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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l 04. 2018

고흐의 시선 머무던 거긴 그 어드메뇨...

예술사 에세이 - 고흐와 로트렉의 만남

'고흐'가 술집에 앉아 있다.

'빈센트 반 고흐'.

거친 북해의 바람처럼 탁탁거리는 네들란드 억양처럼 독한 술, 트 잔을 마주하고...


우리는 고흐와 친하고 잘 안다고 느낀다. '아, 고흐'라 되뇌면서 '아'를 '호'처럼 무의식으로 갖다 붙인다. 이 짧은 느낌표는 게 살다간 그의 생애처럼 여운을 길게 남긴다. 우린 그런 고흐를 고흐 자신이 자신을 그린 초상화로 친해져 있다. 때로는 주위로부터 너무 많이 그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백년 전 고흐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고흐 당시사람들은 어땠을까? 고흐 자신의 자화상(Self-portrait)이 아닌 다른 화가가 그린 그의 초상화를 살펴보자. 처음봐도 우리는 위쪽 파스텔 초상화의 주인공이 고흐임을 알수 있다. 메부리 코와 연한 눈썹. 이게 다 고흐 집안의 생물학적 내력이다. 그의 이런 생물학적 모습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초상화에서 고흐의 내면이 드러나고 그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흐는 이곳 파리의 몽마르뜨에 오기 딱 10년전 벨기에의 탄광촌에서 사목을 했다. 100년도 전이니 과연 당시의 탄광촌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으로 알수 있다. 목사가 되려는 마음을 지니고 탄광촌에서 사목을 시작한 그였다. 그곳 빵집에 마련된 편안한 숙소는 어느 홈리스에게 내어주고 조그만 오두막으로 들어간 착한 크리스챤 청년 고흐였다. 루터와 깔벵의 개혁정신은 어데가고 400년 후엔 세속화되고, 도식화되고, 성직주의가 물씬 풍겼던 유럽 프로테스탄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런 이상한(?) 고흐의 사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교회지도자로서의 위신과 존엄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단정도 했다. 고흐는 그렇게 10년전 탄광촌에서 쫒겨나다시피 떠났다. 날마다 갱도에서 탄을 캐는 광부들을 뒤에 남겨두고 루벤스의 도시 앤트워프로 갔다. 거기서 다시 예술의 중심 이곳 파리의 몽마르뜨로 흘러 왔던 것이다. 깊고 침침한 갱도의 노동자들을 고흐는 파리 시내가 아래로 다 보이는 몽마르뜨의 언덕에서 기억했으리라. 독한 압생트를 마시며...


그래서 고흐는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 다닌 지난 10년을 떠올리며 멀리 응시하고 있는 걸까? 이곳 화가들의 언덕에서? 빛이 비치는 언덕이든 빛이 없는 갱도이든 고흐에게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그런 행복은 없었다. 다만 지하갱도 깊숙이 박힌 탄을 캐듯 고흐는 예술이란 지하갱도에서 땀흘리며 진리를 캐려는 것이었다. 비록 압생트에 지금은 의지하지만... 그래서 고흐의 초상화는 결코 우리가 보고 바라는 행복과 만족은 거기에 없다. 뒷날 고흐의 색깔이 되어버린 노랑색이 병적으로 그의 미래를 예언하듯 군데 군데 묻어있고 이 밝은 노랑은 우리가 벌써 알아버린 그의 생애로 인해 무척이나 엄숙하고 진지하게 보인다. 거기에다 또 빨강색이 어우러지니... 벌써 그의 우울증이 몽마르뜨 언덕에서 보이는 듯하다.


이 고흐의 초상화는 고흐보다 10년이나 젊은 툴루즈-로트렉(Toulouse-Lautrec)이 그렸다. 그는 겨우 방년 23세. 몽마르뜨 기념품마다 넘치는 캉캉춤 물랭루즈 엽서로 만날 수 있는 로트렉이다. 당시 고흐는 거의 34세가 된 당시로는 중년이었다. 늦은 나이에 보이지 않는 빛을 따라 파리에 왔던 그였다. 그런 그를 프랑스 남쪽 툴루즈 출신에다 장애인이었던 로트렉은 여러모로 고흐와 달랐지만 오체불만족인 이 북쪽 네들란드인과 잘 어울리는 면도 있었다. 그들은 그래도 뭔가 있나하고 감히 예술을 배우려 화가 페르낭 꼬르몽(Fernand Cormon)의 화실에 등록했고 그렇게 그들은 만났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갱도의 두려움만큼이나 예술에의 집념도 활활 불탔던 시기였을 것이다.


예술가 뽈 시냑(Paul Signac)에 의하면 고흐는 맨날 술집(bar)에 들락거렸다고 한다. 술집에서 그는 압생트(absinthes)와 브랜디(brandies)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동생에게 얹혀사는 고흐에게 이 술값은 어떻게 감당했을까? 벌써 감성적이 된다. 1886년에 파리 도착 후 동생 '테오'와 몇번 대판 싸워 테오가 도저히 형과 같이 살수 없다고 선언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같은 피붙이 형이라 어쩔수 없이 꺼역꺼역 같이 살았던 형제의 파리생활이었다. 그러나 고흐 자신도 이게 아니구나 싶어 따뜻한 남쪽 아를(Arles)로 떠나기로 결심한 때는 그는 거의 알콜 중독자 상태였다.  몽마르뜨의 술집 탁자에 앉아 우수에 찬 지독히도 고독한 이 네들란드인이 독하디 독한 압상트에 의지하는 모습을, 몽마르뜨의 환락에 또 세속의 환락에 빠지기 전의 순수하고 거룩한 수도자같은 예술적 촉수를 지녔던 로트렉은 이 찰나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가지고 있던 파스텔로 쓱쓱쓱 단번에 고흐를 그렸다. 이런 로트렉을 고흐는 한번이나 쳐다 보았을까? 아님, 자신만의 예술에 깊이 침잠해 무시하였을까? 보통 고흐의 초상화들에서 볼수있는 얼굴전체나 정면이 아닌 측면의 고흐를 이 초상화에서 우린 고맙게도 볼수 있다. (어떻게 보면 독일 테니스 스타였던 보리스 베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여튼, 이 측면 고흐로 우리는 그의 알려진 정면과 함께 숨겨진 그의 모습을, 또 앞으로 잘려질 왼쪽 귀보다 탱탱히 달려있는 이 오른쪽 귀를 중심으로 측면을 응시할 때 문득 스치는 고흐의 심리상태를 포착할 수 있다. 예술은 그렇게 어느 한순간에 전 우주적 시간을 지시하고, 어느 한 단면으로 전체를 다 보여준다. 그래서 여기 고흐의 한 측면으로 의 전생애를 포착할 수도 있다.


이런 고흐를 "보는 눈"이 있었던 로트렉은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우수 가득한 고흐의 피부껍질속에 잠재되어 꿈틀대며 활활 타오르는 주체못할 예술혼을 보았을 것이다. 즉, 로트렉은 고흐를 알아보았음이 분명하다. 예술가만 가지는 예민한 촉수로... 그렇기에 그는 몇년 후에 비판의 대상이 된 고흐의 그림들을 열심히 변호했다. 그것도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말이다. 그것은 이 초상화가 그려진 뒤 3년쯤 뒤 1890년 브뤼셀의  ‘레 방(Les Vingt)’ 전시회에서 전시된 고흐의 6점 그림에 비평이 좋지 않자 로트렉은 격분했다. 심지어 다른 화가와 거의 주먹다짐까지 할 뻔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증명한다. 이런 "볼줄 아는 눈"은 고흐에게도 물론 있었다. 고흐도 동생 테오에게 로트렉의 그림을 살것을 종용했다 한다. "보는 눈"이 있는 예술가들은 서로를 이렇게 알아 보았는가 보다.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던 파리의 우중충한 몽마르뜨를 고흐는 떠나기로 했다. 가끔 시내로 나와 그림을 그렸던 센 강을 넘어서, 즉 북쪽 몽마르뜨를 떠나 남쪽 몽빠르나스에서 기차를 타고 따뜻하고 햇빛많은 생트-레미(Saint-Rémy)로 미련없이 그리고 다음해엔 아를로 고흐는 훌쩍 떠났다.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en)를 떠나 파리 생활을 시작한 그리고 동생집에 눈치보며 얹혀 살아야만 했던 외롭고 우울한 네들란드인 고흐는, 툴루즈 부가문 출신이며 사교성이 풍부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렸던 로트렉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그래서 로트렉은 나이만 들었지 파리에선 신출내기였던 고흐를 당시의 몽마르뜨 예술가들에게도 많이 소개시켜 주었다고 한다. 성격도 서로 달랐고, 그림의 스타일과 테크닉도 달랐으며 그래서 예술세계도 달랐던 둘이었지만 이 시기 그들의 파리생활중엔 엇비슷한 풍의 그림들도 그들은 그렸다.


고흐가 37세의 나이로 자신의 생명수를 비우자 로트렉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로트렉고흐처럼 겨우 36세에 세상을 떴다. 몽마르뜨의 온갖 환락에 묻힌 댓가였다. 37세든 36세든 그들은 꽃을 피우고 갔다. 그들이 만났고 예술로 교류하던 몽마르뜨엔 몇년 뒤에 축성 된(1919년) 하얀 돔을 인 예수 성심 성당(Sacre Coeur. Sacred Heart)이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예술과 종교는 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남들에게 열심히 설명해도 결국 이해시키지 못하는 '불통'의 세상에서 예술로 종교로 우린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


위 그림: "Portrait of Vincent van Gogh" by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 - 1901), Paris, 1887. coloured chalk on cardboard, 57 cm x 46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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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짓고 있던 예수성심성당(Sacre Coeur).
성심성당의 측면. 고흐의 초상화를 기억하며 오른쪽 측면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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