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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08. 2017

문명의 이름 아래 잔인한 달 4월을 보내고...

문학과 소설: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핵심'


벨기에 안트워프의 The MAS(Museum aan de Stroom)


시인 T. S. Eliot이 왜 그의 시집 “황무지(the Wasteland)”속 “죽은자를 묻음(The Burial of the Dead)” 이란 거창한 제목의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ist month)”이라고 했는지 이곳 벨기에의 항구도시 안트워프에서 4월의 아침공기를 맞아보니 알수 있을 것 같다. 뜨거운 아침 커피를 든든히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세번째로 큰 무역항인 이 도시의 옛 한자동맹(The Hanzehuis)시대 부두 창고로 쓰였던 곳에 지어진 현대적 박물관(The MAS: Museum aan de Stroom) 앞에 섰을 땐 북해의 찬바람이 시인 Eliot의 말을 실감케했다.  2011년에 완공된 이 박물관은 중세도시 안트워프에서 가장 최신에다 가장 큰 박물관이라 부두바람 만큼이나 쌀쌀하고 무뚝뚝한 인상을 지울수 없었지만 큰 유리벽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 찬바람을 막아주어 오히려 아늑하고 따뜻했다.



친절하게도 손목에 티켓대신에 채워주는 수갑같은 밴드가 거슬리고 불편했지만 어쩔수 없이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층마다 다른 주제로 된 전시관을 둘러봤다. 나에겐 특히 한층 전체를 할애한 “권력의 전시(The Display of Power)”란 층이 인상깊었다. 여긴 유럽,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관을 한층에 다, 그러나 구역을 구별해 어두컴컴한 조명으로 전시했는데 특히 아프리카관이 나의 이목을 끌었다. 어떻게 power가 생성되고 어떻게 power를 가진자가 power를 이용해 타자를 굴복시키며 특히 이 power의 상징들은 무엇인지를 전시하고 있었다. 이 전시관을 둘러보며 이 조그만 유럽의 나라가 어떻게 큰 이웃들(프랑스, 독일, 영국)사이에서 생존의 지혜를 터득했는지 또 어떻게 이웃 큰 나라들을 어설프게 흉내내었는지도 이 도시의 역사관을 통해 솔직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안트워프라는 이 벨기에의, 아니 플레미쉬라고 해야 더 들어맞는(Flemish. 네덜란드어를 쓰는 지역과 그 사람들. 벨기에의 반은 이 지역. 나머지 반은 프랑스어를 쓰는 왈룬지역. 벨기에는 언어와 지역갈등이 아직 남아 있음) 이 항구도시가 중세로부터 스페인 식민지 시절 그리고, 아주 중요하게, 이 소국 벨기에의 해외 식민지개발 시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관은 흥미를 북돋아 주었다. 안트워프는 여로모로 벨기에의 부산이다. 벨기에 제 1의 항구이며 두번째 도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럽의회 본부가 있는 브뤼셀은 잘 알지만 루벤스의 명화를 품고있는 화랑같은 대성당이 있는 안트워프는 잘 모른다. 그래서 더 정들고 싶고 더 알고싶다. 로마제국 시절 줄리어스 시저가 말했다든가. “벨기에 병사들은 용감하다. 왜냐하면 무식하니까!” 두고두고 이 대제국 로마 황제가 그냥 지나가는 말로 내뱉은 말이 거의 2천년 동안 소국 벨기에 사람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우스갯소리로 남아 싫든 좋든 어떻게 보면 National Psyche로 남아있지만 또 다른 벨기에의 상징 오줌싸개 소년(마네킨 피스)처럼 지혜롭게 웃으며 극복하는 벨기에 사람들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왜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과 영국의 웰링턴 군대가 이곳 벨기에 땅 워털루에서 싸움을 벌였는가? 왜 청일 전쟁이 조선땅에서 벌어졌는가? 소국의 역사는 다 비슷한 모양이다. 하지만 18-19세기엔 지리적 이점과 네덜란드의 부흥으로 세계로 진출하는 기회도 얻었었다. 그리고 자기 땅보다 수십배나 큰 아프리카의 식민지도 개발했다. 벨기에령 콩고는 아프리카의 중앙에 위치하며 벨기에 레오폴드2세 왕은 필리핀 식민지를 스페인으로 빼앗아 오려는 응큼한 계획이 실패하자 이 아프리카 식민지 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그에겐 식민지 개발로 벨기에가 “위대한” 국가임을 보여주는 징표로 여겨 국가 최대 정책으로 삼았으니 이는 식민지 개발의 강자인  이웃 영국과 프랑스에 뒤지지 않으려는 소국의 몸부림이었으리라. 그래서 그의 식민지 정책은 역사상 유례없는 악명(Atrocities)만 떨치고 말았다.


이 소국 벨기에의 역사를 되씹으며 이 power전시장 아프리카관 바로 앞의 흑인 조각상앞에 서니 폴란드계 영국 소설가 ‘조셉 콘라드’가 쓴 중편소설 ‘어둠의 핵(Heart of Darkness)’를 자연스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작은 벨기에령 콩고가 주 배경이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 몇 년전(2013)에 돌아가신, 아프리카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가 직설화법으로 “인종차별적 소설”이라 고발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권 대학의 영문과에선 이 소설이 중요한 텍스트로 읽혀지고 토론되는 그래서 이제는 Classic이 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중심 무대를 아프리카에서 베트남 전쟁중의 베트남과 캄보디아로 옮긴 것이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그 유명한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이다. 영화를 먼저 본 나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미국의 전시 헬리콥터가 황혼이 지는 아름다운 열대 정글위를 가장 미국적인 팝송을 배경음악으로 빙빙 솟아올라 수평으로 진행하며 뿜어대던 장엄한 죽음의 화염… 석양과 화염이 뒤섞이고, 팝송과 귀청터질 것같이 윙윙대던 헬리콥터 소리가 뒤섞인… 문학과는 또다른 원색적인 영화예술의 힘을 처음으로 영화관 어둠속에서 소름끼치게 경험했던게 이 영화다. 이름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붉은 색상의 배경에 가린채로 죽어가고, 아니 그 붉은 열대의 황혼이 배경인 것은 전쟁의 참상과 죽음을 상징했던가? 의미없이 씹어대던 흑인병사의(왜 할리우드 영화에선 대부분이 흑인들만 껌을 씹는지?) 반복되어 씹어대던 껌은 참을 수없는 죽음의 가벼움을 상징하는가? 고막을 찌르는 헬리콥터와 요란한 팝송의 소음에 가려진 들리지 않은 울부짖음이 환청처럼 이 박물관에서 들린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럼 다시,



왜 아프리카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체베가 이 소설을 인종차별 소설이며 아프리카를 유럽인의 시각에서 정형화시킨 소설이라고 고발한 것일까? 이 소설은 1899년 영국 빅토리아 후기 시대에 발표되었다. 처음엔 그리 큰 반향을 얻지 못하다가 나중에 그 진가가 발견되어 지금은 100대 영어소설이니 죽기전에 읽어야만하는 소설 50권 같은데서 항상 뽑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유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폴란드 선원이며 영국으로 귀화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모국어인 폴란드어로 쓴 소설이 아닌 자신에겐 외국어인 영어로 썼다는 점도 흥미를 돋군다. 폴란드어나 자신이 영어보다 훨씬 더 잘 구사한 프랑스어로 쓴게 아닌 작가 자신이 고백했듯; “애매모호한(ambiguous)” 제 3의 언어인 영어로 썼기에 이 소설엔 ‘이건 이것이다’ 라고 딱 결론을 내릴수 없는 그 무엇이 숨어있다. 그리고 형용사를 마구써대서 애매모호함을 더해주는 것 같다. 그럼 애매모호함이란 무슨 뜻인가? 이는 상충하는 두 의견이 일치를 이룰수 없을 때 쓰는 말 아닌가(two ideas seem not to agree)? 그렇기에 또 분명한 결론을 내릴수 없는 상황도 애매모호하다고 할수 있다.


하여튼 이 소설 첫부분은 주인공 ‘찰스 말로우(Charles Marlow)’가 테임즈 강 배위에서 자신의 인생일대 경험담을 얘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영국 상선을 타고 ‘상아(ivory)’무역을 취급하는 벨기에 무역회사의 임무를 띠고 ‘커츠(Mr. Kurtz)란 아주 중요한 이 회사의 일급요원을 만나러 아프리카 중앙의 원시적인 거대한 콩고강(the Congo River)을 거슬러 올라가며 경험한 자신의 얘기다. 여기서 문명의 상징인 제국의 수도를 가로지르는 테임즈 강과 원시와 미개의 상징인 아프리카의 콩고강은 뚜렷이 대비되며 작가는 주인공 찰스를 통해 인간 그 자체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다. 뱀처럼 휘어져 꾸불꾸불한 이 원시의 강은 인간 내면의 신비하고 풀리지 않는 본성(human nature)처럼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또 더 멀리 상류로 올라갈수록, 원시와 야만으로의 여행이다. 문명에서 원시로 여행하듯 밝음은 짙은 밀림의 숲에 가려 상류로 들어갈수록 어두워진다. 그 가장 깊숙한 곳 그 어두운 곳의 중심(핵)에 큰 병에 걸려 곧 죽어가는 커츠를 무사히 데리고 나오는 것이 찰스의 임무다(영화에선 암살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찰스의 눈으로 기록되는 원시와 야만의 생생한 증언은 어둠과 밝음, 문명과 야만, 유럽과 아프리카를 문자그대로 리얼하게 보여준다. 특히 소설 여러 문장에서 나타나는 콩고강 부족에 대한 묘사는 한 문명화된(?) 유럽인의 눈으로 독자들에게 여과없이 전달된다. 그렇기에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유럽인의 시각으로 이 아프리카인들은 진화가 덜된 미개인으로 왜곡시킬수 있고 식민정책과 착취를 알게 모르게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읽힐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치누아 아체베는 이 소설을 읽은 것같다.그는 미국 암허스트 대학 특강(Chancellor’s Lecture at Amherst on 18 February 1975)에서 “아프리카의 이미지: 콘라드의 소설 “어둠의 핵’과 인종차별(An Image of Africa: Racism in Conrad’s ‘Heart of Darkness’)에서 콘라드를 “a bloody racist”라고 고발한다. 그에겐 이 한 유럽인의 편협된 시각으로 전 아프리카 흑인을 ‘비인간화’ 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고귀한 인간성이 제거된 상태의 형이상학적 전장(a metaphysical battlefield devoid of all recognisable humanity)”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작가인 그에게 노벨상이 수여되지 않았다는 문제는 아직도 논쟁중이고, 우리나라 김지하씨도 받은 제 3세계 문인에 수여하는 “로투스 상(The Lotus Award)”을 받은 작가의 비판이니 그의 소설읽기는 일반독자의 읽음과는 다르게 핵심을 집어내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인 ‘어둠의 핵심’이란 뭘 말하는지를 안다면 문제를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은 지리적으로 어둠의 핵심을 아프리카 심장인 콩고강으로 잡고 얘기하지만, ‘어둠’이란 ‘미개’로 상징성을 띄며 인간본성(human nature)의 상징인 동물적 원시의 상태를, 멀지않은 과거엔 유럽인도 똑같았던 사실을 애써 망각하려하고 본성을 왜곡시키려하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어두운 마음(heart. 심)을 말하지 않을까? 이는 커츠가 쓴 원고 내용으로도 또 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커츠의 죽어가며 내뱉는 마지막 메세지, “호러, 호러(The Horror! The Horror!)”라는데서 왜 작가가 이 제목을 달았는지 그 의도를 유추해 볼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체베가 이해한대로, 식인의 풍습을 지닌 콩고 부족이 ‘호러’하다는 것인가? 아님은 이 부족을(상징적으로 아프리카 흑인 전체를)을 이용해 착취하며 이익을 취하고 또 궁극으론 말살하려는 유럽의 백인 식민주의자를 말함인가? 어느 것일까? 아체베와 아프리카의 대부분 비평가는 ‘호러’를 자구적으로 또 사실적인 묘사로 보여주는 아프리카인의 야만성을 뜻하기에 이 소설이 인종차별적이고 편협한 방식으로 아프리카와 흑인의 이미지를 정형화하고 고착화시킨다고 고발한다. 이에 반박하는 서구의 몇몇 비평가는 이 소설이 의미하는 것을 겉으로 들어난 묘사를 자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소설의 ‘깊이 읽기(Close Reading)’가 아니라고 한다. 소설이란 문학형식이 시와 같이 상징성과 은유를 중요한 도구로 사용함으로 그 본뜻을 찾으려면 사실적 묘사속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의미를 보물찾기하듯 찾아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종차별적 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을  고발한다는 것이다. 결국, 앞서 얘기했듯이, 작가자신이 영어의 애매모호한 점을 지적했듯이 결국 작가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해석을 맡긴게 아닐까?


독자의 해석이란 그 독자의 성장과정과 환경, 교육정도와 개인경험같은 복합적인 요인이 동시에 작용해서 얻어지는 해석이다. 만약에 내가 아프리카의 흑인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을 때 다른 느낌으로 읽으며 다른 뜻을 찾아낼 것이다. 그래서 문학과 예술의 여러 논쟁은 사실 이런 해석상의 차이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의 해석이 여러 정황으로 봐서 절대 옳다고만 할 수있을까? 어쨌든 문학작품은 “옳다 그르다”라고 흑백으로 가를 수는 없는 것 같다. 예술의 해석은 결국 여러 개의 답이 나올수 있는 것이다(multiple interpretations). 사지선다형 시험문제처럼 문학작품을 읽을 수는 없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님은 조국도 될수있고 자기 사랑하는 애인이 될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라고 내버려 둘수도 없다. 문학은 보편성을 띠고 있기에. 개인적으로 읽고, 느끼고, 즐기면 끝나는게 아닌, 소설이 작가의 품을 떠나 출판이 되고나면 벌써 공공의 작품이 되어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이 따르기 때문이다. 문학, 예술 그리고 지금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는 예술형식인 영화까지 사회적 영향력을 빼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왜 아체베가 이 소설을 ‘인종차별’로 고발했는가를 다시 물어볼 이유가 있다. 유럽인에 의해 고착되고 정형화된 왜곡된 이미지의 아프리카를 이 소설은 그대로 재반복해보여주며 이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재생산의 위험성은 비하와 멸시의 역사로부터 시간적으로 먼 후손들에게 이 정형화되고 왜곡된 아프리카 흑인의 이미지를 더욱 더 고착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충분히 있다. 이 소설을 느슨하게 차용한 ‘지옥의 묵시록’을 부산 아카데미 영화관(지금도 있을까?)의 어둠속에서 ‘혼자’ 보았을 때, 왜 영화에 나오는 캄보디아인들은 주인공 커츠(말론 브란도)를 신처럼 떠받드는 미개인이며, 참수한 인간의 머리들을 장대위에 걸어놓는 반문명적이며, 물소를 큰 칼로 순식간에 두동강내는 섬뜩한 원시와 야만으로 묘사될까? 또 왜 한국인인 나는 ‘호러’와 ‘분노’를 동시에 이 영화를 통해서 경험했을까? 그리고 우리나라도 잘못되면 베트남처럼 저런 참상을 겪을 수 있으며 또 왜 미군이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지 하는 좌파적 의문도 처음으로 들었다. 아체베가 이 소설로부터 받은 분노와 비슷하였다. 물론 나중에 이 소설을 읽으며 코폴라의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소설과 다르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사실 이 영화는 소설보다 예술성에서 질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주인공 내면의 고뇌를 소설은 탁월하게 묘사하며 잘 보여주는데 비해 이 원색적인 영화는 흑과 백이 비교적 분명하다는 점에서. 이 세상에서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 중에 원작 소설보다 영화가 더 잘 만들어 진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만약에 그 소설이 깊이있는 작품이면 그것은 시간예술이며 종합예술인 영화에서 인간내면의 흐름을 소설과 같이 깊고 정교하게 표현해낼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체베의 논리와 분노가 이해되는 것이 캄보디아에 갔을 때 태국 수녀님이 하시는 대학생 기숙사에서 캄보디아 대학생과 저녁을 먹으면서 나눈 대화에서도 이를 보여준다. 내가 런던의 우리 성당 신자가 60% 넘게 아프리카 흑인이라고 했을 때 그 대학생들의 얼굴엔 놀라는 기색이 역력함을 목격했다. 런던에 아프리카 사람이 많아서? 그 흑인들이 가톨릭 신자라서? 아님은 그들이 보아온 서구의 대중매체를, 영화를 포함해서, 통해 보아온 왜곡된 흑인의 이미지로 인해? 막바로 한 학생이 ‘어떻게 일하느냐고?,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난 그들의 놀란 표정이 마지막 이유에서 온 것임을 알아챘다. 내 생각으론 한번도 만난적 없는, 아니면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흑인에 대한 이 젊은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란 서구인의 매체를 통해 여과없이 전달된 그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개발은 일반적으로 다 잘못되었지만 왜 소국인 벨기에 마저 질세라 흉내내며 나중엔 다른 나라보다 더 혹독하게 레오폴드 2세 왕은 식민정책을 취했는가? 왜 일본은 서구 흉내를 내며 더 가혹하게 조선에 식민정책을 취했는가? 심리적으로 보면 줄리어스 시저의 왜곡된 말에 심리적 열등감을 알게 모르게 느낀 소국 벨기에는 그런 악명높은 식민정책을 썼고 서구에 대한 심리적 열등을 느껴 어슬프게 흉내냈던 일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어떻게 보면 서구와 일본의 식민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 이들이 강조한 야만에 대한 허울좋은 ‘문명’이란 단어도 한껍질 벗겨보면 다 마찬가지인 것을…, 결국 인간은 다 똑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쩌면 작가도 한가지로 결론 내릴수 없는 ‘애매모호함’을 의도적으로 설치해 놓아 문명과 야만을 동시에 가진 인간의 ‘양면성(문명과 야만)’을 보여주려한 것은 아닐까? 이는 미셸 푸코가  근대 서구의 오만방자함을 질타한 ‘슬픈 열대’도 이를 잘 뒷받침해 주며 혹시, 푸코가 몇 십년 먼저나온 이 소설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이 소설이 그런 면에서 구조주의의 선구가 아닐까? 하여튼, 작금의 런던은 내가 해석한 이 소설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이 소설에 나오는 친숙한 런던의 지명들(테임즈 강, 그리니치, 그레이브 샌드 등등) 중 하나인 뎁포드(Deptford)는 내가 말한 우리 성당에 바로 이웃한 동네다. 만약에 조셉 콘라드가 살아있어 한때 막강한 제국의 수도 런던을 다시 방문한다면 자기가 서술한 이 지명에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아프리카인임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더구나, 자기 동족인 수많은 폴란드인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이곳에 정착해 이 성당 미사에 온다는 사실을 알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현실(reality)과 초현실(surreal)을,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곳이 소설에서 문명의 심장부로 묘사된 런던이다.



작가 콘라드는 이런 미래를 예견이나 했을까?


다시, 이 곳 안트워프의 박물관 아프리카 전시실에서 식민과 착취의 역사는 잘 박제되어있다. 하지만 박제된 이 역사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처럼 보고 경험하는 사람들에겐 언제든지 살아 꿈틀거린다. 그래서 박물관은 죽어 박제된 것을 통해 또 과거를 통해 현재의 자기를 일깨우며 미래를 보는 곳이다. 그렇기에 설치 예술가는 이 역사를 여기에 전시해 놓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시 Eliot의 잔인한 4월로 돌아가자. 왜 시인은 꽃피는, 생명이 움트는 봄인 4월을 역설적으로 잔인(Cruel)하다고 했을까? 박제된 겨울이 잔인한 것 아닌가? 그것도 시의 첫째 줄에? 물론 그가 말한 잔인함은 나처럼 북유럽 안트워프의 차가운 4월의 바람을 의미하진 않는다. 적어도, 내 생각으론, 시인은 희망이 움트는 만물이 다시 생장하는 이 4월이 “반복 또 반복되는 시간의 일시성(Temporary)”으로 보았다. 이 덧없고(Transitory), 반복적이며(Repetition), 일시적인(Temporary)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unfulfilled hope)은 잔인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 시에서 오히려 겨울이 더 좋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여기서의 희망이란 ‘영원한 봄(Eternal Spring)’을 말하며 이는 인간의 정신(Mind)속에만 존재할 뿐 눈에 보이는 세상만물속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Eliot의 시 ‘황무지’는 종교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희망인 ‘영원한 봄’은 현상계에선 찾을수 없고 종교적, 영적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a spiritual reality that is no less real for having no exact material equivalent). 그래서 이 영원성(Eternity)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Eliot의 시에서 읊은 것처럼 4월은 계속해서 잔인한 달일 수 밖에 없다. 이 반복의 잔인함은 이 시의 나머지 대부분을 채우는 ‘기억의 행위(Act of Remembering)’로 수행된다. 콘라드의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는 또 잔인함을 경험함과 같다. 그래서 아체베는 이 ‘반복의 잔인함’을 걱정했으리라. 이 잔인한 4월이 가기 전에 나도 이 영원의 깨달음이 왔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또 카페인에 의존해 반복되는 잔인함을 이겨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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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SA 전경
안트워프 광장의 건물.
박물관에서 바라본 안트워프 전경
박물관에는 유대인과 그들의 문화도 전시해 놓았다.
시내의 관광 마차
안트워프의 중심 광장
영화 '지옥의 묵시록'
소설 '어둠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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