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 율리시즈 Nov 27. 2017

예루살렘: 자파 게이트에서 자파 케익을 찾다니...

이스라엘 성지 순례


자파 게이트(Jaffa Gate)는 예루살렘 구시가를 둘러싼 성벽 왼편에 위치해 있었다. 다윗의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을 지키며 상징처럼 우뚝 서있는 다윗의 탑이 거기서 바로 보였다. 이 자파 게이트는  이스라엘 최대 도시 텔아비브 쪽으로 활짝 열려 순례자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침략자들도 수없이 맞아 들인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아득한 옛날에는 서쪽에서 밀려오던, 지중해를 건너 자파(야포)의 항에 정착한 유럽 순례자들이 이 자파 게이트를 거쳐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요즘은 이스라엘 최대 공항인 텔아비브의 벤 구리온 공항에서 온 세계의 순례자들이 이 자파 게이트를 대면할 것이다. 다행히 묵은 호텔은 이 자파 게이트에서 바로 첫 골목에 있었다. 이름도 거창하고 영광스럽게 ‘글로리아’라고 칭하였다. 사실 바로 옆 ‘기사들의 궁전(Knights Palace)’이라는 멋진 이름의 호텔이었는데 이유없이 바뀌었다. 화가 조금(?) 치밀었다. 이 호텔 이름은 중세사에 흔히 등장하는, 그리고 단 브라운의 소설처럼 허무맹랑한 베스트셀러 대중소설속에 등장하는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의 변형일 것이고 호텔에 머물며 마침 기사단의 흔적을 떠올릴 생각이었다. 더구나 이 호텔은 한때 신학교였다고 했다. 그렇기에 기다리며 좋아했는데 ‘연’이 닿지 않았다.



옛부터 자파 게이트는 예루살렘 안과 밖, 유대인과 비-유대인, 성과 속, 그리고 지금은 예루살렘의 구도시와 신도시를 나누고 있었다. 서편에 나있어 서울로 치면 서대문 격일 것이다. 그리고 서대문만큼이나 혹독한 역사도 이 게이트는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구시가 8개 대문 중에 어디하나 오래되고 질펀한 역사를 품지 않은 대문이 있으랴만은 자파 게이트는 특히나 더 그랬다. 원래 이곳 자파 게이트 주변의 성벽은 기원전 2세기 유대왕국 하스모네아 왕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로마제국, 아랍 이슬람 제국 그리고 십자군에 의해 더욱 공고히 성벽이 세워졌고 지금 눈에 보이는 성벽은 그 뒤를 이은 오토만 터키 시대의 것이라 한다. 또 이 자파 게이트의 이름도 다양해 다윗 게이트, 아브라함 게이트 또는 헤브론 게이트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형태는 1538에 세워졌다고 하니 거의 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예루살렘 구시가 정비작업으로 술레이만(Suleiman the Magnificent)에 의해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책에 자주 나오는 이 자는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이름도 거창하게 장엄한(Magnificent)이란 꼬리표를 달았을까? 하여튼 이 터키인 술탄은 머리에 두른 그의 큰 터번처럼 둥실둥실한 성격이 아닌 아주 악랄해 그의 지배하에 있는 예루살렘을 튼튼하게 성벽으로 막고자, 이를  설계하고 쌓은 두명의 건축가를 성벽완성뒤에는 쫒아가 이곳에서 살해했다고 한다. 이 비운의 두 건축가의 무덤이 자파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쓸쓸히 위치하고 있었다.



이런 살육의 역사외에도 자파 게이트를 거치고 지나간 역사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대략이나마 이 게이트의 유명세를 알 수 있다. 1917년에 영국인으로 대영제국이 오토만 터키에 대항해 적게는 팔레스타인 통치에, 많게는 중동을 영국의  손아귀에 넣는 주도적 역할을 한 에드문드 알렌비(Edmund Allenby)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거친 문이라고 한다. 전설적인 아라비아의 로렌스와도 관련이 있는 이 영국인 장군은 몸소 걸어서 이 자파 게이트를 들어왔다고 한다. 원래 부하들과 함께 위엄있게 말을 타고 군복을 입고 대영제국의 완장을 차고 자파 게이트까지 왔지만 이 성스러운 도성의 대문앞에 서자 자신은 오직 이 도성에 온 ‘한 순례자’일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고 전한다.  이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경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거니와 약 20년 전 독일 황제의 예를 따르지 않으려는 정치적 계산도 음흉하게 품고 있었다. 식민주의자들의 정치적 계산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의 머리 회전만큼이나 빨랐다. 그리고, 영국은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세워진 1948년까지 이곳을 위임통치했다.



독일 황제/카이저였던 빌헬름 2세(Wilhelm II)는 영국인 장군 알렌비가 입성하기 전인 1898년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게 이 자파 게이트를 지났다. 그는 말을 타고, 그것도 백마(Whitehorse)를 타고 당당히 입성하려고 고집을 꽤나 부렸다. 왜냐하면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왕은 예루살렘을 통치할 거라는 전설이 옛부터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 그리스도의 수난 시작이 조랑말을 타고 예루살렘 입성 그리고 요한 묵시록의 그 말을 기억할 것.) 이를 못마땅히 여긴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파 게이트 바로 옆에 쪽문을 만들었다. 황제는 백마(또는 마차)를 타고 정문이 아닌 쪽문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사실, 쪽문이라 하지만 여유롭게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다닐 정도로 넓었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들이 다니는 보행로가 되었고 황제가 지났던 그 쪽문은 이제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다녔는지 바닥에 깔아놓은 보도석들은 반질반질 반짝대고 있었다. 이 쪽문은 양쪽 머리를 대롱대롱 늘어뜨리고 챙이 있는 검은 모자를 쓴 유대인 청년들이 담소하며 지나가기도 하고 아랍 상인들이 물건을 지고 지나기도 한다. 또 많은 단체 순례자들이 깃발을 따라 쪼르르 지나기도 하는 곳이다. 가끔은 보행자 쪽문안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거리의 예술가도 있었다. 이 자파 게이트를 지나면 막바로 ‘자파 스트리트’로 연결되며 예루살렘 구시가의 이국적이고 인상적인 좁은 골목으로 연결된 메디나가 있다.



나에겐 이 자파 게이트를 보면서 독일 황제도 아니고 영국인 장군도 아니며 더구나 위대한인지 장엄한인지 ‘마그니피선트’를 떡하니 붙인 터키인 술탄은 더더구나 아닌 미소 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기억났다. 지금은 성인이 되신 그분이 가톨릭 희년의 해인 2000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면서 이곳을 통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혀 관계가 없지만 이스라엘 지중해 항구인 자파(히브루 말론 야포)의 이름을 딴 이 자파 게이트처럼 ‘자파 케익(Jaffa Cake)’이란 영국인들이 무척이나 즐기는 스낵이 기억났다. 커피와도 잘 어울리고 홍차와는 더욱 잘 어울린다. 단지 같은 지명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자파 케익이 기억난 것이다. 자파 케익의 단 맛처럼 서쪽으로 석양이 질때 바라보는 자파 게이트는 최고로 아름답다. 자파 게이트를 이루는 오랜 담벽 벽돌색깔이 자파 케익에 올려놓은 오렌지 잼 색깔처럼 물들면 자파 게이트는 ‘기억의 문’이 된다. 지금은 막아버린 예루살렘의 동대문인 ‘이스트 게이트’에 해가 뜨고 이곳에선 해가 진다. 예루살렘에 밤이 찾아 오는 것이다. 그러면 묻혔던 옛 일들과 옛 사람들이 기억속에 다시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파 케익처럼 달고 새코롬한 그리움도 되살아난다. 갑자기 보고싶은 이들이 떠오르면 독일황제가 지난 그 쪽문안에서 열심히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거리 예술가의 모자에 셰켈 동전을 던지는 것으로 그 그리움을 끝내고 싶었다.


“쨍그랑”


박필립 신부


https://brunch.co.kr/@london/82


자파 게이트라고 써붙인 사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대인들이 재정지원을 했다고 쓰여있다.

자파 게이트 주변길.

예루살렘 구시가가 시작된다.

어스럼 저녁에 본 다윗의 탑.

자파 게이트와 닿아있는 예루살렘 성벽.

애꿎은 죽음을 당한 예루살렘 성벽 건축가들의 무덤. 자파 게이트 바로 안 왼편에 있다.

아랍어로 '알라는 아브라함을 사랑했다.'라고 한다. 아랍어를 읽지못해 정확한 진 알수 없었다.

왼편이 자파 게이트의 쪽문이고 오른쪽이 다윗의 탑이다.

밤이 찾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루살렘에서 주기도문을 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