48%나 줄어들었다"고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Black Lives Matter" 시위대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그래도 과거의 노예제에 비하면 흑인의 처우가 얼마나 나아졌냐는 말을 떠들 셈이다. 상황 맥락 따지지 않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그의 낙관주의는 그저 황당하다.
소설 «캉디드»에서 팡글로스는, 폭풍우를 만난 배 위에서 캉디드의 은인이 물 속에 빠지자, 세상은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기어코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세상 만물에 원인과 결과가 있고 결과를 위해 원인이 있다는 예의 그 철학대로, 정해진 목적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그가 물 속에 빠져 죽는 것이 최선이었으며, 그럴 수밖에 없도록 항만이 만들어져 있었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가 그런 궤변을 늘어놓으며 은인을 구하려는 캉디드를 말리는 동안 폭풍이 배의 갑판을 부서뜨려 모두가 물에 빠지고 만다. 만화 속의 스티븐 핑커와 소설 속 팡글로스가 어딘가 겹쳐 보이지 않는가? 당장 눈앞에 시급한 불행과 위기가 닥친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낙관주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괜히 화만 북돋울 뿐이다.
'신낙관주의자'들에 대한 이런 묘사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한스 로슬링이 지적했듯이, 세계가 좋아지고 있다는 말이 곧 모든 것이 괜찮으며, 빈곤과 기아 따위의 범인류적 문제들을 외면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상황은 나쁘면서 동시에 나아지고 있기도 하고, 나아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쁘기도(로슬링, 2019, p. 103)" 하다. 스티븐 핑커는 그저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이 중 한 편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팡글로스와 같은 '눈새' 취급을 받을 필요가 있는 걸까?
어쨌든,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비판적 사회 담론에 익숙한 사람들, 핑커의 표현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낭만을 갖는 “좌파”이거나, 혹은 “사회 정의 투사(Social Justice Warrior)”인 사람들에게는 종종 불편한 진실로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분명, 신자유주의의 지구적 확산과 부익부 빈익빈, 기후위기의 심화, 혐오와 차별 감정의 확산으로 세상은 종말로 치닫고 있는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게 다 호들갑이었다니! 한스 로슬링의 질문에,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 역시 예외 없이 정답률이 낮았던 이유도 대략 짐작이 간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보적 언론과 불평등의 문제에 천착하는 비판적 사회과학 담론들에 둘러싸여, 세상을 누구보다도 삐딱하게 볼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이 ‘낙관주의’가 사회 구조의 유지와 안정을 꾀하는 보수적 성향의 정치와 호응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대목이다. 물론 세상은 아직 완벽히 정의롭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 지금의 세계가 근본적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세상이 정말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지금까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온 사회 구조를 보전하며,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사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급진적 운동가들과 정치인들이야말로 오히려 정의의 실현에 명백한 위협이다. 이렇듯, 세상의 진보를 이성(reason)과 과학, 인본주의의 공로로 돌리는 '신낙관주의자' 스티븐 핑커의 짐짓 점잖은듯한 주장들에서 사람들이 자꾸만 어떤 정치적 뉘앙스를 읽어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없지 않다.
손에 꼽히는 보수 사상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팡글로스주의(Panglossianism)가 보수적 이념과 매우 잘 호응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지상주의자 하이에크는 현대 문명이 오랜 문화적 진화의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법률과 화폐, 언어, 시장 따위 인류 문명의 근간을 형성하는 제도와 규칙들이 모두 이런 '진화'의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는 것(하이에크, 2005). 즉 하이에크에 의하면 이런 복잡한 제도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어느날 문득 나타난 현명한 설계자에 의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며, 오랜 인류사적 과정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체계,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다. 여기서 ‘자연적’이란, 생존과 도태의 거듭을 통해 이뤄진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자연에 잘 적응한 개체는 생존과 번식을 통해 그 유전 정보를 후대에 전승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도태되듯, 유용한 규칙과 전통을 수용한 집단은 번성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집단은 도태되어 쓸모없는 전통들은 사라진다. 따라서, 하이에크의 관점에 의하면 ‘문화적 진화’의 과정은 근본적으로는 인류에게 최적의 규칙을 선물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Denis, 2002). 고로, 이런 오랜 문화적 진화의 선별 과정을 살아남은 전통이 있다면 그 전통은 인류의 문명과 번영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유산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어설프게 사회를 고치려 드는 건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대로 있느니만 못하다. 하이에크의 이런 관점은 정치학자 레더(Linda Raeder)에 의하면, 보수주의의 원조로 불리우는 버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세대에 걸쳐 대물림되는 사회 제도들이, 일개 개인의 지성을 초월하는 지혜와, 여러 세대를 거치며 누적된 지식 및 경험 따위를 내장하고 있다는 하이에크의 통찰은, 그 이전에 버크의 관점이기도 했다(Raeder, 1997).
즉 전통이야말로 생존경쟁의 오랜 역사적 경험에 가장 잘 적응한 최선의 질서로서, 인류가 계속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보존해야만 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전통을 송두리째 뽑아내는 발본적 변화는 문명의 존속을 위협할 뿐이다. 물론, 세상에는 여전히 여러 불의와 불행들이 있지만, 그 불의와 불행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오히려 우리는 전통을 보전해야 한다. 그 전통이 인류 문명을 최선의 상태로 인도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테니까. 이 대목에서, 자연선택은 종(species) 전체를 이롭게 하는 진화적 적응(adaption)을 선별한다는 ‘집단선택’의 진화론이, 지금의 세상이 가능한 세상들 중 최선의 세상이라는 팡글로스 내러티브와 교차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진화에 대한 이런 관점을 '팡글로스 패러다임(Panglossian Paradigm)'이라고 부른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앤디 드니(Andy Denis)에 의하면, 하이에크의 ‘문화적 진화’에 대한 관점은 바로 이 ‘팡글로스 패러다임’에 입각해 있다(Denis, 2002).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이런 관점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빠르고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를 보전하는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변화만을 지향할 테다. 실제로 사회의 변화에 대해 ‘팡글로스 패러다임’을 공유한 버크와 하이에크의 정치적 입장이 그러했다. 스티븐 핑커는, 소설 속 팡글로스는 사실 세상의 악은 필연적이었다고 말하는 비관주의자이며, 자신과 같이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오늘날의 낙관주의자와는 다르다고, 자신을 팡글로스에 비유하는 '지식인'들에게 불만을 표한다(Pinker, 2018, p.39). 하지만, 또다른 팡글로스주의자 하이에크 역시 분명 문화적 진화의 힘으로 인류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을 테다.
거듭, 핑커의 정치적 입장이 정확히 버크와 하이에크의 그것과 똑같다고 말하는 건, 그가 스스로 버크의 ‘우파 보수주의’, 하이에크의 ‘우파 자유지상주의’와 거리를 두려 하는만큼(Pinker, 2018, p.365), 부당한 평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의 일간지 «더 가디언(The Guardian)»의 칼럼니스트 올리버 버크만(Oliver Burkeman)에 따르면, '신낙관주의자'들의 관심은 단순히 인류의 삶이 수백년전보다 나아졌다는 단순한 팩트를 적시하는 데에 있지만은 않다. 이들의 주장에는, 인류가 지난 수십년 간 해온 일이 무엇이건 그게 분명히 잘 기능하고 있으므로, 인류를 여기까지 인도한 정치 경제 질서를 앞으로도 고수해야 한다는 함의가 때때로 깃들어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Burkeman, 2017). 글로벌 자본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수명은 늘어났고 빈곤과 불평등은 줄어들었다며 "신낙관주의자"를 자처하는 역사학자 요한 노버그(Johan Norberg)의 "글로벌 자본주의를 옹호하며(In defense of global capitalism)"는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이들의 '낙관'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대한 합리화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Norberg, 2005). "합리적 낙관주의자(Rational Optimist)"를 자처하며 역시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는 맷 리들리(Matt Ridley)도 누구보다 시장 경제의 순기능을 역설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Ridley, 2010). 올리버 버크만에 의하면, 이런 신낙관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스티븐 핑커의 «Enlightenment Now»는 신낙관주의의 주장을 강력 지지해주는 핵심 레퍼런스다.
그의 신작 «Enlightenment Now»에서 스티븐 핑커는,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인류는 자본주의 이전의 보편적 빈곤으로부터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을 경험했고, 21세기에는 이 흐름으로부터 비교적 소외되었던 저소득 국가들이 선발주자들을 따라잡는 '위대한 수렴(the Great Convergence)'을 통해 인류의 나머지가 구원받고 있다고 주장한다(Pinker, 2018, p.364). 핑커에 의하면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를 읽으면 침을 뱉는 경향이 있지만(Pinker, 2018, p.90)",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득은 너무나 분명하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덕택에 유례없은 풍요를 누린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 않냐고? 핑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자본주의 덕분에 경제적으로만 부유해진 것도 아니다. 경제적으로 더 부유할수록 수명도 길고, 더 건강하며, 심지어 더 행복하다(Pinker, 2018, p.96). 결국 자본주의의 확산 덕분에 우리의 생활수준은 객관적으로도(건강, 수명), 주관적으로도(행복), 눈부시게 나아진 셈이다.
스티븐 핑커는 스스로 이성(reason)과 과학의 편을 자처하며 정치적 이념을 앞세운 비합리적 주장들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만, 그의 '과학'에게서 정치적 뉘앙스가 느껴지는 건 거듭, 그저 기분 탓은 아니다. 그는 인간 삶 본연의 생태와 '진보'의 본성을 과학적 개념들을 통해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 하나가 바로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이다(Pinker, 2018, p.15). 즉, 닫힌 계에서 분자 배열의 무질서한 정도인 '엔트로피'는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는 자연법칙이다. 스티븐 핑커에 따르면, 엔트로피의 법칙은 빈곤이 곧 인간 존재의 '디폴트'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상의 그 어떤 물질도, 인류의 필요를 위해서 알아서 쓰임새가 있는 물건으로 질서있게 정렬될 수는 없기 때문(Pinker, 2018, p.25). 그 정치적 함축은 이렇다: “우리 사회에 '빈곤'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할 근거는 없다. 못난 정치인이든, 탐욕스러운 부자이든, 불합리한 사회 구조이든, 그 어떤 불의한 이유로 인해 가난이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핑커에게 빈곤은 사회 구조를 비난할 이유가 아니다. 거꾸로, 빈곤이 줄어든 것이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바람직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사고나 질병에 가해자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면서, 빈곤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누구를 비난할 것인지에 대한 주장으로 이뤄진다(p.25)"며 핑커는 모순을 꼬집는다.
이렇게, 빈곤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불평등의 확대와 금융 위기 등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비판가들의 말에 맞서 자본주의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의 단골 메뉴다. 올리버 버크만의 가디언 칼럼에 언급된 요한 노버그와 맷 리들리는 물론이고, 자유지상주의적 성향의 영국 싱크탱크 '애덤 스미스 연구소(Adam Smith Institute)'의 아래와 같은 기사 역시 그 좋은 예다. 이 기사는 신자유주의가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가디언 지의 한 칼럼에 대해, 스티븐 핑커가 인용해온 것과 꼭 같은 빈곤율에 관한 통계를 인용하며 아래처럼 반박한다.
자유 무역과 세계화, 워싱턴 컨센서스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적용된 이 신자유주의의 세대는 어떤 영향을 남겼을까? 바로 인류 종의 역사상 가장 큰 절대적 빈곤의 감소다. 이 감소가 매우 컸던 덕분에, 세계적 불평등도 감소해왔다(Worstall, 2016).
"포스트모던 네오-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역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알려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과의 공개 토론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통해, 세상은 유례없이 부유해졌고 빈곤은 전대미문의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1800년부터 2017년 사이에 인플레이션을 보정한 소득은 40배 증가했으며,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미숙련 노동의 소득이 16배 증가했습니다. GDP는 180년에서 1800년 사이에는 단지 약 0.5배의 비율로 증가했을 뿐이었습니다. 즉 180년에서 1800년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이 평평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17년 사이에 갑자기 이런 믿을 수 없는 부(wealth)의 증가가 일어난 것이며, 이는 분명 그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꼭대기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절대적 빈곤을 겪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부유해지고 있고, 온건한 자유 시장 정책을 채택한 국가들에서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빨리 빈곤을 근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빠른 속도로 빈곤을 근절하고 있다는 그의 구체적인 증거는 세계은행이 발표해온 ‘극단적 빈곤’에 관한 통계다. UN의 새천년개발목표 가운데 하나가 2000년에서 2015년 사이에 이 ‘극단적 빈곤’을 50% 줄이는 것이었는데, 그 목표를 2012년에 이미 목표보다 3년 앞서 달성했다는 것. 더 나아가, 2030년까지 이 극단적 빈곤을 완전히 근절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언급하며, 피터슨은 자본주의가 ‘부익부 빈익빈’을 가져온다는 비판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삶도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개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빈곤율에 관한 통계만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날 가장 가난한 대륙인 아프리카의 유아사망률도, 이제는 과거 1952년 유럽의 그것과 같은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면,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기아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모든 증거들은 그 최선의 방법이 자유 시장 경제에 가까운 무언가를 실행하는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불편하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 ‘지식인’들이, 세상은 좋아졌노라 말하는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 빌 게이츠의 팡글로스 내러티브에 반대하는 이유는 이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븐 핑커는 그저 세상은 진보하고 있다는 팩트에 충실할 뿐인 자신을 비난해온 "지식인들"을 두고,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정말로 진보를 싫어한다고 불만을 표한다(Pinker, 2018, p.39). 그의 말처럼, 실제로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인류의 삶이 그만큼 나아졌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를 읽으면 침을 뱉는" 그 ‘지식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이 '지식인'들의 볼멘소리는 기본적인 팩트에 대한 무지의 발로가 아닐까?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은 인간 복지 향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과들의 상당 부분이 노동 조합과 사회 운동, 공적 자금 지원을 받은 연구, 공공 의료 및 교육 시스템에 의해 가능했으며, 오히려 자본가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개혁에 저항해왔다고 지적하며, 이런 사실들만은 쏙 빼놓고 이야기하는 '신낙관주의자'들의 모순을 꼬집는다(Hickel, 2019). 그에 의하면, '신낙관주의자'들은 '팩트'를 정치적으로 선별하는가 하면, 사실관계의 미묘한 뉘앙스에는 이따금 놀랍도록 무관심하다. 식민주의와 노예제, 노동권에 대한 위협 따위의 자본주의의 부정적 유산은 무시하는 반면, 긍정적 변화는 모두 자본주의의 공로로 돌린다는 것. 특히 일부 '신낙관주의자'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최근 40여년 간의 긍정적 변화를 80년대 이후 전개된 '신자유주의'의 공로로 돌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거대담론과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팩트’에 기초한 합리적 사고를 자부하는 이들이 과연 히켈의 지적처럼 입맛에 맞는 사실만 편식하며 이념적 편향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앞으로 이어질 글들에서는 이런 의심을 해소해보기 위해 '신낙관주의'의 '팩트'를 하나하나 톺아보도록 하겠다. '지식인'들은 정말 괜한 볼멘소리만 해온 것인지, 정말로 자본주의의 출현이 인류를 빈곤에서 구원했으며, 그 세계적 확산이 빈곤을 종식시킬 것인지, 애초에 정말로 빈곤은 줄어들었는지. 인류가 선조들에 비해 장수하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자본주의적 풍요의 공로인지, 자본주의 덕택에 부유해지면 그와 더불어 더 건강해지고 더 행복해지는지.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는 큰 팩트보다는, ‘낙관주의자’들의 내러티브를 뒷받침하는 자잘한 사실들에 대한 긴 팩트체크가 될 것이다.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단순한 낙관주의가 생략한 사실관계의 ‘뉘앙스’를 전달하는 데에 이 글의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