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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 Jan 25. 2021

“나쁜 사람”은 없다


고상한 도덕적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드높여 역설하던 인물들의 비위, 비리가 드러날 때마다 곧잘 사람들은 “위선자”라고 욕하고는 한다. 난 그런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도덕적 파탄을 두고 “위선자야” 비난해버리는 건 오히려 문제를 축소하는 일이다.



“위선자야”라는 비난의 배경에는, 인간에 대한 매우 얄팍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좋은 사람은 선하게 행동하고,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동화적 인간관이 그것이다. 이런 이해를 전제로, 부정이 드러난 인물은 평면적인 악인이 되어버린다. 악인이 선행을 할 수는 없으니, 그들의 과거 선행은 사실 선이 아니라 선을 가장한 ‘위선’이라는 논리는 이런 동화적 인간관의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는 신형철 씨의 말처럼, 인간의 복잡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좀처럼 남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악이 그토록 날카롭게 구별되는 건 말 그대로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얘기일 뿐이다.



http://www.goodnews1.com/news/news_view.asp?seq=96577



현실은 좀 더 복잡하다. 경악할 죄악을 저지른 인물의 정체를 알고보니, 평소 관계가 원만하고 ‘착하다’는 평판을 받아오던 사람이라 충격받았다는 얘기들은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런 ‘반전’을 두고, 실은 저 사람은 착한 척 ‘선’을 가장하던 ‘악’이었노라 설명하는 내러티브는, 매우 호소력 짙고 매력 있다. 모두를 속이고 농락하는 ‘순수 악’의 도상으로써, 악인이 보여주었던 선행이 사실은 가짜였다고 말하며 그 선행에 묻은 ‘악’의 부정을 털어내고 ‘순수 선’의 관념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 악’이니 ‘순수 선’이니 하는 건 형이상학적 추상물일 뿐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건 ‘순수 선’이나 ‘순수 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선한 행위들,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악한 행위들이다. 다시 말해,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고 착한 사람이 착한 짓(?)을 하는 게 아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우리는 그들에 대해 딱 그들이 저지른 ‘나쁜 짓’만큼 그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결과론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30/2019083002247.html



그래서, ‘나쁜 짓’을 저지를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상상과 순수선•순수악에 대한 낭만이 빚은 착각이다(이런 맥락에서, “진보는 모두 위선자들“이라며 이죽대는 냉소의 뒤편에도 사실은 ‘선’에 대한 낭만화가 있는 셈이다;결코 ‘위선적 진보 위한 변명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악인인 동시에 어느 정도는 선인이라는 게 진실에 더 가깝다. 우리가 입을 모아 비난하는 악인들도 실은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인간에 대한 보다 일관되고 정치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우리는 ‘착한 사람’도 조건과 상황이 맞물리면 얼마든지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악을 없애는 정도는 ‘악인’을 색출해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조건’과 ‘상황’을 줄여나가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결론은 그래서 아래 장혜영 의원의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거다.




...바로 ‘가해자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동료 시민을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데 실패하는 순간,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이전까지 훌륭한 삶을 살아오거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미투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토록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여성들이 자신과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점을 학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국회의원 장혜영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1314552407/posts/10224657409965383?sfns=mo​​​​



https://mnews.joins.com/article/23977729#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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