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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an 09. 2018

40계단을 얼마나 오르내렸을까?

올림픽 금메달: 그 理想의 숭고한 가치...  캐나다 여행 에세이

사진:연합뉴스

넓고 넓은 땅 캐나다에 10여년전 갔었다. 생전 처음이었다. 좁은 대한민국과 다르고 복잡하고 다양한 유럽과 달리 엄청나고 거대한 곳이란 이미지가 우선 나를 압도했다. 거대한 자연보다 문명의 역사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 당시의 난, 캐나다에 뭐 볼께 있을까 하며 크게 기대도 않았다. 그러나 사실 보고 들을 건 넓은 땅만큼이나 크고 많았다. 넓은 하늘에 석양이 짙게 깔리던 로렌스 베이에서 배를 타고 캐나다 선원들이 직접 구워주던 크고 두툼한 스테이크에 HP소스 비슷한 걸 발라 먹었던 기억도 새롭다. 거기서 누리던 육식의 즐거움과 포만감은 결코 야만스럽지 않았다. 거기에다 수도인 오타와의 거대한(?) 주택들과 거기 딸린 넓은 정원이 런던의 좁은 집에 좁게 살았던 내겐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캐나다를 직접 보며 옛 이미지를 좋고 밝은 새인상으로 덧칠했다. 사이즈만큼 행복도 큰 것같았기 때문이다.


미국 도시와 별반 다름없는 토론토를 벗어나 몬트리올로 올라 갔다. 거기는 영국계인 토론토와 뭔가 달랐다. 우선 알아듣지 못하는 송앙송앙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시내 건물도 다분히 유럽적이었다. 시내의 성당들도 아름다왔다. 물론 아름다운 퀘벡에 비하면 덩치가 커서 그렇게 매력적이진 않았다. 난 몬트리올에 들어서자 두 사람이 생각났다. 두 분 다 나의 영웅이었다. 한 분은 지금은 성인 품에 오른 ‘주님의 문지기(God’s Doorkeeper)’란 별명의 ‘몬트리올의 앙드레 성인(St. André of Montreal)’이시고 (내가 갔을 땐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않으셨다), 다른 한 분은 아직 살아계신 몬트리올 레슬링 금메달리스트고 '진짜' 부산 싸나이 ‘양정모’ 선수였다.


몬트리올 올림픽 공원으로 갔다. 거기에서 양정모 선수를 기억하며, 아니 나의 어릴적 영웅을 기억하자 거대한 함성이 귀청을 때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올림픽 공원 한쪽은 이제 온갖 식물들을 키우는 실내식물원이 되어 있었다. 적자 올림픽의 대명사였던 몬트리올 올림픽이었다. 그리고 식물원을 나와 넓은 공원을 걸었다. 거기에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이름들을 양각해놓은 기념판들이 낮게 서있었다. 하나 하나 메달리스트들의 이름들을 짚으며 읽어 내려갔다. 드디어 나의 영웅  ‘양-정-모’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사실 구별하며 찾기란 쉬웠다. 왜냐하면 유독 양정모란 이름은 ‘반짝반짝’ 구릿빛을 밝은 몬트리올 하늘아래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메달리스트들의 이름들은 누구 하나도 터치하지 않아 검푸른 동판 색깔 그대로 남았는데 양정모 선수의 이름은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그의 이름위에 ‘터치’를 했는지 거의 닳았을 만큼 빛을 내고 있었다. 로마 바티칸 성당안의 베드로 상의 닳고 닳은 성인의 발등과 같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양정모 선수에 대한 애정과 우리만의 정이 거기에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그의 이름위를 쓰다듬었다. 무슨 성스러운 토템의 물건을 만지듯... 그리고 양정모 선수가 내게 주었던 영감과 희망에 감사했다. 이는 꼭 ‘성지순례’를 하는 것같았고 꿈이 이루어지도록 터치하며 하는 기도같았다.


그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온 나라가 양정모선수의 금메달 하나로 들썩거렸다고 한다. 해방 후 첫 금메달이었다. 첫 금메달의 감격은 그렇게도 커고 신났다. 난 사실 멋짓 한판의 그 장면을 실황중계로 못보았다.  한참 후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영웅이야기로 그를 기억한다. 그러나 내겐 올림픽이라는 이름과 양정모 라는 이름은 항상 동일시 된다. 아니 양정모라는 이름으로 인해 올림픽이란 단어를 처음 알았다. 그렇다. 손기정 옹도 있지만 훨씬 오래전 이야기라 양정모 선수만큼 열광하고 영웅으로 삼은 선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무뚝뚝한 부산 싸나이였고 자랑스런 한국인이었다. 당시 가난했던 시절 자라나는 어린이들(나까지 포함해)의 진정한 우상이었다. 부산 용두산 아래 40계단을 열심히 뛰어 오르내리며 연습했다던 그의 말이 그의 이름위를 터치하는 나의 손으로 전해져 올라왔다. 40계단... 그리고 40년도 넘은 시간이 흘렀다. 그는 40계단을 몇번이나 오르내렸을까? 천번? 만번? 그리고 얼마나 많은 땀을 내 쏟았을까?


평창 올림픽이 곧 다가온다. 이곳 영국에서도 조금씩 보도하기 시작한다. 지난해는 러시아 팀의 약물도핑 뉴스로 시끄러웠다. 이렇게 올림픽 메달은 큰 힘을 발휘한다. 도핑까지해서라도 메달을 따려는 개인의 탐욕과 똑같은 국가의 욕심도 함께 보는 것같다. 세계인의 우정도모와 자라나는 세대에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선의의 경쟁인 올림픽 정신에서 한참 벗어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요즘 이 올림픽 매달은 그동안 땀흘린 수고의 댓가가 명예와 함께 엄청난 ‘돈’도 따라오기 때문이다. 고삐풀린 상업주의 올림픽처럼 될까 걱정된다. 모든걸 돈의 가치로 환산하는 요즘 올림픽 메달은 명예 이상이고 성공의 상징이며 물질적 부를 가져다 주는 요술방망이다.


, 새 스포츠 스타의 탄생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당시 1976년 양정모 선수의 금메달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금전적 동기도 있었겠지만 명예와 국위선양이라는 지고한 가치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그렇기에 40년이 지난 이때까지 그의 이름 석자는 영웅칭호와 함께 건재하게 내 마음에 남아 있는게 아니겠는가. 재정적 실패의 몬트리올 올림픽이, 양정모 선수의 금메달로 당시 자라나는 모든 한국 어린이들에게 그리고 나라 전체에 가져다준,  돈으로 결코 환산되지 않 가치를 생각하면 꼭 경제적으로 올림픽을 봐선 안된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캐나다인들은 세금으로 이 적자를 충당했겠지만 말이다.

사진: 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사진: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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