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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Dec 16. 2017

최후의 만찬 최초의 교회...

이스라엘 성지순례- 예루살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벽화그림은 밀라노에 있다. 그러나 오늘 밀라노가 아닌 그림의 직접적 배경이 되는 곳으로 간다. 이 ‘최후의 만찬’ 그림이 너무 유명해 오늘 떠 올랐을까? 어디에서 그 만찬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답할 사람은 몇명  없을 것이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와 동질감을 느꼈다. 메리는 남편인 낭만파 시인 퍼시 셸리에 뒤지지 않은 명석함으로 시대를 앞서갔고 페니니즘의 원조격인 똑똑하고 당찬 여성이었다. 그런 메리는 1844년 밀라노로 여행을 갔다. 거기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자 냅다 크게 소리질렀다.



“How vain are copies!”


“복제품은 쓰레기야!”



예술작품 감상과 성지순례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한가지 다르다면 성지순례는 예술작품과 달리 대부분 그 원상을 그대로 볼수없고 역사에 뒤덮여 가끔은 그 형체가 사라진 거룩한 장소를 견학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가졌던 최후의 만찬은 예루살렘의 시온산 구역에 있는 ‘세나클(The Cenacle)’로 또는 ‘윗방(the Upper Room)’이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선 다락방이라 하기도 하는데 의미가 좀 다른 것같다. 그리고 만찬이라고 하지만 몇가지 코스 요리가 나오는 정찬보다 빵과 포도주가 있는 심플한 저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찬의 즐거운 분위기가 아닌 심오하고 엄숙한 저녁이었을 것이다. ‘세나클(Cenacle)’이란 말은 라틴어로 ‘밥을 먹다(I dine)’라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메리 셸리가 ‘최후의 만찬’ 원작에 대해 가졌던 감탄사를 기억하고자 했지만 이 집 또는 홀(Hall)은 사실 십자군 시기인 12세경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바로 그 집이 아니다. 더구나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바로 그 집터인지 의문이 있다고 하였다. 대강 이쯤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12세기 고딕풍의 건물은 유럽의 고딕건물과 똑같았다. 하긴 유럽에서 온 십자군들이 지었으니 오죽하랴. 세나클은 이층에 있었고 아래층엔 다윗왕의 무덤이 있는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 최후의 만찬 바로 그 집이 아니라해도 이 어디쯤이란 사실만으로 가슴은 콩콩 뛰었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시대의 복제품' 이론이 그래서 맞아들어가기도 한다. 메리 셸리의 감탄이 나의 가슴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시온산 지구, 성모승천 성당이 지척에 있는 이 작은 구역은 그리스도교에서 보면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난 곳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


-세족례.


-부활 후에 예수께서 여기서 나타나심.


-예수승천 후 제자들이 모인 장소.


-배반한 제자인 유다 대신으로 마티아스를 뽑음.


-성령강림의 장소.



보기에서와 같이 그리스도교에서의 굵직 굵직한 사건들이 여기서 많이 일어났다. 또 우리에게 중요한 건 첫 그리스도 교회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세나클은 최후란 말과 최초란 말이 같이 혼용될 수 있는 곳이다. 건축학에서 말하는 ‘오픈 엔디드(open-ended)’란 용어처럼 여기서 끝이 난게 아닌 다시 세상으로 열린 곳이 이곳이다.



하지만 그런 가톨릭의 종교적 영성적 중요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지난 2천년간 이 세나클의 작은 구역은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다. 그때마다 파괴되고 새 집이 올려지기도 했고 또 헌집이라도 새단장이 되었다. 우선 초기 유대-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여기 있었고 후에 다시 유대교 회당이 되었다. 중세엔 십자군에 의해 시온의 성모대성당(the Cathedral of St Mary of Zion)’이 이 구역에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악명높은 알 하킴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고 후에 가톨릭 프란치스코회가 넘겨 받았으나 1524년 또다시 오토만 터키의 지배하에서 이곳은 이슬람 모스크로 변신했다. 아직도 이 세나클 안에는 아랍어로 씌어진 글이 벽에 남아 있고 움푹 파여진 미흐랍(the Mihrab) 양쪽으로 난 창의 스테인드 글라스도 이슬람식이다. 그리고 메카로 향한 표시인 카바(the qubba)를 계단통에서 볼수 있으며 건물밖에는 심지어 미나렛과 돔도 있다. 가톨릭 신자들을 비롯한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시기인 1948년까지 이곳에 들어오질 못했으며 이스라엘 건국 후 허락이 되었고 건물은 이스라엘의 내무부가 관리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예루살렘 방문 중 바로 여기서 미사가 올려졌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에 비교도 안되는 한 20평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그러나 첫 성체성사 즉 미사가 행해진 거룩한 장소인 바로 이곳에서 교황은 미사를 집전한 것이었다. 이 미사후에는  이곳의 소유권을 이스라엘로부터 넘겨 받았다고 한다. 이 소유권 이전 증서는 교환의 의미였는데 스페인 톨레도의 한 성당을 유대인들에게 돌려주는 맞교환이었다. 스페인의 옛 수도인 톨레도의 이 성당은 원래 유대인 회당이었다고 한다. 복잡하게 얽힌 역사다...


몇년전에 이곳에 갔을 땐 미국에서 온 복음주의자 신도들이 좁은 공간에서 열심히 성령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이 성령강림의 장소라 그들은 기쁨에 겨워 통성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후 너무 좁은 공간이 순례객들로 붐비고 또 시끄러워 지금은 이곳에서 아예 노래부르거나 통성기도하는 것은 금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통성기도나 시끄러운 찬송이 없음에도 여전히 순례자들이 재잘대는 소음으로 세나클 안은 시끄러웠다.

내 마음속이 잔잔하지 않아서 일까?

https://brunch.co.kr/@london/161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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