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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l 09. 2018

샤갈의 7개 손가락

예술사 에세이-샤갈의 '칠손을 가진 자화상'

다채로운 원색들이 돋보이는 '샤갈'의 자화상을 자세히 보면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화가로써 그림을 그리는 그는 이젤을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림그리는 그의 왼손 손가락이 이상하게도 7개다.  무려 7개나... 그는 칠손이었을까?


샤갈은 1887년 7월 7일에 태어났다(어떤 곳엔 7월 6일이라고 나옴). 물론 양력으로 말이다. 7월 7일로 음력이면 우리가 다 아는 견우직녀가 미팅을 갖는 칠월 칠석이 된다. 새들이 모여 다리를 만들어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의 날이다. 그런데, 런던에선 동시다발로 끔찍한 테러가 일어났던 날이 또 그날인 7월 7일이었다. 사실, '7'은 그런 죽임의 테러보다 'Seven'이란 럭키 넘버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샤갈은 그렇게 럭키를 안고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에도 7이 또 들어있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럭키하게 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공산혁명전의 러시아였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유럽에서 혼자 독고청청 독재국가라 불리는 벨라루스의 비텝스크(Vitebsk)란 타운이 그의 고향이다. 가끔 벨라루스는 '유럽의 북한'이란 별명으로도 불린다. 지금 샤갈이 살아 있다면 참 안타까와 했을 것이다. 러시아인이었던 샤갈은 또 유대인이었다. 샤갈의 고향인 비텝스크 부근 그 조그만 타운의 대부분은 유대인이 살았었다. 그래서 먼저, 그는 러시아인일까? 아님, 유대인일까? '무엇이 우선일까?' 요즘도 그때도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정체성을 무척이나 알고 싶어한다. 우선 '러시안 유대인'이라 해두자. 러시안 유대인인 그가 파리로 온지 얼마되지 않은 겨우 25세의 나이에 이 자화상을 그렸다. 25세의 샤갈은 어떻게 샤갈 자신을 봤을까?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이 자화상이 그래서 무척 궁금하다. 세계예술의 핵, 파리에서 막 피어나려는 '큐비즘'의 유행 따라 자화상 속 샤갈이나 주위 환경은 사실적이지 않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게 아니었다. 현실의 모양들을 파편으로 조각조각 내었다. 실험적이지만 아직도 자화상 속 아몬드 형의 큰 눈과 물려받은 긴 코가 보이고 샤갈의 트레이드 마크인 '길고 검고 굵은' 곱슬머리도 쉽게 알아차릴수 있게 그렸다. 그래서 그의 정체성이 생물학적으로 유대인임을 보여준다.


러시안 유대인인 그가 파리에 꿈을 쫒아 왔다. 파리의 몽빠르나스 역 가까운 곳,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살던 침침한 건물에서 실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 빛의 도시에서 산다는 게 더구나 화가로써 그림을 여기서 그린다는게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파리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자화상 왼쪽 위 창문으로 보이는 곳에 에펠탑이 우뚝 서 있다. '25세 화가 샤갈은 파리에 있다' 라고 자랑한다. 가끔 이 철골 구조물을 보면서 화가로써 파리에서 활동하는 자부심과 함께 문득문득 그리운 고향, 비텝스크를 떠올렸을 것이다. 비록 몸은 외지에 있어도 고향을 어찌 잊으랴. 부모님이 사신 고향 마을을 청년 예술가의 몸에서 그리고 마음에서 떼어 낸다는 건 적어도 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파리를 그렇게 사랑해도 못잊을 고향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자화상 오른쪽 위에 고향을 그려 놓았다. 그리운 비텝스크를... '꿈에 본 내 고향' 이란 트로트의 제목처럼 꿈속인냥 고향을 뜬 구름속에 그려 넣어 두었다. 에펠탑은 창밖에 고향은 벽에... 결코 잊지 않았다는 증거로.


화가 샤갈이 몸담고 있는 파리와 고향 러시아의 타운 비텝스크 사이로 정녕 그의 뿌리가 되는 '유대인이란 정체성'을 보이기 위해 이 초상화에선 '히브루'문자로 '파리'와 '러시아'를 적어 놓았다. 지금은 희미하게 기억되는 먼 먼 옛 조상들이 썼던 히브루 말, 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그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았던 조상들이 소통하고 기도하던 히브루 말이었다. 그러다 흘러흘러 동유럽까지 들어온 '이디쉬' 속에 듬성듬성 섞인 히브루 단어처럼, 화가의 화실벽에 곧 지워질 것처럼 희미한 히브루 문자를 써 넣었다. 그림이 아니라 문자이다. 이미지가 아닌 텍스트이다. 물리적으로 바로 보이는 창밖의 에펠탑으로 자신이 지금  몸담고 있는 모든 화가의 이상향인 파리와, 그 화가가 꿈속에서 그리는 이상향인 비텝스크, 그리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방랑하는 유대인 샤갈이었다. 샤갈은 그렇게 겹겹으로 쌓인 다중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훗날 독일과 미국 러시아와 프랑스를 분주히 왔가갔다 하는 그의 미래를 여기서도 예감할 수 있다. 영국에도 건너와 켄트의 작은 시골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으며 이스라엘에서도 그는 여러 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그는 어김없는 방랑자였다. 방년 25세에 그는 그의 미래를 이렇게 직감했음에 틀림없고 그런 자화상을 남겼다. 비록 가난한 화가였지만 미래는 창밖에 보이는 에펠탑처럼 하늘 높이 수평선 멀리까지 볼수 있었다.


방랑자 유대인으로 그는 미신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그의 캔버스에 색칠했다. 동유럽 유대인인 '이디쉬'('이디쉬'는 유럽어와 히브루가 섞인 유대인 언어이다. 한때 동쪽 런던의 유대인 공동체도 동유럽에서 건너 온 이디쉬 공동체였다.)의 전통민담에는 '칠손(7개 손가락)'은 재주좋고 민첩하게 일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샤갈은 이를 분명 알고 있었고 자화상의 손가락을 7개로 그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자화상의 제목도 '칠손을 가진 자화상(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이다. 이 칠손을 이젤 앞에 앉은 그가 자신의 작품, '러시아에게, 당나귀에게 그리고 다른이들에게' 바로 앞에 위치시킨다. 이 칠손으로 화가의 무한한 재능을 발휘하라는 내면의 소망일까?


샤갈의 그림을 몽환적이라고 하는, 꼭 순수한 어린이와 사춘기 청소년처럼 순수한 원색을 칠하는 샤갈이 여기 자신의 자화상에서도 보인다. 색색의 물감들이 '일곱 손가락' 화가에게 칠해지기 전 '팔레트'에 놓여있다. 팔레트 위의 물감은 화가의 머리속 창조의 샘이 공백의 캔버스 표면에 표현되기 전엔 혼돈의 물질이자 가능성의 물질이다. 그러나 이 색색의 혼돈이 샤갈의 칠손에 의해 사랑하는 벨라가 되고 그리운 부모님이 될 수도 있으며 고향의 집들과 파리의 성당들이 될 수도 있다. 공중을 부유하고 훨훨 나르기도 한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이렇듯 어김없다. 그의 칠손에 의해 러시아와 파리, 현실과 꿈속 그리고 예술가의 내면과 외면이 모조리 쏟아져 나온다.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버리는 이 칠손의 '마법'은 굳이 이디쉬 유대인의 전통민담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숨겨진 '예술적 인간'이란 정의에서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러시아인인지, 프랑스인인지, 아님 유대인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샤갈은 이렇게 예술로 자신의 정체성을 승화시켰다. 예술앞에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느 종교를 신봉하는지 따지기 전에 우리 모두 '인간'임을 상기시킨다.

...

위 그림:

"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 by Marc Shargall. oil on canvas. 127 cm × 107 cm (50 in × 42 in). Part of the Chagall collection at the Stedelijk Museum in Amsterdam, The Netherlands.

마크 샤갈. 칠손이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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