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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파'에서 맛본 단맛 쓴맛

이스라엘 여행 에세이

by 런던 율리시즈


"자파 케익의 단맛은 변치 않았다. 기억을 떠올리면 단맛과 쓴맛이 동시에 혀를 자극했다. 삶은 단맛도 나고 쓴맛도 난다... 이스라엘의 '자파'에서 이 공존할 수 없는 두 맛을 기적처럼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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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손님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분은 ‘자파 케익(Jaffa Cakes)’을 한통 사들고 오셨다.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제과중의 하나이다. 커피를 마시며 손님과 같이 봉지를 뜯어 자파 케익을 먹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스며들자 몇년 전에 살았던 켄트의 ‘턴브리지 웰스(Tunbridge Wells)’성당 ‘모이라(Moira)’ 아주머니가 기억났다. 남편을 여의고 혼자되신 모이라 아주머니는 매 월요일 아침마다 사제관에 나타나셨다. 정확히 아침 7시에 초인종을 눌렀고 늦잠 잘 자던 난 가끔 뜨지지 않은 눈을 비비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른 두명의 신자분과 함께 일요일날 받은 봉헌금을 세어 하나 하나 계산 기록하고 또 은행에 입금하는 일을 하셨다. 내가 이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건 다름이 아닌 '자파 케익' 때문이었다. 아주머니가 사제관에 오실때마다 항상 홍차와 함께 자파 케익을 드셨다. 본당 신부님은 그래서 쇼핑때마다 이 자파 케익을 아예 몇 통 사서 부엌의 찬장에 쌓아두셨다. 문제는 본당 신부님이 휴가 가시고 난 뒤 그 책임을 내가 맡으면 워낙 쇼핑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대충대충했었고 자주 이 자파 케익 사두는 걸 잊어버리곤 했다. 그럴때마다 사제관은 작은 난리가 났다. 소프라노 목소리로 다혈질의 스코틀랜드 출신 모이라 아주머니에게 난 야단(?)을 맞았다. 자파 케익을 안드시면 1 펜스와 10 펜스 동전이 헷갈린다고 너스레를 떨던 아주머니셨다. 그리고 만약 다음 주에도 자파 케익이 안보이면 이 성당 봉사활동도 끝이라며 어름짱을 놓으셨다.

사실 난 자파 케익이 뭔지 몰랐다. 먹어 본뒤엔 단맛땜에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몇년 뒤 병원으로 임지를 옮겼다. 자파 케익 쇼핑으로부터 자유로왔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직 50대로 창창하고 젊으셨던 모이라 아주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그날 밤 난 아주머니가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자파 케익이 뭔지 인터넷을 뒤져 찾아 보았다. 이 케익 때문에 아주머니께 가끔 야단 맞았던 기억도 선명했고 아직 젊으신데도 돌아가셔서 안타까움을 가득 안고 인터넷을 뒤졌다. 마치 돌아가신 아주머니를 부르며 이리저리 찾듯이.

인터넷에 정보를 뒤지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실 이 자파 케익은 비스켓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사이즈도 5cm 정도로 비스켓과 비슷했다. 그러나 왜 ‘케익’이라고 불리는지 한번도 의심을 못했었다. 사실 관심도 없었다. 케익이라면 생일 케익처럼 보통 사이즈가 20 cm가 넘고 몇층으로 이루어져 높이도 10cm보다 높은 것으로 우린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케익이라는 이름땜에 영국에서 소송까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자파 케익은 ‘멕바이티 엔 프라이스(McVitie and Price)’라는 회사가 1927년에 만든 꽤 역사가 오래된 제과였다. 문제가 된건 이 자파 케익 사이즈가 비스켓 사이즈인데 케익으로 이름붙여져 ‘부가가치세(VAT)’를 회피한다는 고발이었다. 즉 초콜릿으로 덮은 비스켓으로 불리면 세금을 더 내어야 하고 초콜릿으로 덮은 케익으로 불리면 몇 %의 세금이 감면되는 이상한 영국의 법이었다. 그래서 이 회사의 변호사는 1991년 소송에서 왜 이 자파 케익이 케익으로 ‘불려야 함’을 증명했다. 여러 이유를 갖다 댔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베이스가 스폰지 케익과 같은 것이라 비스켓과 엄연히 다르고 제조과정도 케익에 더 가깝지 비스켓에 가깝지 않다는 논리였다. 결국 이 자파 케익은 소송에서 이겨 그 잘 알려진 이름을 유지 할수 있었고 부가가치세도 절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겐 이 재미난 일화보다도 그 이름, ‘자파(Jaffa. 또는 Yapo. 야파/ 야뽀)’에 더 흥미가 있었다. 자파는 이스라엘의 작은 항구 도시의 이름이다. 현대도시 텔아비브 아래쪽에 붙어있는 이 고대 도시는 성서에 자주 언급된다. 사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도시 텔아비브 보다 더 역사적이고 유명하다. 그런데 왜 이 이스라엘의 도시 이름을 이 케익에다 붙였을까?

그 이유는 자파가 속한 팔레스타인 지역이 한때 영국의 신탁통치 아래 있었고 역사적으로 이 도시는 지역 특산물인 오렌지로 유명했다. 이 도시의 항구는 당시 이 오렌지를 서유럽으로 수출하는 지중해의 전진기지 였다. 그래서 이 영국회사는 비스켓 사이즈의 스폰지 케익에다 오렌지 젤리를 펴서 넣고 그 위에 초콜릿으로 덮어 ‘자파 케익’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자파 케익을 한 입 먹으면 이 스폰지 케익과 오렌지 그리고 쵸콜릿 맛이 3중으로 어울려 독특한 맛이 난다. 특히 약간 신맛이 나는 오렌지 젤리는 이 자파 케익만의 고유한 맛이다. 개인적으로 단것을 좋아하지 않아 별로지만 영국 사람들에겐 거의 90년 동안 사랑 받아온 국민 제과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 자파(Jaffa)에 갔었다. 전설에 의하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뒤에 노아의 아들 중 한명인 ‘야펫(자펫. Japheth)이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훨씬 뒤에 예언자 ‘요나’도 하느님의 언명을 어기고 도망쳐서 먼 바다로 떠나려 몰래 배를 탄 곳도 여기라고 한다. 그래서 자파의 구시가지 로터리엔 요나의 고래 동상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유명한 건 신약성서의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 뒤에 이곳에 머물렀으며 한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는 기적을 이곳에서 행했다고 한다. 또 ‘사도행전(Acts 10:10–23)’에 따르면 그는 큰 보자기(광주리) 안에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동시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꿈(vision)을 꾸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새 법으로 이방인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거룩한 직무를 이곳에서 시작한 것이었다(Acts 11:4-17). 그래서 이 자파는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인, 로마인, 그리고 모든 이방인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 그리스도교가 세계적으로 퍼진 원인을 제공했던 도시였다.

나는 성 베드로가 머물렀다고 하는 곳에 세워진 언덕위의 ‘성 베드로 바실리카(St. Peter’s Basilica)’로 갔다. 자파의 구시가지에서는 큰 건물이지만 사실 바실리카로 불리기엔 규모가 작았다.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회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성당 안에 들어가니 여느 유럽의 성당과 비슷했다. 역사적인 곳이라 스테인드글라스에 표현된 그림들은 자파와 관계된 성서의 일화들을 잘 보여주었다. 날씨가 더워 성당안에서도 후끈후끈 했다. 미사를 집전하면서 ‘장백의(albe)’ 위에 걸쳐입은 미사복으로 꼭 찜통속에 들어온 것같았다. 신자들은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미사중에 나는 암으로 일찍 돌아가신 모이라 아주머니를 기억했다. 찜통더위에서도 기분이 묘했지만 기억은 선명히 되살아 났다. 아주머니는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시던 자파 케익의 바로 이 자파에 와서, 야단 맞던 내가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걸 아실까? 내 귀엔 월요일 아침 7시 초인종 소리가 동동 울렸고 눈으로는 접시에 담겨진 동글동글한 자파 케익도 보였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 사도와 같이 초기 유대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구약성서에서 정해준 정결한 음식들만 먹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라 돼지고기는 부정한 음식이라 아예 손에 대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이방인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자 이 비-유대인 신자들에게도 구약 모세의 율법을 적용시켜야 하는지 그들도 고민이 많았었고 그 내용은 사도행전이나 다른 서간서에 그대로 나온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렇게 오순절 뒤에도 오랫동안 서로에게 거리가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또 종교적으로도. 그러나 사도행전에선 초기의 제자들이 새 계약 새 세상의 복음을 맛보았기에 모세오경의 정결례와 할례 등의 율법도 그리스도 복음의 눈으로 '재해석'이 필요했다. 이런 옛것과 새것의 혼란중에서 사도행전에선 성령의 도우심을 항상 이야기 하고 있다. 바른 길로 인도하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활동이시다. 자파 케익은 아주 영국적인 창조물이지만 원래 이 케익은 이스라엘 자파의 오렌지와 라틴 아메리카의 초콜릿 그리고 유럽의 밀가루와 계란으로 만든 스폰지 케익이 합쳐진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고 하신 복음서의 그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자파는 이렇게 새 술(이방인)을 담을 새 부대(새 계약)를 준비했던 곳이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햇빛이 자파의 언덕을 내리 비추고 있었다. 가까운 등대가로 올라갔다. 마치 그리스도의 빛이 세상을 비추는 것처럼 높은 곳에 우뚝 서있었다. 의도적으로 반대방향으로 향했던 예언자 요나도 이 길로 다시 돌아왔다. 길잃고 헤메는 많은 영혼들도 이 등대를 보고 돌아왔으면 싶었다. 성당은 언덕위에 위치해 그리로부터 현대 첨단도시 텔아비브의 바닷가와 그 뒤편의 빌딩들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었다. 고대 도시와 현대도시가 서로 지척에 있었다. 노아와 요나 예언자 그리고 2000년 전의 사도 베드로까지의 많고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이곳 자파였다.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무슬림 제국, 십자군 시대, 오토만 터키 제국, 대영제국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까지 숨차게 달려온 제국들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이 작은 도시는 고스란히 아우르며 어머니처럼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1799년 이집트를 점령할 때 거친 곳도 또한 이곳이었다. 이곳에서 그의 군대는 많은 아랍 사람들을 죽였다. 고고학자들이 케도 케도 또 나오는 역사의 일화들을 잔뜩 품은 자파는 이렇게 미래를 상징하는 세계에서 가장 최첨단 도시라는 텔아비브를 지척에서 굽어보고 있었다. 꼭 과거를 보면 미래를 볼수 있는 것처럼...

나는 자파의 옛 항구로 내려갔다. 예언자 요나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바빌론으로 가지 않고 반대편으로 내리달려 멀리 멀리 세상 끝까지 피신하려다가 고래에 먹혀 사흘 밤낮을 지새기 전 배를 몰래 얻어타고 떠났던 포구가 여기 어디 쯤에 있을 터였다. 지금은 몇몇 자파의 아랍 노인네들이 한가로이 낚시대를 던져놓고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베드로 성인의 물음에 물고기를 낚는 게 아니라 이제 사람을 낚는, 즉 구원의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 새 사명을 주신 성서의 말씀을 떠올렸다. 그 사이 대영제국 시절 탐스런 오렌지를 담은 궤짝들로 가득찬 항구의 배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옛 오렌지와 지금의 오렌지는 같은 맛일까? 옛 계명과 새 계명이 다르듯 한가지에 나고서도 맛은 다를 것이다. 쓸데없는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햇빛이 많아 자파의 오렌지는 단맛으로 소문이 났었다. 창조자의 고른 햇빛을 받은 우리는 단맛을 전파할 사명이 있다. 재빠르게 같이 간 신자분이 가게에서 오렌지를 사서 나에게 하나 주셨다. 알아듣지 못하는 아랍 말과 히브리 말이 섞인 옛 항구에서 두꺼운 오렌지 표피를 벗겨 내었다. 난 게을러서 두꺼운 오렌지 껍질 벗기는게 항상 귀찮았다. 그래서 스페인산 오렌지가 즐비한 런던의 수퍼마켓에서도 껍질이 쉽게 벗겨지는 우리나라 밀감같은 사추마를 더 많이 사서 먹었다. 오렌지 하나만 벗겼는데도 손가락이 온통 오렌지 색깔로 물들었다. 벗긴 껍질을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소금 냄새나던 바닷가가 오렌지 냄새로 진동했다. 시간은 다시 100여년전 오렌지를 배로 옮겨 싣던 인부들의 왁자한 소리가 들리는 그때 그 당시 자파로 되돌아갔다. 지중해 바다위로 뜨겁던 태양도 기력을 잃고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내일 아침 7시에 모이라 아주머니의 초인종은 또다시 울릴 것이다. 내 기억안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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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파 케익'은 영국인들에게 홍차와 함께 즐기는 인기있는 간식거리다.

멀리 현대도시 텔아비브가 보인다.

바다쪽에서 본 세인트 피터스 바실리카.

옛 항구.

세인트 피터스 바실리카 앞.

성당의 정면이 햇빛에 따라 색감이 달라보인다.

이 성당안에 있는 그림. 베드로 성인이 비젼(vision)으로 천사를 만나고 하늘에서 보따리가 내려오고 있다. '사도행전'의 구절에 나온다.

요나 예언자를 삼킨 바다 괴물(고래. 또는 Sea Monster) 동상. 괴물이라기엔 덩치도 작고 오히려 귀엽다. 살짝 웃고있는 모습이다. 사진 찍히기에 그런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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